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교복 착용에 찬성하는 학생들: 대학 입시 정시 모집의 면접 시간에 대다수의 수험생들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교복 입는 것을 찬성해요. 등교할 때 혹은 외출 시에 무슨 옷을 입을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요, 학교에 대한 애정 혹은 소속감을 느낄 수 있어요. 사복은 엄청난 빈부 격차를 드러내게 하거든요.” 비단 학생들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다. 학부형들 역시 여전히 교복 착용에 찬성하고 있는 것 같았다. 빈부 차이가 드러날까 봐 교복을 입는다니... 정말로 눈 가리고 아옹하는 이야기이다. 많은 한국 사람들은 교복 착용에 찬성하고 있다. 이는 무척 기이한 일이다.
자고로 사람들의 견해는 주어진 구체적 환경에서 파생되어 나오는 법이다. 가령 인도네시아에서 대마초를 피우다 적발된 자는 사형 당하는 반면에, 네덜란드에서는 길에서 공개적으로 대마초가 판매된다. 어쩌면 견해 차이가 발생하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살아온 환경이 다르기 때문인지 모른다.
2. 복장 위반 그리고 통제: 사복이든 교복이든 간에 빈부 차이는 백일하에 드러난다. 부잣집 아들딸은 비싼 원단으로 교복을 지어입고, 가난한 집 자제들은 싸구려 옷을 입는다. 과거에도 그러했다. 부잣집 아이들은 미군 장교의 옷감으로 교복을 맞추는 반면, 가난한 집 아이들은 색 바랜 “양달령” 교복을 입었다. 그밖에 학생들에게 교복을 입히면 그들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70년대에는 고등학교에 “교련”이라는 과목이 있었다. 고등학생은 마치 군인들인 것처럼 총검술을 배우고 정훈 교육을 받았다. 교련 시간에 학생들은 복장 위반으로 구타당하곤 했다. 무엇보다도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마치 왕처럼 군림하는 교련 선생님의 태도였다. 나를 가르치던 몇몇 선생님들도 과거에 병역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학교에서 쫓겨났다.
유럽의 학생들은 대체로 교복을 원하지 않는다. 그들은 과거에 히틀러 소년단이 유니폼을 입었다는 사실을 잘 기억하고 있다. 교복은 소속감을 불러일으키는 게 아니라, 그 자체 부자유의 상징이다.
3. 교복 입지 않을 자유는 없는가?: 오늘날 독재자들은 이미 물러갔다. 제도적으로는 여러 분야에서 여전히 문제점이 온존하고 있지만, 우리는 얼마든지 민주화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그렇지만 민주 사회는 눈 하나 깜짝할 사이에 독재 사회로 돌변할 수 있다.
자고로 역사는 다음의 사실을 말해준다. 민주화의 과정은 어려우나, 독재화의 과정은 너무나 쉽다고. 자식 농사는 평생 걸리지만, 눈이 뒤집힌 자가 살인을 저지르기는 여반장이라고. 민주화의 과정은 오랜 희생을 치러야 했다. 이에 반해 히틀러는 1933년 불과 몇 달 만에 독재를 위한 권한을 모두 장악하지 않았던가?
나는 군인들이 군복을 입는 것을 반대하지 않는다. 군인들에게 중요한 것은 군인 정신이고, 이는 군인들에게 필요하다. 그러나 학생들이 교복을 착용함으로써 무의식적으로 권위적 체제에 자발적으로 복종하려는 태도에는 철저히 반대하지만, 그래도 그들의 견해를 일단 존중하려고 한다. 다만 내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중 고등학교 학생들에게 교복을 입지 않을 자유, 교복을 거부할 자유가 처음부터 박탈되어 있다는 점이다.
4. 금지하는 것만이 능사인가?: 왜 초등학교 학생들은 교복을 입지 않는가? 왜 중학생, 고등학생들만 교복을 입는가? 대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초등학교 학생들에게는 불필요하나, 사춘기에 접어든 젊은이들에게는 엄격한 통제가 필요하다고 한다. 중 고등학생들이 교복으로 무장 (?)한 채, 대학 입시에 혈안이 되어 있으면, 성에 대한 호기심 내지는 그 밖의 관심사는 사전에 차단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축구가 영국에서 번창하게 된 이유 역시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수십 년 전부터 영국에서는 기숙사 생활을 하는 (님)학생들 사이에서 축구가 권장되었다. 운동 경기를 마친 기숙사 학생들은 피곤하기 때문에 즉시 잠든다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을 경우 그들은 수음하거나, 여학생 기숙사로 뛰어든다고 했다.
모든 것을 금지하는 것만이 능사인가? 어쩌면 판단할 권한을 그들에게 어느 정도 맡기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겠는가? 학생들은 인터넷 등으로 인해서 성과 사랑에 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다. 무조건 금하는 것은 역효과를 불러일으키기 마련이다.
5. 젊은이들 스스로 결정하게 하라.: 기성세대는 청소년들에게 무조건 “하지 말라”고 요구할 게 아니라, 어느 정도의 자율성을 부여해야 한다.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은 게 인간 심리의 속성이 아닌가? 기성세대는 무조건 자식들을 사슬에 꽁꽁 묶어둘 게 아니라, 그들에게 어느 정도의 자유를 베풀어야 한다.
“자기 자신의 잘못을 스스로 깨달음으로써 무언가를 배울 수 있다.”는 것은 교육의 제 1원칙이다. 이를 위해서는 행하기 쉬운 것부터 서서히 실시해야 할 것이다. 대학 입시의 개혁은 무척 힘든 일이나, 교복 철폐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단 기간에 이것이 어려우면, 학교 당국은 학생들에게 교복을 입지 않을 자유를 부여해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여러 가지 교복의 모델을 제시하며, 자율적으로 결정하도록 유도하는 정책도 과도기적으로 바람직할 것이다.
6 저항 정신과 창의력: 젊은이에게 중요한 것은 저항 정신이다. 저항은 반항과 차원이 다르다. 저항은 옳지 않은 모든 것에 이의를 제기하는 일이다. 자식은 아버지에게 반항해서는 안 되지만, 저항할 수는 있다. 학생은 선생님에게 얼마든지 무언가를 따질 수 있어야 한다.
독일의 헌법에는 “국가가 개인에게 폭력을 가할 때, 개인은 국가에 대항하여 저항할 수 있다”고 적혀 있다. 왜 그들은 저항 정신을 강조했는가? 왜 개인의 권한이 국가의 권한의 위에 설정되어 있을까? 흔히 말하기를 한국인들은 창의력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의 견해에 의하면 한국인들의 창의력은 원래 뛰어나나, 한국 사회가 젊은이들로 하여금 잠재적 창조의 능력을 간접적으로 차단시키는 것 같다. 창의력은 하늘에서 그냥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을 의심해야 한다. De omnibus dubitandum.” 왜냐하면 비판의식 내지는 저항 정신이 창의력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이건 분명히 아닌데...”하는 불만으로 어떤 대안을 찾는 숙고 행위야말로 젊은이들의 덕목이요 도전 정신일 것이다.
'2 나의 잡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갇힌 사회의 통로 뚫기 (0) | 2021.03.23 |
---|---|
인물 대신 사상을 (0) | 2021.03.08 |
패스트푸드 유감 (0) | 2021.02.23 |
서로박: 나를 매료시킨 세 권의 책들 (0) | 2021.02.20 |
앵무새떼가 아니었더라면... (0) | 2021.02.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