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나의 글

인물 대신 사상을

필자 (匹子) 2021. 3. 8. 09:35

1.

선생으로 살아가면서 가장 기쁜 일은 무엇보다도 선하고 훌륭한 제자와의 재회일 것이다. 고등학교에서 그리고 대학에서 나보다 인격적으로 더 훌륭한 젊은이들을 많이 만났다. 몇몇 졸업생을 생각하면, 그들에 대한 그리움이 벌컥 솟아오르곤 한다. 이들에 대해 나이를 초월한 우정을 느낄 때도 있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의 어느 대목이 생각난다. 사형 당하게 된 친구는 모친상을 당하여, 가장 절친한 친구를 볼모로 구금케 하고, 고향에서 장례를 치른 뒤 헐레벌떡 감옥으로 돌아온다. 이때는 갇혀 있던 친구가 처형당하기 위해 옥문 밖으로 끌려오던 참이었다. 두 젊은이는 옥문 앞에서 뜨겁게 포옹한다. 죽음조차 나눌 수 있는 친구 - 우리에게 이러한 친구가 있는가?

 

2.

대학에 근무하면서 나는 세 가지 사항을 항상 아쉽게 생각하였다. 제자들에게 가치 있는 학문을 가르치지만, 좋은 직장을 알선해줄 수 없다는 점, 나의 전공이 시장 논리에 의해서 외면당하고 있다는 점, 가까운 동료들과 친하게 어울리지 못한다는 점 등이 그 사항들이다. 이것들은 나뿐 아니라, 많은 동료들도 공통적으로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3.

세 번째의 경우가 특히 안타까웠다. 가령 나는 수년간 억울하게 재임용에서 탈락한 분들의 소식을 신문지상에서 그리고 민주교수 협의회 회보에서 접하곤 했다. 사학의 비민주적 행태로 인하여 수모를 당한 동료들은 한두 분이 아니다. 갈등과 외압을 견디지 못한 분들은 스스로 사표를 제출하는가 하면, 사표 쓰기를 강요당하기도 하였다.

 

예컨대 “사표 쓰면 모든 불상사를 없던 것으로 하겠다.”는 감언이설에 속아 사표를 제출했다가, 학교 당국으로부터 적법한 (?) 절차에 의해 쫓겨난 분들도 있다. 나는 예컨대 고 (故) 정운영 교수의 불행을 안타깝게 여기면서, 사학 당국의 횡포에 대해 분개하였다. 그러나 힘없는 월급쟁이라는 이유에서 내가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것을 지금도 부끄럽게 생각한다. 어떤 비리를 한 사람 개인으로 시정될 수 없는 불가항력으로 단정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시간만 나면 비분강개하는 마음을 추스르며, 공부하고 지냈다.

 

4.

대부분의 국민들은 교수들을 부러워한다. 그러나 교수는 부러움의 대상이 아니다. 교수는 남는 시간에는 항상 책과 씨름해야 하고,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럼에도 유럽과는 달리 남한에서 교수직에 대한 선호도가 높은 것은 기이한 일이다.

 

문제는 “교수도 월급쟁이 한 사람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무시된다는 사실이다. 적어도 비민주적인 사립학교 법이 존재하는 한, 지적 노동자에 대한 탄압은 그치지 않을 것이다. 사립학교 법이라는 비민주 악법이 존재하는 한, 비정규직 강사에 대한 착취가 계속되는 한, 교수 노조의 설립 역시 정당성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5.

누가 격세지감이라고 표현했을까? 20년 전만 하더라도 학생들이 민주화 데모에 가담하여 화염병을 던지면, 교수들은 이들을 말렸다. 무엇보다도 행여나 제자들이 다칠까봐, 그렇게 행동을 취했다. 그런데 오늘날 교수들이 텐트를 치고 데모하면, 학생들은 이를 못 본 체하고 그냥 지나친다. 그렇다면 이러한 기이한 현상은 어떻게 설명되어야 옳을까?

 

이에 대해 명쾌하게 답하기란 어렵다. 왜냐하면 나는 어떤 이슈의 내막을 완전히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단순히 “헤게모니 싸움이다.”하고 단정 짓는 것은 성급할지 모른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세부적으로 속속들이 파헤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왜냐하면 때로는 모르는 게 약일 때도 있으니까. 한 가지 이슈 속에는 얼마나 많은 화자의 의향이 담겨 있을까?

