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나의 글

앵무새떼가 아니었더라면...

필자 (匹子) 2021. 2. 17. 19:39

- 오늘날 미국에서 콜럼버스의 동상은 파괴되고 있다. 인종차별주의자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수많은 원주민을 학살한 사람은 콜럼버스가 아니라, 이후에 신대륙에서 일확천금을 꿈꾸던 정복자들이었다. -

 

 

콜럼버스는 다만 한사람의 항해사이기 이전에 지상의 천국을 찾겠다는 강인한 갈망을 안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여타의 다른 항해사와는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항해사이자, 몽상가요, 혁명가이자, 실천가가 바로 콜럼버스였습니다. 그에게는 엘도라도가 바로 에덴이었고, 에덴이 바로 엘도라도였기 때문입니다.

 

이에 비하면 마젤란은 다만 향료를 찾으려는 부탁으로 세계를 한 바퀴 돌았던 탐험가에 불과합니다. 마젤란은 250명의 선원과 5척의 배를 거닐고 대서양을 떠난 뒤 태평양을 건너다 필리핀에서 살해당합니다. 남은 대원들은 향료를 구입하여 마침내 떠난 지 3년 만에 포르투갈 항에 도착했습니다. 살아서 돌아온 사람은 불과 18명이었습니다. 마젤란은 그저 향로를 찾아 떠난 뱃사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콜럼버스는 무엇보다도 지상의 낙원, 잃어버린 예루살렘을 되찾겠다는 거룩한 포부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를 실천하게 한 것은 지구가 둥글다는 콜럼버스의 강인한 신념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카나리아 군도를 지나 대서양을 향했던 것입니다. 떠나기 전에 콜럼버스는 수많은 책을 읽었습니다. 세네카의 글에서 지동설의 가능성을 읽었고, 플루타르코스의 책을 읽으면서 콜럼버스는 둥근 달이 지구의 거울상이라는 것을 유추할 정도였습니다.

 

당시에 사람들은 인도를 갈구하고 있었습니다. 풍요로운 동방의 신비로운 나라 - 사람들은 십자군 전쟁 때부터 끊임없이 동방을 갈구하고 있었습니다. 요하네스 신부 왕이 지배하는 인도의 나라... 그러나 사람들은 도저히 육로를 통해서 동방으로 갈 수 없었습니다. 터키가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구가 둥글다는 학설이 퍼지게 되자, 사람들은 서쪽으로 향하면, 인도에 도착할 수 있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콜럼버스의 대서양 항해는 동쪽의 찬란한 나라, 지상의 천국, 잃어버린 예루살렘을 찾으려는 평생의 노력이었습니다.

 

그래, 콜럼버스는 마침내 떠났습니다. non plus ultra: 이것은 라틴어로 "더 이상 나은 곳은 없다"는 뜻입니다. 지브롤터 해협에는 이른바 헤라클레스의 두 기둥이 우두커니 서 있는데, 여기에 바로 그 말이 씌어져 있습니다. 그것은 아무도 대서양으로 항해해서는 안 된다는 일종의 경고였습니다.

 

이는 끔찍한 죽음의 바다에 대한 경고로서 페니키아인들이 세워둔 것입니다. 이로써 페니키아 사람들은 타국의 사람들이 영국으로 항해하여 주석 광산을 차지하지 못하도록 하고, 오로지 대서양 항해권을 독점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대서양에 관한 수많은 이야기는 끔찍한 것이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태양이 사라지는 곳, 어둠의 나라, 해초와 잡귀가 가득 찬 곳으로 향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대서양에서는 소문과는 달이 그렇게 끔찍한 괴물이 출현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날씨가 몹시 변덕스러웠습니다. 콜럼버스는 오랫동안 폭풍과 노도와 싸워야 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는 우연히 앵무새 떼를 목격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앵무새 떼가 날아가는 남쪽으로 방향을 전환했습니다. 아, 앵무새 떼가 아니었더라면, -훔볼트의 말대로- 콜럼버스는 틀림없이 나침판 방향대로 미국의 플로리다에 도착했을 것입니다. 앵무새 떼를 따라가다가 그는 히스파니올라 (지금의 아이티) 섬에 도착했던 것입니다. 에른스트 블로흐는 자신의 대작 『희망의 원리』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습니다.

 

콜럼버스가 끔찍하다고 알려진 대서양을 통과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지상의 천국에 대한 굳은 믿음 때문이었다. 그는 수많은 해초와 만났지만, 죽음과 다름없는 참혹한 어둠과 마주치지는 않았다. 또한 어떠한 끔찍한 그림을 보여주는 기둥도 그를 경고하지 않았다. 그 대신 비행하는 새들은 함장에게 어떤 기이한 단서를 제공했다. 서쪽으로 향한 오랜 항해 끝에 콜럼버스는 앵무새 떼를 발견한다. 그때 그는 뱃머리를 약간 남서쪽으로 향했다. 왜냐하면 새들이 그쪽 방향으로 날아갔기 때문이다. 이는 분명히 가까운 육지의 어느 숲에서 잠자기 위한 비행인 것 같아 보였다.

 

훔볼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콜럼버스가 나중에 새떼의 비행을 추적한 것만큼 나중에 엄청난 결과를 초래한 것은 아마 없었을 것이라고 말이다. 만약 콜럼버스가 처음 항로인 카나리아 군도의 위도를 따라 계속 서쪽으로 항해했더라면, 분명히 그는 플로리다에 상륙했을 테니까 말이다. 콜럼버스가 혼란스러운 섬들 대신에 대륙의 (마치 가슴 부위와 같은) 가장 넓은 지역에 당도했더라면, 나중에 북 아메리카를 차지한 사람은 에스파냐 사람들이었을 테니까 말이다.”

 

사실 콜럼버스의 앵무새 때의 발견은 미국 현대사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일대의 사건이었습니다. 만약 콜럼버스가 플로리다에 도착했더라면, 광활한 미국 땅을 차지한 사람들은 나중에 에스파냐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아메리카 개척의 역사는 뒤바뀌었을 것입니다. 앵무새가 아니었더라면, 현재 미국에는 영국 독일 출신 대신에 에스파냐 출신의 사람들이 뿌리를 내렸을 것입니다.

 

앵무새가 아니었더라면, 신대륙은 콜럼버스라는 명칭을 가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앵무새가 아니었더라면, 우리는 세계 언어로서 에스파냐어를 사용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아, 앵무새가 아니었더라면, 역사는 다른 방향으로 진척되었으며, 많은 것들이 다르게 이어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삶에서 하나의 자그마한 선택이 엄청난 결과를 낳게 만들 수 있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콜럼버스가 우리에게 전해주는 교훈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