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계속됩니다.)
친애하는 H, 문학 작품집 한 권이 베스트셀러가 되면, 해당 작가는 반드시 찬란한 영광을 누리지는 않습니다. 성공이 오히려 작가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드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지요. 야나 한젠은 순식간에 구설수에 올랐습니다. “작품은 포에지 앨범을 방불케 한다.” “주인공은 자기만족, 자기 합리화에 혈안이 되어 있다.” “역겹다.” “서독 작가라면 아무 것도 아닌 내용을 그렇게 시시콜콜 서술하지 않았을 것이다.” “모든 것이 불명료하고, 지독한 아이러니로 가득 차 있다.” 심지어 몇몇 비평가들은 야나 헨젤을 “과거 극복의 문제에 해악을 끼치는 아마추어 작가”라고 분류하게 하였습니다. 작품을 신랄하게 비판한 사람들은 대부분 구동독 출신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동독 출신의 젊은이들로 하여금 그렇게 야나 한젠의 작품을 비난하게 한 것일까요? 이에 관해서는 본격적인 연구가 뒤이어야 할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동독 출신의 젊은이들이 “공동체의 우리라는 감정”에 대해서 적대감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야나 헨젤 역시 이러한 심리적 반응을 어느 정도 예견한 바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정도의 거대한 적개심이 출현할지는 그미 역시 예상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동독 출신의 아이들이 갈구하는 것은 옷의 장신구에 담겨 있다.
야
나 헨젤의 작품 평과 관련하여 한 가지 재미있는 현상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동쪽지역 아이들』동서독 사람들의 반응이 서로 달랐다는 점입니다. 가령 서독사람들은 작품에 대해 호감을 표명한 반면, 동독 출신의 사람들은 작품을 신랄하게 비난하였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로볼트 출판사 Rowohlt Verlag의 편집자 알렉산더 페스트 Alexander Fest는 다음과 같이 논평하였는데, 이는 그럴 듯하게 들립니다. 서독 사람들은 수십 년 동안 개인주의의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동독인들의 이질적인 삶에 대해 흥미를 드러낸 반면, 동독인들은 보편적 의미로서의 “우리”를 거론한다는 자체를 혐오스럽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친애하는 H, 우리도 나중에 통일이 되면 북한 출신의 작가의 작품을 읽게 될 것이고, 북한 출신의 독자가 이에 대해 논평할 것입니다.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를테면 한반도의 경우 남한으로 귀순한 사람들은 두 가지 유형의 입장을 견지합니다. 그 하나는 지독한 반공주의의 입장으로서 북한 사회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으려는 그룹이며, 다른 하나는 정치와 이데올로기에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새로운 사회에 순응하며 편안하게 살아가려는 그룹입니다. 물론 우리는 나중에 한 인간의 삶의 행적이 어떠했는가? 하는 물음을 고려하면서 그들의 사고를 다양하고 객관적으로 수용해야 할 것입니다. 동독 출신의 젊은이들 역시 추측컨대 이러한 두 그룹의 입장을 견지하는 게 분명합니다. 그들은 더 이상 구동독을 알고 싶지 않으며, 그냥 서방세계에 동화되어 살아가고 싶을 것입니다.
서독 출신의 작가, 플로리안 일리스 Florian Illies (1971 - )는 2003년의 시점에 『골프 세대 Generation Golf』라는 책을 간행하였습니다. 이 책은 80년대 서독에서 자라난 세대의 특성을 기술한 비문학 텍스트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일리스에 의하면 1965년에서 1975년 사이에 태어난 서독 젊은이들은 폴크스바겐 “골프” 세대라고 명명될 수 있다고 합니다. 이들은 물질적 어려움을 겪지 않고, 정치적으로 첨예한 갈등을 겪지 않는 복지국가에서 성장하였으므로 정치의식이 투철하지 않으며, 유행과 향락 문화 그리고 시장의 상황에 민감하게 반응한다고 합니다. 작가는 “골프 세대”의 헛된 세계관 내지 사고방식 등을 신랄하게 풍자했지만, 서독과 동독의 젊은이들은 이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유독 야나 헨젤에게는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습니다. 그미가 동독 출신의 여성이기 때문이었을까요?
