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한국 문학

(명시 소개) 조달곤의 시 「북십자성」(2)

필자 (匹子) 2021. 8. 1. 11:52

(앞에서 계속됩니다.)

 

내 이 지상을 뜨는 날

은하철도를 타리

안드로메다행 999호 열차에 오르는

단 한 번 맞이하는 여행 앞에서

마음 몹시 부풀어 오르리

 

푸른빛의 지구를 등지고

원거리 셀카로 내가 살았던

창백한 푸른 점을 되돌라보고

모래 같이 작은 점 안에서 수십억 인류가

지지고 볶고 살고 있다는 사실을 신기해하면서

 

오르트 구름을 지나 검은 우주를 가로질러

별과 별 사이로

단품처럼 붉게 물들고 있는 은하를 향해서

가리, 슬프고 아픈 기억을 지우며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는 성경 구절도 되뇌면서

죽음이 꿈도 없는 깊은 잠고 같을 수 없다고 중얼거리면서

 

백조역에서 지선을 갈아타고

플라타너스 시골 신작로같이 뻗어 있는 길을 따라

은색 하늘색 억새가 하얗게 피어 있는 강기슭을 지나고

많은 등불이 빛나고 있는 마을을 건너

 

밤마다 반짝이는 먼 눈빛으로

나를 데리러 오겠다는 말을 걸고 있었던 별

내가 태어난 어머니의 별

 

슬픔이란 단어가 없는 곳

환한 밝음만이 있는 곳

 

백조자리 북십자성 별에 도착하리

 

내 이 지상을 뜨는 날

고향에 돌아가듯 은하철도를 타리

열차 오를 때 사랑하는 가족사진 한 장쯤 넣고 가리

 

: 소포클레스Sophokles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태어나지 않는 것, 그게 최상의 사고이다. 그렇지만 태어난 다음 자신이 태어난 곳을 돌아가는 것 - 그것은 두 번째로 좋은 사고이다." 시인은 「북십자성」을 자신이 고향 내지 “어머니의 별”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 네, 시인은 죽음을 어디론가 멀리 떠나는 여행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시인이 단순한 환각 상태로 모든 것을 묘사하는 게 아니라, 여행의 방향을 분명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시인의 여행은 “오르트 구름을 지나 검은 우주를 가로질러” 은하 속의 북십자성으로 향하고 있으니까요.

 

: 여행 도중에 시인은 지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활상을 신기하게 여깁니다. “모래알 같이 작은 점 안에서 수십억 인류가/ 지지고 볶고” 살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 자신의 삶을 돌이켜보기 위해서는 망원경이 필요한 법이지요. 시인의 눈에는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슬픔과 아픔으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모든 것을 망각하는 대신에 죽은 뒤에도 자신이 “꿈도 없는 깊은 잠”에 빠지지 않기를 애타게 바라고 있어요. 최소한의 행복한 순간을 기억하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일 것입니다. 시인은 죽음의 열차에 오르는 순간 최소한 “가족사진 한 장”만큼은 지니고 싶어 합니다. 가족이 현세의 모든 행복을 가져다준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희로애락을 함께 나눈 분들에 관한 기억을 지니고 싶어 합니다. 그게 불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시인은 먼지로 돌아가는 자신의 숙명을 이런 식으로라도 거부하고 싶은 것 같아요.

 

: 그건 최소한의 갈망이지요. 가령 시인은 자신의 유년 시절의 고향의 상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플라타너스”가 뻗어 있는 “신작로”, “억새꽃"으로 가득 찬 ”강기슭“, 크고 작은 ”등불“을 밝히는 ”마을“의 모습은 그 자체 고향의 상이지요. 백조자리의 북십자성 또한 이러한 장소이기를 시인은 바라고 있습니다.

: 죽음 직전의 순간 인간은 누구든 자신의 삶에서 가장 즐거웠던 기억을 떠올리기 마련이지요. 독일의 시인 귄터 아이히 Günter Eich는 방송극 「꿈들 Träume」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했어요. 여기서도 자신만이 체험했던 과거의 소중한 기억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 몇 구절을 인용해보시지요?

나: 그럴까요? “마지막의 시간에 나는 그래도 지구가 아름다웠다고 생각하리라,/ 친구들을, 못난 얼굴을 아름답게 느끼게 하는 선한 마음을 떠올리리라,/ 두 눈을 황홀하게 만드는 사랑 또한./ 어린 시절 언제나 내 곁에서 함께 유희를 뛰놀던 그 개를,/ 언젠가 휴가철에 찾았던 잠란트 해안의 푸른 층층이부채꽃을 생각하리라. (...) 카시오페이아 별자리 아래에서 서서히 비행하던 어느 비행기의 붉고 푸른빛을/ 프랑스 국가 경축일의 램프 아래에서 벌이던 춤을,/ 첼레 성 앞에 이른 아침마다 진열된 과일 향기를 기억하리라./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던 도롱뇽의 심장 뛰는 소리 그리고/ 내 마음을 위로해주던 『서동시집』의 시 한 편을 생각하리라.

 

: 아름다운 시로군요. 아이히의 시는 죽음의 순간 잊지 않으려는 소중한 기억의 편린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에 비해 조달곤은 자신의 죽음을 북십자성으로의 여행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약간의 차이를 드러내고 있네요.

: 그렇습니다. 죽음 이후의 갈망은 조달곤 시인의 다른 시에서는 “너”와의 만남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너”는 시인이 내적으로 갈구하는 연인일 수 있습니다.

: 아니면 “너”는 삶의 슬픔 내지 삶의 아픔을 극복한 대상을 지칭할 수도 있어요. 한 번 인용해 보시지요?

 

: 그러지요. “흐르는 개울물이 조약돌을 만지듯 너를 느끼고 싶다 바큇살이 바퀴를 온전하게 하듯 나는 너를 살고 싶다 둥글게 오므리는 고슴도치의 가시털처럼 구르기 위해 온 몸에 돋아난 무수한 발로 너에게 굴러가고 싶다 낮이 밤 속으로 침몰하듯 너의 허방과 누수 너의 지옥 속으로 떨어지고 싶다 겨울 첫눈 위에 떨어지는 눈물 한 방울이고 싶다 아 시시각각 너의 맨몸을 만나는 매 순간이고 싶다” (조달곤  「너에게」 전문)

: 시에서 “너”는 사랑하는 임 내지 그리운 사물에 관한 아포리아의 존재겠지요. 누구인지, 혹은 무엇인지는 독자의 판단에 맡겨야 할 것 같습니다. 말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