 

6.

교정에 텐트를 치고 농성하는 동료 한 분과 마주쳤다. 나를 대하는 그의 눈빛이 심상치 않다. 나는 그냥 그에게 미소 지으며 인사한다. 그 역시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나에게 목례로 화답한다. 농성에 가담한 동료 가운데에는 종교적 정치적 신념이 투철한 분이 더러 있고, 나와 개인적으로 친한 분들도 있다.

 

데모에 가담하지 않은 나는 중립을 지키고 있는가, 아니면 농성에 반대하는가? 브레히트에 의하면 중립을 지키는 자는 바보 아니면, 배반자라고 했다. 내막을 모르면서 중립을 지키는 자는 바보이고, 내막을 알면서 중립을 지키는 자는 배반자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바보인가, 배반자인가?

 

7.

고백하건대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계파”를 나누고, “줄 서는 일”에는 추호도 관여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나를 특정 계파 사람으로 규정하곤 하였다. 몇 년 전에 인문대학의 어느 동료는 총장 선거 직전에 “대세는 기울어졌다. 줄 잘 서라!”하고 일갈하였다. 그때마다 나는 “차라리 나에게 정확한 정보를 다오. 그러면 알아서 결단을 내릴 테니.” 하고 대꾸하였다.

 

다른 동료 교수는 내 말을 듣고 다음과 같이 비아냥거렸다. “누구도 당신에게 정확한 정보를 흘리지 않을 거요. 가만히 있으면, 우리는 이용당하고, 무언가 행동을 취하면, 우리는 다칠 테니까.” 그래 나는 이용당하기도 했고, 다치기도 했다. 때로는 잘못 판단하는 우를 범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의 “판단 미스”는 대체로 잘못된 정보들을 액면 그대로 믿었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였다.

 

8.

약 10년 전 신학을 가르치는 동료가 저녁 회식 자리에서 나에게 말했다. “우리 편이 되시오. 그렇지 않으면 직장 생활하기 힘들 거요.” 이때 나는 어리석게 침묵하고 있었다.

 

일순간 나의 뇌리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떠올랐다. 예수 그리스도는 박애 정신으로 사람들에게 사랑과 진리를 가르쳐주시고 이를 몸소 실천하신 분이다. 로마의 천민들은 그의 말씀과 행동에 깊이 감복하여 자의에 의해서 기독교도가 되었다. 마찬가지로 그 동료가 “자기편이 되어 달라.”고 호소하지 않고, 정의와 사랑을 실천하는 모습을 보였다면, 따르지 말라고 해도 나는 자발적으로 그를 따랐을 것이다.

 

9.

죽음의 위협을 당하더라도, 노예처럼 비굴하게 구는 것은 장부의 도리가 아니다. 지금까지 나는 “사실”을 따르되, “사람”을 따르며 살아오지는 않았다. 가급적이면 “인물”을 경시하고, “사상”을 존중하려고 애를 썼다. 그러한 한, 나는 어쩔 수 없이 인간미 없는, 용렬스러운 인간으로 취급당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나는 실제로 인간미 없는, 용렬스러운 인간이었다.

 

남한에는 아직도 “사상”이 무시되고, “인물”만이 중시되고 있다. 어쩌면 나 자신의 태도 속에는 어떤 하자가 도사리고 있는지 모른다. “사실”은 올바른 정보로서 기능하지 못하고, 이데올로기에 의해 감추어져 있거나 왜곡되어 있지 않는가? 어쩌면 “인물”을 무시하고 “사실”에만 의존하려는 태도 역시 무조건 타당하다 말할 수는 없으리라. 문제는 실수를 범하더라도 나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풍토를 계속 존속시키는 일이다.

 

10.

그렇지 않을 경우, 두 가지 행동이 남아 있다. 그 하나는 미련 저버리고 훌훌 떠나는 일이며, 다른 하나는 팔뚝 걷어 젖치고 악착같이 싸우는 일이다. 만일 전자를 택하면, 나는 가난한 은자가 될 것이고, 후자를 택하면, 피곤한 몸으로 좌충우돌 시달리는 직장인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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