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세계 문화

서로박: (2) 레비스트로스의 '슬픈 열대'

필자 (匹子) 2023. 9. 25. 10:58

(앞에서 계속됩니다.)

 

8. 아메리카 토착민의 삶은 서구의 그것과는 별개의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는 장 작 루소의 다음과 같은 열정적인 전언이 실려 있습니다. 즉 드니 디드로Denis Dederot는 『부갱빌 여행기 보유』에서 오지에서 살아가는 토착 주민을 그야말로 찬란한 이상적 인간으로 묘사한 바 있는데, 이는 루소에 의하면 잘못된 처사라고 합니다. 선원, 상인, 군인 그리고 선교사들은 처음부터 신대륙에 관한 이모저모를 편견 없이 전해줄 능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루소는 『인간 불평등 기원론」 (1755) 그리고 『사회 계약론』 (1762)을 집필하면서 자연과 자연인의 가식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생활방식을 갈망해 왔다고 고백했습니다. 자신은 인류학과 민속학을 탐구하는 자들에게 하나의 모범적인 범례를 제시하려고 했다고 합니다. 즉 위선과 해악 그리고 범죄를 넘어서서, 그야말로 바람직하고 진정한 인간 사회의 굳건한 토대에 관한 범례 말입니다.

 

루소는 레비스트로스에 의하면 바람직한 사회에서 살아가는 현대적 인간의 모델을 선취하려고 했습니다. 루소의 자기 성찰은 인류학과 민속학적인 경험을 더 훌륭하게 이해할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다고 합니다. 물론 야생을 추적하는 연구자가 대체로 자신이 속해 있는 문명사회를 비판적으로 고찰하고, 낯선 지역에서의 새로운 무엇을 그야말로 긍정적이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식의 모순적 성향을 드러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열대 지역학 연구자는 레비스트로스의 견해에 의하면 문명과 야생 사이에서 단순하게 하나를 택일하지 않고, 다차원적인 시각으로 두 개의 문화를 중립적으로 고찰할 혜안을 지녀야 합니다.

 

9. 보로로 종족과 남비크와라 종족의 다른 생활방식: 『슬픈 열대』는 특히 민속에 관한 장에서 보로로 종족 그리고 남비크와라 종족의 생활상과 그들 고유의 축제 문화에 관해서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보로로 문화는 지금까지 아마존 열대 지역의 외부에서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는 특이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들의 사회 조직은 이전에 레비스트로스가 탐색한 바 있는 인접 지역인 리우 베르멜루 종족의 그것과는 놀라울 정도로 현격한 차이를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레비스트로스는 두 종족이 벌이는 축제의 춤을 서로 비교하면서, 이들 종족의 직관적 유희를 예리하게 포착해냅니다. 두 종족은 상호성이라는 이타주의의 원칙적 토대에서 사회적인 통합을 도모하고 있습니다. 토착 인디언들은 마을 전체가 기획한 질서를 사회적 종교적 관점에서 자연스럽게 따르고 있습니다. 레비스트로스는 이러한 이타주의적 순응은 보로로 종족과 남비크와라 종족의 사회적 문화적 삶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세밀하게 서술해 나갑니다.

 

10. 슬픈 열대, 서구인들의 침투와 전염병: 기독교 신앙은 19세기 말부터 아마존 토착민에게 크고 작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1845년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결성된 살레시오 교단의 선교 단체는 이곳의 인디언 문화를 조직적으로 파괴해 나갔습니다. 실제로 서구 문명은 이른바 기독교 전파라는 미명으로 아메리카 토착민들의 고유한 삶과 문화를 잔인하게 파괴해 나갔습니다. 문명 침투에 대한 레비스트로스의 비판은 이 대목에서 놀라운 가치를 전해주기에 충분합니다.

 

아마존의 상류에 자리한 보로로 종족은 외세의 침탈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고유한 토속적 방식으로 그들 고유의 문화를 보존해 나가려고 했으나,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들은 인디오 문화를 수호하지 못하고, 그들 고유의 전통문화를 서서히 상실하게 됩니다. 그들은 지금까지의 독자적인 방식이 변화되는 현실 앞에서 고리타분하고 무력하다는 것을 자인하면서, 낯선 기독교 문화를 자신의 것으로 덥석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레비스트로스가 어째서 자신의 여행기의 제목을 ”슬픈 열대“라고 규정했는지를 간파할 수 있습니다.

