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Bloch 저술

박설호: (4) 희망의 원리, 제 1차 강의

필자 (匹子) 2024. 2. 24. 08:38

16. 낙관하지 않는 희망: 흔히 사람들은 유토피아를 “불가능성의 가능성”이라고 표현합니다. 불가능에 가까운 갈망은 아무래도 추장적 유토피아일 것입니다. 이에 비하면 구체적 유토피아는 “(배우고) 습득한 희망docta spes”을 가리킵니다. “습득한 희망”은 인간의 갈망의 정서를 포괄하는 개념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감 떨어지는 것을 갈구하는 수동적 기대 정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힘든 삶 속에서 절망을 느끼는 자의 애타는 갈망 속에서 희망의 본연의 특성이 발견됩니다. 테리 이글턴Terry Eagleton은 이것을 “낙관하지 않는 희망”이라고 표현한 바 있습니다.

 

희망의 내용은 주어진 현실에서 처음에 의도한 바대로 성취되지 않습니다. 일견 희망은 이와 결부된 환멸을 전제로 작용하는 것처럼 비칩니다. 그렇다고 개인적, 사회적 동인인 갈망 자체가 처음부터 포기되거나, 무시될 수는 없습니다. 왜냐면 희망은 하나의 성취를 지향하지만, 성취에 의해 결과론적으로 자신의 가치가 판명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갈망이 성취되는 순간, 인간은 원래의 갈망에 대한 완전한 충족감을 느끼지 못합니다. 왜냐면 성취의 순간, 어떤 또 다른 욕망이 인간의 전의식 속에 기묘하게 첨가되기 때문입니다. 이는 성취감이라는 우리의 내적 만족을 방해합니다. 이전의 갈망은 새로운 갈망으로 교체됩니다. “인간이 추구하는 무엇은 인간으로부터 도망치는 무엇Quid quaerendum, quid fugiendum”입니다.

 

17. 성취의 우울: 샨도르 페퇴피 (Sándor Petöfi, 1823 - 1849)에 의하면 희망은 “카르멘과 같은 창녀”와 다를 바 없습니다. 어리석은 군인, 돈 호세가 순정을 바치면, 카르멘은 미련 없이 그의 곁을 떠나고 맙니다. 인간은 어째서 실현의 순간에 하나의 완전한 충족감을 느끼지 못할까요? 이는 “성취의 우울Melancholie des Erfüllens”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블로흐는 이에 대한 이유를 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갈망의 강도는 성취의 순간에 마치 썰물처럼 우리의 마음속에서 빠져나갑니다.

 

나아가 둘째로 희망의 내용은 “실재하는 객체”로 주어져 있을 때보다, “어떤 상의 객체”로 의식 속에 투영될 때 더욱더 강하게 우리를 설레게 합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Thomas Aquinas, 1225 - 1274)는 “사물들은 그 자체보다는 인간의 마음속에서 더 고상하게 비친다. Res nobiliores in mente quam in se ipsis. 라고 말했습니다. 사물 자체와 인간의 의식 속에 비치는 사물은 서로 다릅니다. 실제 사물보다 마음 속에 비피는 사물이 더욱 영롱하고 아름답게 투영되는 까닭은 우리의 마음속에 애타는 갈망이 묘하게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18. 실현의 아포리아: 자고로 인간이 추구하는 갈망은 동일한 갈망이 실현될 때의 충족감보다 더욱 강렬한 법입니다. 가령 음악가 헥토르 베를리오즈 (Hector Berlioz, 1803 - 1869)는 결혼 후에 실망감을 드러냅니다. 여배우 해리엇 스미드슨Harriet Smithson을 깊이 사랑하다 마침내 결혼에 골인합니다. “아, 내가 아무 것도 아닌 그것을 위해 그토록 고뇌하고 가슴아파했다니.” 이는 사랑에 대한 이전의 갈망이 성취된 사랑의 충족감보다도 더욱 강렬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행복은 마치 무지개와 같아서 우리가 어린 시절에 가까이 다가갈 때, 행복은 우리에게서 더욱더 멀어집니다. 블로흐는 이러한 사실을 헬레나의 상, 쇠렌 키르케고르 (Søren Kierkegaard, 1813 - 1855)의 삶 그리고 니콜라우스 레나우 (Nikolaus Lenau, 1802 - 1850) 등을 예로 들면서, 자세히 해명하고 있습니다.

 

그리스 최고의 미녀를 트로이 사내에게 빼앗겼다는 안타까움이 결국 그리스 군인들을 10년 동안 트로이 전쟁을 치르게 했습니다. 가령 호프만슈탈의 극작품에서 나타난 바 있듯이, 헬레나에 관한 그리스 군인들의 상은 실제로 파리스와 함께 이집트에 도피한 실제의 헬레나와는 엄청나게 달랐습니다, 키르케고르는 영원한 사랑의 상을 잃지 않으려고, 레기네 올젠에게 이별을 선언합니다. 이로써 그가 쟁취하게 된 것은 이별의 눈물 그리고 철학적 저작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니콜라우스 레나우는 자신이 동경하던 신대륙을 떠나 귀국길에 오르면서 자신이 그토록 열망하던 새로운 나라는 오로지 자신의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19. “아직 아님Noch-Nicht”의 존재론: 블로흐의 존재론은 처음부터 후설과 하이데거의 고착된 형체로서의 명사적 개념을 용인하지 않습니다. 고착된 형체로서의 존재는 시간이 멈춘 순간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현존재의 변화 가능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습니다. 에른스트 블로흐는 자아와 세계의 변증법적 변화에 집중하면서, “아님”이란 부정적 상황을 고찰합니다. “아님”은 무언가 없다는 사실에 대한 안타까움 내지는 혐오를 뜻하는데, 궁극적으로 배고픔이나 가난에서 비롯한 것입니다.

 

“이러한 처지에서 도저히 사람답게 살아갈 수는 없다.”는 비탄이 뒤섞인 자학의 마음가짐을 생각해 보세요. 지금 여기에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무엇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존재는 “아니” 있습니다. 이러한 “아님”은 그 순간부터 자아와 세계의 변화를 강력하게 촉구합니다. 이는 언어학적으로 “주어(S)는 아직 술어(P)가 아니다. Subjekt ist noch nicht Prädikat.”라는 문장으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20. 다시 “아직 아니다.”: 우리는 삶의 과정에서 갈망이 일차적으로 해결되는 것을 체험합니다. 그러나 이루어진 무엇이 원래의 의도와는 달리 불충분하다는 것을 절감합니다. 이때 솟아오르는 것이 바로 “아직 아님Noch-Nicht”이라는 정서입니다. 이는 변모의 과정에서 출현하는 주관적 모순입니다. 자연과 지구 내지는 세계 전체를 고려해 봅시다. 생산력이 중개된 다음 단계의 사회에서도 어떤 충분하지 못한 느낌, 즉 불만의 감정이 얼마든지 솟구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객관적 모순으로서의 “아직 아님”입니다. 아직 아님은 여전히 무언가 충족되지 못했음 것을 인지하는 정서입니다. 이러한 정서는 결국 최종적으로는 “모두 있음” 내지는 “훌륭한 최고 상태 summum bonum”로 향해 나아가게 하고 자신괴 세계를 발전시키게 합니다. 이것이 바로 유토피아가 나아가는 과정으로서의 길이며, 이를 위해서 무엇보다도 필요한 자세는 블로흐에 의하면 전투적 낙관주의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