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Bloch 흔적들

블로흐: 이별의 모티프 (2)

필자 (匹子) 2020. 9. 8. 18:39

처녀는 자작나무 옆으로 뻗어있는 좁은 들판 길로 향하려고 등을 돌렸다. 이 순간 처녀에게서 어떤 기이한 놀라움 그리고 우아함이 느껴졌다. 그래서 화가는 처녀의 곁으로 다가가서, 말을 걸었다. “하인리히가 당신의 귀중한 보물이라도 되는가요? 당신을 기다리게 하는 것도 그 때문인가요?” 처녀는 순간적으로 탄식하면서 절망적으로 말을 이었다. “어쩌면 그는 내게로 도저히 올 수 없을지 몰라요. 병들었는지, 아니면 사망했을지도. 난 너무 불행해요, 아저씨. 혹시 비숍스로다의 길을 따라 오셨나요? 도중에 그에 관한 이야기를 듣지 못했지요? 그의 이름은 하인리히 볼구트라고 합니다. 엉겁결에 들은 말인데, 읍장의 아들이라고 했어요. 어느새 낮이 많이 짧아졌네요. 오늘은 더 이상 그와 재회할 수 없을 것 같네요.”

 

화가는 어떻게 그미를 위로해주어야 좋을지 몰랐다. “물론 나는 며칠 전에 비숍스로다라는 마을을 지나쳤어요. 그런데 그곳의 읍장은 전혀 다른 이름을 지니고 있었어요. 하지야 나는 이방인이므로, 그곳의 마을 사람들을 모조리 알지 못합니다. 나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방랑하는 사람입니다.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면서 아름다운 가을의 풍경을 즐기지요.”

 

처녀는 손가락으로 마을을 가리켰다. 그곳으로부터 분명하고도 뚜렷한 종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종소리는 마치 사람들을 다른 곳으로 이끄는 듯이 신경이 거슬리는 음으로 공허하게 울려 퍼졌다. 두 사람은 언덕으로 올라가서 마을의 풍경을 응시했다. 오전 무렵임에도 불구하고 언덕과 계곡에는 어떤 잿빛 안개가 마치 마법처럼 서서히 내려앉는 것 같았다. “우리의 교회의 종소리는 맑고 청량하지 않아요.” 하고 처녀는 말했다.

 

마을 사람들은 오랫동안 새로운 종을 만들려고 금속을 주조했답니다, 시간이 별로 없었어요, 우리 마을에는 종을 주조할 줄 아는 전문가가 없거든요. 그런데 당신이 화가라고 하시니, 마을의 촌장인 내 아버지에게 모셔가야겠어요. 참, 내 이름은 게르트루트입니다. 마을의 이름은 게르멜스하우젠이라고 해요. 어쩌면 당신은 성당에 머물면서 즐거운 마음으로 여러 가지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거예요. 초면에 실례의 말씀이지만 몹시 피곤하게 보이네요.”

 

두 사람은 마을에서 기이한 유령이 출몰한다는 끔찍한 소택지를 지나쳤다. 뒤이어 나타난 것은 반쯤 무너진 둥근 원의 장벽이었다. 둥근 원의 장벽을 지나치니 오리나무의 관목이 옹기종기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주위에는 낮은 첨탑을 지닌 교회 건물이 보였다. 마을의 건물들은 계곡 사이에 위치하고 있었다. 연기에 그을렸는지는 몰라도 가옥들은 푸른 숲 사이에서 검은 색의 흔적으로 드러나고 있었다. 게르트루트는 마을로 향하는 길에 들어선 뒤부터 자신의 집으로 향하는 길에서 거의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길가에는 오랜 전통 의복을 걸친 농부들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화가는 그들의 낯선 모습을 무척 신기한 듯이 바라보았다. 농부들은 두 사람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무표정한 표정으로 지나쳤다. 마을의 오래된 건물들은 거의 쓰러질 정도로 쇠락한 상태였다. 몇몇 창문은 기름칠한 종이로 대충 덮여 있었고, 합각 형의 처마와 밀짚으로 뒤덮인 지붕 위로 연기가 피어올랐다. 연기는 가벼운 습지의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마치 주위의 풍경을 가리면서 태양 빛으로 인하여 기이한 누런 갈색으로 솟아오르는 구름 같이 느껴졌다.

 

벌써 정오네요.” 하고 게르트루트는 말했다. “지금은 사람들을 만나 대화를 나눌 시점은 아닌 것 같군요. 아마도 오늘 저녁에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 같아요. 저쪽 건물이 우리가 살고 있는 집입니다. 이곳 사람들은 대체로 과묵한 편이지요. 말씀이 없더라도 당신을 불친절하게 대한다고 여기지 마세요.“ 대문을 두드리니, 촌장이 문을 열어주었다. 촌장은 낯선 젊은이에게 퉁명스럽게 인사를 건네면서, 집안으로 안내했다. 화가는 방안으로 들어가서 자리에 앉았다.

 

이미 간단한 일요일 오찬이 마련되어 있었다. 촌장의 집이라고 하지만, 집안 곳곳은 초라하기 이를 데 없었다. 방안 공기는 차가웠으며, 실내는 그다지 깨끗하지 못했다. 벽에는 간간이 석회가 떨어진 자국이 보였는데, 대충 손질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한 가운데의 식탁 위에는 정갈한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식탁에 앉아있던 사람들은 낯선 사람에게 목례했다. 음식의 맛은 그야말로 일품이었고 풍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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