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세계 문화

서로박: (1) 레비스트로스의 '야생의 사고'

필자 (匹子) 2023. 10. 7. 11:14

 

인디언의 문화 또한 세계 역사의 부분이다.” (레비스트로스)

토템의 사고 속에서 생태 친화적인 생명 사상이 깃들어 있다.” (필자)

 

 

1. 야생의 사고는 인간 이성의 일방적 방향의 사고와는 다르다: 흔히 레비스트로스의 대표작은 『슬픈 열대』라고 하지만, 자신의 사상을 가장 적확하게 반영한 문헌은 『야생의 사고La Pansée sauvage』 (1962)입니다. 왜냐면 이 책은 야생 그리고 민속학 연구의 본질적 가치를 밝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야생은 문명 세계의 인간에 의해 정복당하는 영역이 아니라, 그 자체 고유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문명과 야생은 제각기 일장일단의 특징을 지닌 이질적인 무엇입니다. 그렇기에 야생의 사고는 문명사회의 시각이 근본적으로 절대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줍니다. 1962년에 레비스트로스의 『오늘날의 토템 사상Le Totémisme aujourd'hui』이 발표된 바 있습니다. 여기서 저자는 과거의 아마존을 탐험하던 시절을 새롭게 떠올리면서, 이른바 토착민들이 품고 있는 “토템의 환상”이 과연 어디서 기인하는가를 구체적으로 심도 넘치게 천착하고 있습니다. 이때 레비스트로스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품고 있었던 토템의 사고의 근본 내지는 배후를 도출해내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2. 세계 속에는 영혼이 자리하고 있다. 토템 사상의 경우 지금까지 민속학과 인류학에서 진척되던 일반적인 분류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왜냐면 토템 사상의 배후에는 어떤 특이한 고유성이 자리하기 때문입니다. 19세기의 민속학은 열대 지역 사람들의 생활상이라든가 문화의 내부를 파고 들어가 세심하게 고찰하지 않고, 바깥에서 그들의 피상적인 삶의 방식만을 관망해 왔습니다. 이로써 토착 인디언들의 삶의 배후에 도사린 독특한 세계관이 제대로 정확하게 파악되지 못했습니다. 물론 서구 사람들이 원주민들의 민속에 관해서 객관적으로 인식하려고 노력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원주민들의 민속적 인간학적 가치는 아이러니하게도 서구 사람들이 흔히 “원시적”이라고 배척해버리는 바로 그 내용 속에 은폐되어 있습니다. 서구 사람들은 동식물과 광물을 인간 존재와는 다른 대상으로 치부하는 반면에,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이것들을 자신과 동등한 생명체로 고찰하고 있습니다.

 

3. 서구인은 이득의 관점에서 세계를 바라본다. 토템 사상은 애니미즘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토착 인디언들은 야생의 모든 사물을 그야말로 마력적으로 바라봅니다.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야생의 사고는 레비스트로스에 의하면 한마디로 동물을 획득하거나 길들이기 위한 목적으로 태동한 인간의 일방적인 의향과는 철저하게 구분됩니다. 그것은 말하자면 형식적 측면에서 학문적 시스템과의 유사성을 보여줄 뿐입니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서구의 식물학자들은 식물을 분류할 때 무엇보다도 인간의 의향을 중시하면서 식물의 기능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그렇기에 식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종족 번식의 메커니즘이라고 판단합니다. 이에 반해 아마존 토착 인디언들은 감각적으로 주어진 사물을 대할 때 외양적 차이에 따라서 식물을 분류합니다. 다시 말해서 외양, 색깔, 냄새 그리고 크기 등이 식물을 분류하는 데 최우선적 조건이 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식물을 약초로 그리고 영양 공급원으로 활용하려는 의향은 별반 중요하지 않습니다.

 

4. 문화적 창출 행위로서의 브리콜라주: 토템 사상 속에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신비적인 성찰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것 역시 나름대로 지적 전략으로 이해되는데, 그 자체 논리적이고 질적인 문제를 파악하려는 의도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원시인들에게는 상 그리고 개념 사이의 중간 지점을 받아들이는 수단이 주어져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레비스트로스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부호는 그림과 마찬가지로 어떤 구체적인 무엇이다. 그러나 그것은 무언가를 지시하는 능력으로 인해 개념과 무척 흡사하다.” 이로써 신비로운 사고는 마치 무언가를 지적으로 조립하는 작업, 다시 말해서 “손재주bricolage”에 의해서 실행되고 있습니다. 모든 도구는 손의 놀림에 의해서 자연스럽게 조립되고 만들어집니다. 아니나 다를까, 인디언 토착민들은 자신 앞에 주어진 소재를 임기응변으로 사용하여 그들 고유의 문화를 창출해냅니다.

 

5. 신비적 사고는 대립의 중개 작용에서 출발하지만, 모든 것을 통합하는 구성체를 지향하지는 않는디. 인디언들의 지적인 손재주가 주어진 것을 어떤 일원적 구성체로 집약하려는 목적으로 활용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레비스트로스에 의하면 언제나 가능하고 언제나 새롭게 행하는 재조직화 작업을 통해서 오로지 주어진 것들을 다양한 무엇으로 변모하게 하는 데에만 쓰일 뿐입니다. 원래 신비적인 사고는 (자연–문화, 삶–죽음, 남성=여성 등과 같은) 기본적인 대립에서 출발합니다. 모든 신화는 하나의 이야기를 전제로 하듯이, 그것은 처음부터 여러 가지 사건에 관한, 어떤 구조화된 전체성을 창출하려는 목표를 지닙니다. 말하자면 대립의 중개 작업은 이러한 방식의 과정을 통해서 작동될 수 있습니다.

 

레비스트로스는 이러한 방식의 중개 작업이 처음부터 어떤 전체성의 “개방”을 포기하게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습니다. 이를테면 물리학은 어떤 포괄적 법칙을 통해서 자연을 “개방”시키려는 목표를 연속적으로 지니고 있는데, 인디언 토착민들의 신화적 사고는 이와는 다르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레비스트로스는 다음과 같은 견해를 철저하게 배격하고 있습니다. 즉 신화 속에 어떤 무엇을 가식적으로 끌어내어, 주어진 현실로부터 등을 돌리게 하는 망상이 자리한다는 견해 말입니다.

 

6. 다른 인종, 다른 문화, 다른 가치: 우리는 아메리카 인디언들에게 서구 사회의 이성이라는 척도를 적용할 수 없습니다. 19세기의 민속학자들은 우주적으로 유효한 시각을 파기할 수 없었기 때문에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그저 다른 삶 다른 문화를 견지하고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음의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즉 모든 원시 공동체의 부호는 천차만별이고, 토착민들 스스로 고유한 인간 존재라고 여기고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민속학자들은 새로운 땅에서 자신과는 전혀 다른 인종 그리고 이들의 이질적인 관습과 문화가 존재한다는 점을 발견하면서 이에 소스라치게 놀라곤 합니다. 그렇기에 그는 오로지 심층적이고, 무의식적인 영역, 다시 말해서 강렬함이 일탈한 영역에서만 자신이 맨 처음 추구한 (감각의 기본적 조건이 되는) 우주적 특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