야나 헨젤은 모든 것이 오해에서 비롯된 것임을 분명히 해명하였습니다. 자신은 결코 망각될 수 없는 과거의 편린을 글로써 재구성했을 뿐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도대체 13세의 소녀가 불법 국가에 관해서 무엇을 안단 말인가?” 하고 인신공격을 퍼부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그미는 다음과 같이 일갈하였습니다. “나는 나의 작품에 기록된 것보다도 더 지적으로 사고합니다.” “사람들이 내 책을 읽고 나를 알게 되었다면 그것은 오산입니다. 나는 앞으로 더 이상 소설을 발표하지 않겠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미는 2008년에 엘리자베트 레터 Elisabeth Raether와 공동 집필하여 『새로운 독일 동화들 Neue deutsche Märchen』을 발표하였고, 2009년에 『주의, 동독 지역. 왜 동독인들은 달리 머물러야 하는가? Achtung Zone. Warum wir Ostdeutschen anders bleiben sollte?』하는 에세이 문헌을 간행한 것 외에는 더 이상 자신의 고유한 문학 작품을 발표하지 않았습니다.
크리스토프 디크만과 함께. 왼쪽에서 두 번째가 야나 헨젤
그렇다면 야나 헨젤은 과연 무엇을 위하여 작품을 집필하고 발표했을까요? 그미가 작가로서 궁극적으로 의도한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일단 우리는 그미에게서 작가의 마스크를 벗겨보기로 합시다. 그미는 78년생의 젊은 아가씨입니다. 아침에 게으름 피우며 늦잠자고 싶어 하며, 언젠가 1년간 미국에서 이국적인 삶을 영위하고 싶어 합니다. 또한 그미는 대학이라는 보호 받은 공간에서 잠시 머물고 싶어 합니다. “엄마가 옳다고 굳게 믿기 때문에” 대학을 정식으로 졸업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미의 거주지는 베를린의 프렌츨라우어 베르크 지역이며, 기분이 우울하면 맹렬하게 조깅함으로써 스트레스를 단숨에 날려버리는 발랄한 여자입니다. 주로 패스트푸드로 식사를 해결하기 때문에 엄마의 걱정을 독차지하는 딸이기도 합니다. 사실 26세의 처녀가 엄마를 언급한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태도라고 여겨집니다. 그미는 자신의 소설을 엄마와 언니에게 헌정하였습니다. 말하자면 소설의 비밀스러운 수취인은 어머니인 셈입니다.
그렇습니다, 『동쪽지역 아이들』의 비밀스러운 수취인은 다름 아니라 야나 헨젤의 부모입니다. 그미는 동독이라는 가옥을 순식간에 걷어서 없애버린 이전 세대에 대해 고통스러운 어조로 항변하고 있습니다. 어째서 나의 사랑스러운 방을 모조리 허물어버렸는가? 하고 말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젊은이로서 어른이 되기 위한 필수적인 코스가 부모의 세계관에 저항하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동쪽지역아이들”은 그러한 성인식의 기회를 한 번도 자발적으로 획득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부모의 권위는 13년 전 며칠 사이에 순식간에 파괴되었기 때문입니다.
야나 헨젤이 이전세대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을 던집니다. “왜 당신은 당시에 침묵으로 일관했는가요?”가 아니라, “왜 당신은 모든 것을 망각해야 한다고 믿었는가?”라고 말입니다. 아마도 작가의 동년배의 독자들 가운데 수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질문을 던지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대는 오로지 불법 국가라는 오명으로 인하여 당시 사회주의의 현실을 모조리 쓰레기통으로 집어넣을 자격을 지니고 있는가? 국가가 불법적이라고 해서 우리의 유년의 삶 역시 불법적인가? 우리의 잃어버린 유년의 삶은 어떻게 보상 받을 수 있는가? 우리의 잃어버린 찬란한 유년은 보상받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은폐되지 말아야 하고, 무시되지 말아야 하는 게 아닐까? 등의 물음을 생각해 보십시오.
친애하는 H, 이와 관련하여 야나 한젠의 작품은 새로운 현실에 대한 순응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게 아니라, 유년을 상실한 세대의 어떤 내밀한 동경의 문제를 건드리고 있습니다. 그들의 유년의 꿈은 어른이 된 이후에도 깊은 심리적 위안으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작가는 그것이 과연 어떻게 되살릴 수 있을까? 하고 묻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야나 헨젤의 작품은 결국 동서독 사람들의 오해 내지 상호 불신을 제거하는 매개체가 될 것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작품은 동독 수상 안젤라 메르켈 Angela Merkel도 언급한 바 있듯이 “서쪽의 대부분의 사람들, 즉 동쪽에 친척이나 친지가 없던 모든 사람들이 동독을 익명의 불법 국가로 여겼을 뿐, 그것 사람들의 개별적 삶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는데, 작품은 그곳에서도 하나의 일상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참고 문헌
박희경: 트라반트 세대의 멜랑콜리, in: 독어교육, 47권 2010, 381 - 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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