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한국 문학

(명시 소개) “꽃 피는 날에 오지 못해 미안하다.” 정일근의 시 「그믐치」

필자 (匹子) 2021. 9. 3. 11:24

너: 오늘은 정일근 시인의 「그믐치」를 살펴보기로 합니다. 이 작품은 그의 시집 『소금 성자』 (산지니, 2015)에 실려 있습니다.

나: 시인은 진해와 마산에서 살아온 향토 시인으로서 지금까지 꾸준하게 무게 있는 작품들을 발표해 왔습니다. 그믐치는 “음력 그믐에 내리는 눈 혹은 비”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시작품에는 어떤 아픔, 혹은 어떤 행복에 관한 기억 그리고 이를 끝까지 만끽하지 못한 아쉬움이 담겨 있는 것 같아요.

 

꽃 날리는 저녁이다 통점이 스르르

스르르르 등 위로 와 꽃뱀으로 꽉 문다

꽃 피기 전부터 이 악물고 참았다 내 궁극이

하얀 비단으로 풀린다 꽃 피는 날에

오지 못해 미안하다 이제 내 추억의 실마리는

부축 없이 처음에 닿지 못한다

발바닥의 궁륭이 서서히 그믐으로 가고 있다

내 처지보다 누가 먼저 울고 갔는지

꽃나무는 바다, 진해 바다를 향해 서 있다

사부작사부작 그믐치 오신다

 

: 어느 그믐날 순간에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시적 자아는 여러 감회에 사로잡힙니다. 때와 장소는 11월 그믐날 진해 앞바다입니다. 불현듯 내리는 눈을 바라보는데, 갑자기 시인의 잔등이 시큰거립니다.

: 시인은 “통점”이 “꽃뱀으로 꽉 문다”고 표현하고 있네요.

나: 네, 어떤 말 못할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을 때, 고통이 동반된 것이지요. 시인은 눈을 바라보면서 고통의 마지막을 감지하고, 이를 “하얀 비단으로 풀린다”고 표현합니다.

 

: 사람들은 대체로 자신의 과거를 성찰하면서 잘못 행동한 것을 후회하곤 하지요?

: 특히 시인 가운데에는 우울질 유형의 사람들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 우울질 유형의 사람은 느리고 순발력이 없는데, 많은 시간을 후회하면서 보냅니다. 행복의 기회는 순간적으로 엄습하지만, 이러한 유형의 사람들은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다가, 놓치고 맙니다.

: 그렇습니다. 시인은 과거에 감지했던 어떤 아픈 기억을 되새기려고 노력하지만, 아픔의 원인을 쉽사리 찾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과거 체험의 실타래는 모조리 기억 속에서 끌어내지지 않기 때문이지요. “추억의 실마리”는 쉽사리 풀리지 않아, 그 “처음”으로 다가가기 어렵습니다.

 

 

너: 놀라운 것은 이어지는 시구입니다. “내 처지보다 누가 먼저 울고 갔는지/ 꽃나무는 바다, 진해 바다를 향해 서 있다

: 만약 이 구절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그믐치」를 대수롭지 않은 아픔을 노래한, 사적 체험을 담은 작품으로 지레짐작할 수 있을 테지요. 삶에서 접하게 되는 희열과 아픔은 모든 사람들에게 느껴지는 감정이지요. 이는 머리가 아니라, 마음에 해당하는 사항인데, 시적 자아는 이를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내 처지보다 누가 먼저 울고 갔는지”. 명시적으로 언급되지 않기 때문에 마음속의 깊은 상처는 독자들에게 어떤 개방된 상상력을 자극합니다.

: 어쩌면 과거에 겪었던 병치레와 관련되는 게 아닐까요? 병으로 고생한 경험이 시적 자아의 뇌리에 아픈 기억으로 떠오르는지도 모르겠어요. 시인은 뇌종양을 앓은 적이 있으며, 에베레스트 산을 오르다가 고산병으로 고생한 적도 있다고 합니다. 동티모르에서 말라리아로 고생한 적도 있었습니다.

 

나: 그것은 정일근 시인의 시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의 하나의 참고 사항에 불과합니다. 나로서는 “꽃 피는 날에 오지 못해 미안하다”라는 시구가 순간적으로 무언가를 생각하게 하는 중요한 시구인 것 같은데요. 이게 시적 주제의 측면에서 접할 수 있는 아포리아 같습니다.

너: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지요?

나. 인간이라면 누구든 간에 어느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내밀한 아픔을 간직하고 있지요. 이러한 아픔은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고통의 체험으로서, 돈, 사회적 지위, 건강, 지적 능력 등과는 전혀 관련되지 않는 정서입니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찾아오지만, 타인에게 명확히 밝힐 수 없는, 오로지 순간적 통점으로만 각인될 수 있는, “발바닥의 궁륭”으로 힘든 삶을 걸어온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고유한 체험이기도 하지요.

너: 말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