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계속됩니다.)
실제로 부버는 모든 유토피아의 사고를 종말론의 세속화된 현상으로 이해하였다. 그는 종말론의 전통적 유형을 다음과 같이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하였다. 그 하나는 예언적 종말론으로서, 바람직한 무엇에 대한 준비 행위 내지 준비 자세를 주창한다. 다른 하나는 계시의 종말론으로서, 바람직한 무엇이 이미 사라졌다고 간주한다. 계시의 종말론은 부버에 의하면 순수 유토피아와 동일하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주어진 현실에서의 실현과 다른 차원의 사항이기 때문이다. 이에 비하면 예언적 종말론은 구체적 유토피아로 작용할 수 있다. 계시의 종말론에 의하면 바람직한 무엇은 이미 지나가고 없다. 그렇기 때문에 수단은 목표와 분명하게 구분될 수 있다. 그렇지만 지나간 목표는 개방된 분명한 언어로 기술될 수 없다. 그렇기에 그것은 실현을 위한 모든 중개의 방법론들을 처음부터 차단시킨다. 실현과 무관한 순수한 이상으로서의 유토피아는 칸트가 말하는 순수 이성의 개념과 일맥상통한다. 이는 철학에서 언급하는 통각 (統覚, Apperzeption)의 개념과 관련되는 무엇이다.
마르틴 부버는 비록 마르크스주의를 전적으로 지지하지는 않았지만, 블로흐, 벤야민 그리고 브레히트처럼 유토피아가 완전한 실현의 기능을 지니고 있지 않음을 인정한 사상가에 속한다. 순수 유토피아에 대한 비판은 부버에 의하면 반드시 순수 유토피아를 통한 비판으로 이어져야 한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예언적 종말론은 계시의 결단 없이는 성립되지 않으며, 계시의 종말론은 스스로를 준비하는 임의적 상 없이는 성립되지 않는다. 순수 유토피아와 실현 가능한 유토피아는 비판 행위의 맨 앞부분에서 변증법적으로 서로 의존하고 있다. 중요한 사항은 다음과 같다. 즉 부버가 마르크스의 독창적 이론을 마르크스주의로 이해한 것은 아니라는 게 그 사항이다. 부버가 비판한 것은 소련의 마르크스주의의 철학, 역사적 필연성만을 내세우는 사회주의 사상, 바로 그것이었다. 이는 부버의 견해에 의하면 지극히 반유토피아적이다.
그렇다면 어떠한 이유에서 역사적 결정론이 소련에 정착된 것일까? 그것은 소련 혁명가들이 법칙성만을 강조하고, 일체의 역사 발전의 변화 가능성을 용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오스카 넥트 (Oskar Negt) 그리고 허버드 마르쿠제 (Herbert Marcuse) 등도 이에 관해서 언급한 바 있지만, 이들의 논거는 당면한 현실만을 고려한 경험론에 입각해 있다. 역사적 결정론과 관련하여 부버는 자유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규정하였다. “자유란 어떤 완전히 결정되고 예정되지 않는 조건들의 관련성 내에서의 동기이다.”
부버는 유토피아 사회주의를 찬양하면서, 어떤 순수한 주의주의 (主意主義)의 결론으로서가 아닌, 주의주의의 사회주의를 주창하였다. 그는 마르크스주의 속에 도입된 법칙 숭배주의를 부정하고, 역사 속의 자유로운 결정을 위한 의지의 동기를 강조하였다. 따라서 부버의 가르침은 경향성과 관련된 마르크스주의로 규정될 수 있을 것이다. 부버는 한 가지로 확정된 목표로 향한 정치적 행위를 타파하고, 감추어진 경향성을 발견하라는 요망으로 요약된다. 부버에게 중요한 것은 자유로운 삶 그리고 자유의 사회적 가능성을 찾으려는 유토피아였다. 부버의 유토피아는 거대한 조직, 훈련, 전체에 대한 개인의 예속 등으로 관철될 수 없는 무엇이었다. 에른스트 블로흐 역시 “역사적 자동주의 der geschichtliche Automatismus”를 부정한다는 점에서 부버의 견해에 동조한다. 루카치에 대한 블로흐의 다음과 같은 충고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수단은 결국 목표를 착색시키고, 그것을 뒤집어 놓을 것이다.”
문제는 부버에게 도사린 아나키즘사상 속에 있다. 블로흐 역시 부버와 마찬가지로 동유럽의 사회주의의 방향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고 믿었다. 그 이유는 마르크스의 이론 내에 국가의 유토피아적인 자유로운 기능이 첨예하게 고려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국가의 역할과 변모 가능성은 아나키즘의 중요한 유산이다. 그러나 소련 초기에 레닌과 트로츠키는 아나키스트와의 제휴를 거부하였다. 마르틴 부버는 중앙집권적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살면서, 지방분권적 아나키즘을 표방하였다. 그의 아나키즘적 유산은 이스라엘의 농업 코뮌 운동인 키부츠 (Kibbuz)에서 부분적으로 계승되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시각으로 고찰할 때 부버의 지방분권적 입장은 중세의 형제조합과 같은 낭만적 진부함을 드러내고 있다.
마지막으로 부버와 블로흐의 사상을 비교해보자. 부버는 유토피아의 기능을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 성취될 수 있는 사고로 규정하였다. 이는 그의 주의주의의 입장에 근거하고 있다. 부버는 유토피아를 사회 영역으로 축소화시키면서, 어떤 우주를 포괄하는 종말론으로부터 구분한다. 부버가 인간 이성이 갈구하는 무엇을 주어진 현실에서 찾으려고 하는 한, 부버의 사상은 블로흐의 그것과 근친하다. 그렇지만 두 사람은 여러 가지 면에서 서로 다르다. 부버가 신앙인, 마르크스주의의 적대자, 조합의 대변자라면, 블로흐는 무신론자, 마르크스 추종자, 국제 노동운동의 대변자이다.
그럼에도 부버와 블로흐는 인간이 갈구하는 보편적 의향을 가장 명확하게 지적하였다. 블로흐는 유토피아의 현실적 관련성, 다시 말해서 지금, 이곳의 형이하학적 구체성을 설명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필연의 나라에서 자유의 나라에로의 이행은 다만 아직 종결되지 않은 과정적 질료에 터전을 두고 있다. 지금까지 멀다고 생각한 극단적 미래와 자연 그리고 예견과 질료는 역사적 변증법이라는 유물론의 정해진 토대 속에서 일치하게 될 것이다. 질료 없이는 현실적 예견의 토대도 발견되지 않을 것이고, 현실적 예견 없이는 질료의 지평도 파악되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만약 부버가 이 말을 듣게 되면, 블로흐의 생각에 적극적으로 동의할 것이다.
(끝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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