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Bloch 저술

박설호: (5) 희망의 원리, 제 1차 강의

필자 (匹子) 2024. 2. 25. 10:24

(앞에서 계속 됩니다.)

 

21. 마르크스의 「포이어바흐 테제」: 블로흐는 희망의 원리 제1권에서 마르크스의 포이어바흐 테제에 관한 글을 첨부합니다. 마르크스는 1845년에 「포이어바흐에 관하여 Ad Feuerbach」라는 글을 집필했는데, 바로 여기에 포이어바흐에 대한 마르크스의 비판이 요약되어 있습니다. 블로흐는 11개의 테제를 순서대로 분석하는지 않고, 주제 중심으로 분류하여,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견해를 제사합니다.

 

첫째로 포이어바흐는 무신론의 관점에서 종교 속에 은밀하게 작용하는 신의 권능과 관련된 이데올로기를 예리하게 지적했지만, 역사 속에 작용하는 헤겔의 변증법에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습니다. 그렇기에 노동의 본질적 기능은 포이어바흐에게는 그저 부수적인 사항에 불과했습니다. 둘째로 포이어바흐는 추상적 종으로서의 인간 소외를 언급할 뿐, 노동의 소외 문제라든가 여기서 묘하게 기능하고 있는 잉여가치의 폭력을 예리하게 간파하지 못했습니다. 셋째로 포이어바흐는 종교 이데올로기에 대한 추상적 비판으로 자신의 논의를 끝내는데, 이는 마르크스에 의하면 이론과 실천이라는 차원에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이로써 포이어바흐의 종교 비판은 무신론이라는 폐쇄적인 결론으로 종결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22. 「포이어바흐 테제」의 중요성: 블로흐가 중요하게 고찰한 것은 마르크스가 이해한 “의식에 대한 존재의 우월성”입니다. 특정 인간의 의식과 사고는 그 자체 절대적 판단으로 경험 이전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에 처해 있는 인간의 여러 존건에 의해서 나중에 그리고 상대적으로 확정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고는 경제적 생산양식의 시스템이 노동자와 자본가의 도덕적 실천적 판단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로써 마르크스는 블로흐에 의하면 포이어바흐가 추적한 기독교의 본질에 대한 비판에서 경제적 토대의 중요성을 발견해내었다고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가 놏져서는 안 될 사항은 마르크스의 11번째 테제입니다. “철학자는 세계를 다양하게 해석했지만, 문제는 세계를 변화시키는 일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론이 아니라, 실천이락고 합니다.

 

인간의 의식 그리고 판단력 등은 주어진 경제적 토대에 의해서 상대적으로 형성되고, 인간 소외는 19세기 중엽 유럽 사회에서 드러난 노동의 조건 그리고 노동자에 대한 착취에서 명징하게 드러납니다. 바로 이 대목은 마르크스의 구체적 유토피아를 시사하고 있습니다. 세계의 변화는 무엇보다도 자본주의 사회의 경제적 수탈이라는 이데올로기가 타파됨으로써 가능하게 되리라고 합니다.

 

(부록) 

 

포이어바흐에 관하여

 

카를 마르크스

 

1.

지금까지의 모든 유물론 (포이어바흐의 유물론 역시 포함된)의 주요한 결함은 대상, 현실, 감각 등을 오로지 객체 혹은 관조라는 형태로 파악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것들을 감각적 인간적인 행위로서 실천으로서 파악하지 못했으며, 주체적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행위하는 측면은 유물론과는 반대로 관념론에 의해서 -관념론은 현실적이고 감각적인 인간 행위를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데 - 추상적으로 발전되었을 뿐이다. 포이어바흐는 사고 속의 대상과는 전혀 다른 어떤 감각적인 대상들을 원한다. 그러나 그는 인간 행위 자체를 대상화된 행위로서 생각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그는 기독교의 본질에서 기껏해야 이론적 태도만을 어떤 진정한 인간 행동으로서 고찰할 뿐이다. 이에 비하면 실천이란 더러운 유태인의 현상적 형태로 파악되고 그렇게 고착되고 있다. 따라서 그는 “혁명적” 행위, “실천적이고도 비판적인” 행위의 중요성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다.

