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나의 글

서로박: 나를 매료시킨 세 권의 책들

필자 (匹子) 2021. 2. 20. 09:52

 

아래의 글은 약 20년 전에 집필된 것인데, 다시 읽어보니 무척 감회가 새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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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K, 당신은 나에게 학창 시절에 감명 받았던 책을 소개해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자칭 열정적인 문학도였던 나는 남들에 비해 책을 많이 읽는 편이었으므로 무슨 책을 소개할까? 하고 오랫동안 망설여야 했습니다. 당시에 나는 교지, 대학신문 가리지 않고, 잡문, 평문을 발표하여 원고료를 타먹곤 하였습니다.

 

너무 자주 글을 발표하게 되자, 학우들에게 “독식 (独食)한다.”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하여 “池高元” (거꾸로 쓰면 “원고지”라는 뜻^^)이라는 가명으로 글을 발표했으니까요. 고료가 나오면 나는 그 돈으로 막걸리 한 잔 걸치고, 잡지 혹은 단행본 몇 권을 구입하곤 하였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는 가난했지만, 꿈 많은 시절이었습니다.

 

친애하는 K, 책이란 삶의 부속품이나 모조품이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쌓았던 세계관이나 비전 등에 격렬한 충격을 주어야 하며, 자신의 감성을 매혹시키는 매체여야 합니다. 19OO년, 그러니까 내가 대학 2학년이었을 때 나는 한 권의 책을 읽고 나 자신이 가꾸어온 초라한 세계관이 붕괴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 책은 다름이 아니라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입니다.

 

마치 말콤 엑스 (Malcolm X)가 일라이자 무하마드의 영향으로 감옥에서의 독서로 스스로 변신했듯이, 나는 리영희 선생의 책을 읽고 나 자신의 편협성을 탈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 전에는 나는 세상을 일방적으로만 바라보려고 했습니다. 박정희 정권과 인권 탄압, 그리고 히틀러 식의 반공 교육을 연상해 보면, K는 그 당시의 분위기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중국의 대변혁, 베트남 전쟁의 배후를 어느 정도 깨달은 때가 바로 그때였습니다.

 

친애하는 K, 흔히 말하기를 “책 속에는 진리가 담겨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거짓된 책들도 많으며, 돈벌이를 위해서 인쇄된 종이 뭉치도 있습니다. 또한 진리가 담겨 있지 않은 책들도 있습니다. 특히 후자의 경우, 그것들은 즐기기 위한 목적을 지니고 있어요. 솔직히 말하면 문학도였던 나는 즐기기 위하여 도스토예프스키 그리고 사르트르의 작품들을 읽었습니다. (그들의 작품들은 대체로 훌륭합니다만, 인간적 면모에 있어서 두 사람 모두 하자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먼 훗날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러시아의 문호는 과잉된 리비도를 주체할 수 없어서 도박을 즐겼는가 하면, 프랑스의 그 위대한 작가의 삶은 여성을 억압하는 마초였고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자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글쎄, 나의 무의식 속에 “무언가 배우자.”는 의도가 잠재하고 있었는지 모릅니다만, 어쨌든 독서는 나에게 쾌락 그 자체였습니다. 그때 나는 우연히 시집 한 권을 수중에 넣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니라 김광규의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이었습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무심하게 날개 치며 돌아가는/ 오리는 얼마나 행복하랴/ 그곳으로 돌아가기 위해 나는/ 애써 배운 모든 언어를/ 괴롭게 신음하며 잊어야 한다/ 얻을 때보다 훨씬 힘들게/ 모든 지식을 하나씩 잃어야 한다.” (「물오리」에서) 오늘날 인간 삶은 원래의 행복과 너무나 거리감이 있다고 그때 나는 느꼈습니다. 우리가 영위하는 모든 행위는 -마치 단어를 외우는 것처럼- 더 잘살아보려는 수단일 뿐인가? 프로이트의 말을 빌면 “현실원칙”만 강조되고, “쾌락원칙”이 없는 삶이 과연 진정한가? 눈 뜨고 있다고 해서 우리가 모조리 자유로운 인간인가? 등의 질문에 나는 시달렸습니다.

 

친애하는 K, 마지막으로 소개하고 싶은 책으로서 나는 윤노빈 (尹老彬)의 『신생철학』을 들고 싶습니다. 이 책은 서양 사상의 시각적 전투적, 종속적인 성향을 논리적으로 비판하며, 그 대안으로서 동학의 세계 사상적 의미를 지적하는 문헌입니다. 언젠가 저자가 “성서는 칸트의 『순수이성 비판』의 열 배되는 가치를 지닌다.”고 말한 기억이 납니다. 아닌 게 아니라 이 책은 성서의 많은 글들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부산대 박준건 교수도 이 책을 자주 언급하곤 합니다.

 

친애하는 K, 당신께서 좋은 책을 읽었다면, 나에게 권하기 바랍니다. 나는 아직도 배우는 사람이기를 원하므로, 무엇이든지 받아들이려 합니다. 무릇 책이란 독자의 견해들을 변화시키고, 동시에 세계를 변혁시키는 것이지요. 아무리 현대가 다매체 시대라고 하더라도, 이는 거짓말이 아닙니다. 80년대에 간행된 좋은 책이 있다면, 나에게 소개해 주세요. 이 시기에 나는 한반도를 떠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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