 

11. 수렵과 채취로 살아가는 남비크와라 인디언 종족: 남비크와라 종족은 장마가 끝난 뒤의 건조 시기에 높은 고원에 거주하면서 수렵과 열매 채취로 살아갑니다. 이들의 삶은 멕시코 원주민의 생활상을 연상할 정도입니다. 이들은 혼자 독자적으로 생활하기 때문에 이들에게서 어떠한 사회 조직에 관한 입장이나 관심이 발견되지 않습니다. 사회의 구성은 오로지 부부라는 공동체로만 드러날 뿐입니다. 오로지 족장에게만 일부다처의 생활방식이 허용되는데, 이는 남비크와라 종족에게서는 하나의 ”권력의 기술적 전제 조건“에 해당하는 내용입니다. 남비크와라 종족이 백인들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인 것은 그들의 의학 기술에 감탄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서구 사람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발을 들여놓은 뒤부터 온갖 서구의 전염병이 창궐하기 시작했습니다. 레비스트로스는 이들과 인간적으로 소통하며 신뢰를 쌓아갔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함께 방랑 생활을 영위하면서 그들의 고유한 언어를 배우는 것은 필수적 전제 조건이었습니다.

 

12. 야생의 자발적 평등의 삶: 레비스트로스는 남비크와라 인디언 원주민들에게 깊은 동정심을 느끼면서 이들이 얼마나 자신의 고유한 방식으로 생활하며, 자신의 감정을 어떻게 부드럽게 드러내는지를 하나하나씩 밝혀나갑니다. 이들은 매우 친절하고, 자발적이며, 자신의 에로스를 솔직하게 드러내고 실천하는 자연인들입니다. 남자와 여자는 잠자리에 들어서 가장 다정하게 서로의 감정을 육체적으로 진솔하게 표현합니다. 이들에게는 개인적 야심은 찾아볼 수 없으며, 공동의 이익을 위해서 자기 자신을 얼마든지 희생하려는 자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그들은 위계질서를 전혀 내세우지 않습니다. 누구도 추장의 직책과 권한에 의문을 품지 않습니다. 이들이 추구하는 자발적 평등의 삶은 레비스트로스에 의하면 실제로 존재하는 인간 존재의 가장 원시적인 형태인 셈입니다. 실제로 레비스트로스는 조셉 콘라드의 소설 『암흑의 심장』을 읽고 깊이 감동하여, 자신도 아마존을 소재로 한 소설 작품을 쓰려고 했다고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그는 야생의 역사, 즉 자연사에서의 시간은 변증법적 이성으로 파악될 수 있는 인류사의 그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종찬: 열대의 서구, 朝鮮의 열대, 서강대학교 출판부 2016, 445쪽)

 

13. 자의식을 변화시키게 하는 학문, 민속학: 레비스트로스는 민속학에서 여타 다른 학문에서 발견할 수 없는, 가장 중요한 기능을 도출해냅니다. 민속학은 한마디로 ”다양한 유형에 관한 학문science de la diversité“으로서 자기중심의 일방적 관점 그리고 자의식이라는 명백성을 포기하게 하는 학문 영역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민속학자는 아무런 선입견 없이 현실적 체험을 반추하면서, 지금까지 쌓은 자신의 모든 습관, 자세 그리고 세계관을 차례대로 의심하게 됩니다.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지식 체계와 자신의 고유한 견해는 민속학이라는 새로운 영역의 경험을 통해서 얼마든지 수정되고 상대화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레비스트로스의 『슬픈 열대』는 지금까지의 모든 행위를 되새겨보게 하고 성찰하게 합니다. 이 점에 있어서 그것은 우리에게 어떤 새로운 문학적 차원을 안겨주기에 충분합니다. 아니나 다를까, 조르주 바타이유George Bataille는 이 책에 제시하는 지평을 하나의 ”시적 차원ouverture poétique“이라고 명명했습니다. (George Bataille: Critique, 1956, S. 150 – 155.)

 

14. 인간 존재에 관한 성찰, 미래의 삶: 레비스트로스의 언어는 다층적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는 단순 보고자의 차원에서 모든 것을 연대기 순서대로 기술해나가지는 않았습니다. 그의 문체는 섬세하기 이를 데 없는데, 많은 부분에 있어서 마르셀 프루스트가 자신의 장편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À la recherche du temps perdu』 (1913/ 1927)에서 동원한 바 있는 ”유추의 특성propriété de l'association“이 엿보일 정도입니다. 『슬픈 열대』의 마지막 장은 인간 존재에 관한 근본적인 성찰을 담고 있습니다.

 

레비스트로스가 제기하는 문제점은 우리를 깊은 비애의 심연 속으로 빠져들게 합니다. 서구인들은 기술 문명이라는 미명으로 원시적인 토착 문화를 깡그리 파괴하게 하고, 토착 인들의 미래의 삶을 망치는 데에 이바지했습니다. 유럽 사람들은 막연한 낭만주의의 갈망으로 원주민들의 낯설고 이국적인 사회를 동경하면서 그 안으로 침입해 왔습니다. 이로써 아메리카 토착 인들의 자발적이고 자연스러운 삶의 방식은 유럽인들의 이윤 추구의 농간으로 잔인하게 파괴되었습니다. 어쩌면 레비스트로스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분명하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즉 제삼세계에 가한 서구인들의 끔찍한 폭력과 해악은 종국에 이르면 문명사회의 불행으로 되돌아오게 되리라는 사실 말입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