(앞에서 계속됩니다.)
(26) 제목의 의미 (1): 친애하는 T, 지금까지 우리는 작품의 주제 및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 작품의 제목인 “탑”은 여러 가지의 의미를 지닙니다. 첫째로 그것은 드레스덴의 가상적 도시구역을 가리킵니다. 텔캄프는 집필 당시에 실제로 존재하는 “바이서 히르쉬” 지역을 염두에 두었다고 합니다. 둘째로 제목은 상아탑 내지 동독의 교양 있는 시민계급의 삶의 영역을 지칭합니다. 작가는 작가 그룹 내지 의사들이 살아가는 지역으로서 “탑 속에서”를 설정하였습니다. 학식을 지니고 삶의 모든 측면을 비판적으로 그리고 합리적으로 판단할 줄 알았던 계급은 1977년 비어만 사건 이후로 더 이상 정치에 관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사회 참여를 거부하고 실내음악에 몰두하는 등 사적인 삶에 몰입해 있었습니다. 작가는 이들의 도피주의적 사고방식이 동독 사람들의 삶의 권태를 부추겼으며, 사회적 변화에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음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제목 “탑”이 독일어의 동사 “türmen (도피하다, 도주하다)”를 유추하는 것도 의미심장합니다.
피터 브뢰헬의 바빌로니아의 탑
셋째로 제목은 구동독의 시스템 내지 체제를 상징합니다. 탑은 바빌로니아의 무너진 탑을 연상하게 합니다. 바빌로니아의 탑이 다양한 언어의 혼란으로 무너졌다면, 구동독 역시 불협화음으로 무너졌는지 모릅니다. 흔히 음악에서 “불협화음 Katafonie”을 “나쁜 소리”로 규정합니다. 쇼스타코비치는 자신의 오페라 「맥베스 폰 므첸스크」에서 소련의 국가 권력을 “나쁜 소리”로 암시한 바 있습니다. 물론 당국의 권력이 서슬 푸른 독재의 칼날을 드러낸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사회주의 통일 당 SED은 국경선을 넘어서려는 사람들 그리고 체제비판적인 작가들을 통제하고 감시했습니다. 작가는 이 모든 것을 세 사람의 화자를 통해서 생동감 넘치게 다루고 있습니다.
(28) 등장인물과 실존인물: 텔캄프는 실존인물을 작품에 반영했습니다. 이를테면 게오르크 알트베르크는 작가 프란츠 퓌만 Franz Fühmann을 연상시킵니다. 아르보가스트 남작은 알프레트 아르덴네 Alfred Ardenne를 가리키며, 바르자노라는 인물은 통독 직전에 권력을 쥐고 있었던 한스 모드로프 Hans Modrow를 떠올리게 합니다. 에두아르트 에쉬슬로라케는 작가 슈테판 헤름린 Stephan Hermlin 내지 페터 학스 Peter Hacks를 연상하게 하며, 다비드 그로트는 슈테판 하임 Stefan Heym을, 요헨 론도너는 위르겐 쿠친스키 Jürgen Kuczyinski를 떠올리게 합니다. 유디트 세볼라는 작가 안겔리카 크라우스 Angelika Krauss와 거의 동일한 인물처럼 보입니다. 비토 하르트는 문학 평론가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 Mercel Reich-Ranicki를 연상시킵니다. 이를테면 비토 하르트는 다음과 같은 발언은 라이히-라니츠키의 결론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가 특정 작품을 칭찬하면, 우리는 그 작품의 판매를 통해서 돈 벌 수 있고, 그가 특정 작품을 혹평하더라도 우리는 다른 작품의 판매를 통해 돈 벌 수 있습니다. 그가 침묵하면 우리는 놀란 듯이 모든 질문을 개방시키면 그만입니다.” 텔캄프가 실존인물을 다룬 까닭은 작품의 리얼리티를 살리기 위함 때문이었습니다.
(27) 고전의 인용: 첫째로 텔캄프의 작품은 괴테의 장편 소설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시대』를 모범으로 설정한 것 같아 보입니다. 서술 방식이라든가 “교육 주”에 관한 언급은 괴테의 소설에도 그대로 출현합니다. 둘째로 『탑』에 묘사되고 있는 아틀란티스에 관한 서술은 E.T.A. 호프만의 『황금냄비』에서 차용한 것처럼 느껴집니다. 호프만은 전환기의 소설에서 자주 인용되는 낭만주의 작가입니다. 잉고 슐체는 어느 에세이에서 호프만을 “드레스덴 신화의 개척자”로 명명할 정도입니다.
그밖에 일일이 언급하기 어렵지만, 빌헬름 하우프 Wilhelm Hauff, 리하르트 바그너, 줄 베른 Jules Verne, 토마스만 Thomas Mann, 후고 폰 호프만슈탈 Hugo von Hofmannstahl, 마르셀 프루스트 Marcel Proust, 헤르만 헤세, 에른스트 얀들 Ernst Jandl, 귄터 그라스 그리고 두르스 그륀바인 Durs Grünbein 등의 작품 내지 그들의 발언 등이 작품에 인용되고 있습니다. 한 가지만 인용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음은 에른스트 얀들의 「방향」이라는 시입니다. 시인은 의도적으로 자음 “l”과 자음 “r”을 바꾸어 쓰고 있습니다. 번역 불가한 시이므로 그대로 인용해보도록 하겠습니다. “manche meinen/ lechts und rinks/ kann nicht verlwechsern/ werch ein illtum!” (「Lichtung」 von Ernst Jandl) (“사람들은 좌와 우를 혼동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가?”)^^
(28) 마지막으로 동독 시스템에 대한 작가의 입장을 언급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베 텔캄프는 귄터 그라스의 다음과 같은 발언을 일언지하에 부인했습니다. 사라진 나라, 동독은 그라스에 의하면 “편안한 독재국가”였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독재 치하에서 살았지만, 이를 의식하지 못하고, 사회 보장주의의 체제에서 무사안일주의의 삶을 영위했다는 것입니다. 텔캄프는 이러한 견해를 처음부터 강하게 반박합니다. 구동독은 개개인의 삶을 음으로 양으로 간섭하고 방해해 왔기 때문에 끔찍한 독재 국가로 평가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구동독의 체제와 시스템을 대하는 사람들의 관점 내지는 시각의 차이입니다. 이러한 차이는 놀랍게도 구동독 출신의 작가들에게도 그대로 계승되고 있는데, 세대별로 조금씩 편차를 드러내는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44년생의 작가 크리스토프 하인은 구동독을 독재 국가였지만, 그래도 민주화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인정하였습니다. 이 세대에 비하면 50년생 내지 60년생의 작가는 구동독의 국가 체제에서 어떠한 장점도 발견할 수 없다고 공언하곤 합니다. 가령 브루시히, 잉고 슐체 그리고 텔캄프 등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들은 사회주의의 이상에 대해 조금도 미련을 두지 않습니다. 그런데 70년생의 작가들은 이들에 비해 구동독에서의 삶을 아련한 유년의 추억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한 인간의 체험 현실은 당사자의 판단과 세계관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 영향을 끼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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