 

2.

대상의 진리가 과연 인간의 사고로 귀속되는가? - 이러한 물음은 이론적인 질문이 아니라, 실천에 관한 질문이다. 오로지 실천을 통해서 인간은 진리, 즉 현실성과 권력, 자신의 사고의 이쪽 측면을 증명해내야 한다. 사고가 현실적인가, 비현실적인가? 를 논하는 것은 실천으로부터 고립되어 있으므로, 그 자체 다만 스콜라적 질문일 뿐이다.

 

3.

환경 및 교육의 변화에 관한 유물론의 학설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즉 환경은 인간에 의해서 변화되고, 교육자 스스로 교육받아야 한다는 사실 말이다. 그러므로 유물론적 학설은 사회를 두개의 -이를테면 그중 하나가 “다른 하나” 위에 존재하고 있는- 부분으로 구분할 수밖에 없다.

상황의 변화를 인간 행위의 변화 내지는 자아의 변화와 일치시키는 일 - 그것은 오직 혁명적 실천으로써 파악되고 합리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4.

포이어바흐는 종교의 자기 소외라는, 세계가 종교적 혹은 세속적으로 이중화 (二重化)되어 있다는 사실적 근거에서 출발하고 있다. 그의 작업은 종교적 세계를 그 세속적인 토대로 용해시킨다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가령 세속적인 토대가 그 자체 스스로 파기되고, 다만 구름 속의 독자적인 나라로서 고착되어 있다는 사실은 오직 세속적 토대의 자아 분열 및 자체 모순으로 설명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세속적 토대는 그러한 모순 속에서 이해되어야 할 뿐 아니라, 동시에 실제 혁명으로 화해야 한다. 만약 지상의 가족이 이를테면 신성 가족의 비밀로서 발견되고 난 다음에, 우리는 전자 (세속적 가족 -역주)를 이론적으로 그리고 실천적으로 파괴시켜야 한다.

 

5.

포이어바흐는 추상적 사고에 만족하고 있지 않고, 그 직관을 원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감각을 실천적인, 인간적이고 감각적인 행위로서 파악하고 있지는 않다.

 

6.

포이어바흐는 종교적 본질을 인간적 본질로 끌어들여 해결하려고 한다. 그러나 인간의 존재란 개별적 개개인들 속에 속한 추상적인 무엇이 아니다. 스스로 처하고 있는 현실에서는 인간은 다만 구체적인 현실적 상황과의 앙상블이다.

 

포이어바흐는 이러한 실재 (實在)하는 존재에 관해 해명하려 하지 않고 있으므로, 그가 주장하는 것은 어쩔 수 없이 다음과 같다.

(1) 역사적 진행 과정을 도외시하고, 종교적 정서 자체에만 시각을 집중시키고 있으며, 어떤 추상적이고 -고립된- 인간 개인을 전제로 내세우고 있다.

(2) 따라서 본질은 어떤 내면적인, 침묵하는 "종 (種)"으로서의, 다시 말해 수많은 개인들을 자연스럽게 연결시키고 있는 보편성으로 파악되고 있을 뿐이다.

 

7.

포이어바흐는 고로 “종교적 정서” 자체가 이미 어떤 사회의 소산임을, 그가 분석하는 추상적 개인이 어떤 특정한 사회 형태에 속하고 있음을 간과하고 있다.

 

8.

모든 사회적 삶은 본질적으로 실천적이다. 이론을 신비주의로 유인하는 모든 비밀들은 인간적 실천 속에서 그리고 이러한 실천의 파악 속에서 합리적 해결책을 발견한다.

 

10.

오래된 유물론의 입장이 시민주의 사회에서 형성된 것이라면, 새로운 유물론의 입장은 인간적인 사회 혹은 사회적 인간에 의해 형성될 것이다.

 

11.

철학자들은 세계를 다만 다양하게 해석하였지만, 문제는 세계를 변화시키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