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루소와 볼테르의 비국가주의의 문학 유토피아: 프랑스 혁명 이전의 시기에 출현한 비국가주의의 문학 유토피아 가운데 세인의 관심을 끌지 못한 두 작품이 있습니다. 그 하나는 장 작 루소의 서간체 소설, 『쥘리, 혹은 새로운 엘로이즈Julie ou la Nouvelle Héloïse』 (1761)이며, 다른 하나는 볼테르의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Candide Ou L'optimisme』(1759)』를 가리킵니다. 이 장에서는 루소와 볼테르의 두 작품에 반영된 유토피아의 특징을 약술한 다음에, 18세기에 출현한 시간 유토피아의 특성과 그 기능을 천착하려고 합니다.
루소는 서로 사랑하는 청춘남녀의 결합을 용인하지 않는 사회적 질곡을 신랄하게 비판하였습니다. 토머스 모어가 어떤 가능한 국가 체제를 설계함으로써, 사회적 갈등과 정체 상태를 간접적으로 비판했다면, 루소는 이 소설을 통하여 국가주의의 차원에 근거하는 사회 시스템이 개인적 측면에서 얼마나 파괴적이고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는가? 하는 사항을 분명하게 구명하였습니다. 국가주의의 사회 설계는 루소에 의하면 결국 개개인의 충동을 억압하게 하고, 처음부터 개개인의 행복을 망치게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루소의 혁명적 체제 비판입니다.
2. “정념은 신의 섭리의 도구이다.”: 루소는 불행한 남녀의 사랑을 다룸으로써, 부자유의 대가가 얼마나 끔찍한지 역으로 가르쳐줍니다. 마치 중세에 아벨라르가 엘로이즈와의 사랑을 실현시키지 못하고, 이별의 아픔을 겪었듯이, 18세기 스위스의 두 연인은 서로를 그리워하면서, 편지만 교환하다가 결국 불행을 맞이합니다. 사람들은 귀족의 딸, 쥘리 그리고 평민 출신의 가정교사, 생 프뢰St. Preux의 결혼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계층 차이의 결혼을 허용하지 않는 사회적 풍습에 있습니다. 루소는 작품을 통해서 다음과 같이 항의했습니다. 중세 사람들조차도 한 여인을 사랑하여 임신시킨 아벨라르가 거세당해야 했다는 사실을 끔찍하게 여겼는데, 18세기의 사회에서도 계층 차이를 이유로 두 연인의 결혼을 허용하지 않는가? 하는 게 저항의 항번이었습니다.
문제는 국가주의의 구상, 자체에 있습니다. 국가주의 유토피아의 시스템은 인간의 성적 욕구를 차단시키고 있다는 데에서 어떤 하자를 지닙니다. (Winter: 99). 다시 말해 국가를 우선시하고, 전체적 틀을 강조하는 유토피아는 마치 골격을 갖추고 있으나, 피 한 방울 없이 이루어진 인간의 신체처럼 더 이상의 생명력을 이어나갈 수 없다는 게 루소의 지론이었습니다. 루소는 인간의 삶이 어떤 인위적 제도에 의해서 부자유의 질곡에 갇혀 있는 것을 강렬하게 비난하면서, 쥘리와 생 프뢰의 내면에 도사린 정념을 강조하였습니다. “정념은 신의 섭리의 도구이다.” (서익원: 40).
3. 줄거리: 스위스의 버베Vevey에 살고 있는 아름다운 귀족 처녀 쥘리는 평민 출신의 가정교사 생 프뢰를 사랑합니다. 두 사람의 사랑은 계급 차이로 인하여 주위 사람들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합니다. 결국 쥘리는 임신을 선택하여, 부모님을 설득하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남자의 아기를 얻게 된 쥘리는 어처구니없는 낙상사고를 자신의 아기를 잃고 맙니다. 쥘리의 아버지는 이 사실을 접하고 격분하여 딸이 생 프뢰를 만나지 못하도록 조처합니다. 생 프뢰는 파리로 돌아갑니다. 쥘리와 생 프뢰는 편지를 톨해서 서로의 애틋한 마음을 주고받습니다.
어느 날 쥘리의 어머니는 우연한 기회에 생 프뢰의 편지를 발견하고, 자신의 딸이 여전히 가정교사에 대한 연정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딸의 배신은 하나의 충격으로 작용합니다. 쥘리의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쓰러져 사망합니다. 쥘리는 어머니의 죽음으로 슬픔에 잠깁니다. 자신이 어머니를 죽게 했다는 죄책감 때문에 쥘리는 다른 남자와 원치 않는 결혼을 거행합니다. 말하자면 그미는 언젠가 아버지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볼마르라는 귀족과 결혼식을 거행해야 했던 것입니다.
다른 한편 생 프뢰는 어느 장군과 범선을 타고 세계를 항해한 다음에 다시 스위스의 소도시를 찾아갑니다. 이때 그는 사랑하는 임이 다른 남자와 결혼하여 자식들을 키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생 프뢰는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을 느꼈으나, 모든 것을 감내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생 프뢰의 마음속에서 꺼지지 않은 사랑의 불씨는 주어진 사회 질서를 위협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쥘리의 아이 한 명이 물에 빠지는 사고가 발생합니다. 췰리는 물속으로 뛰어들이 아이를 구출해냅니다. 그렇지만 그미는 오랫동안 물속에서 허우적거려야 했습니다. 결국 쥘리는 저체온증으로 인한 열병으로 사망합니다. 바로 이 무렵 우체부는 쥘 리가 보낸 마지막 편지를 생 프뢰에게 전해줍니다.
4. 루소의 작은 공동체, 클라랑: 자연 속에서 순진무구한 사랑과 정념은 루소에 의하면 하나의 자생적인 공동체 속에서 실천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루소의 서간체 소설에 마치 야생의 삶처럼 보이는 과일 정원, “클라랑Clarens” 공동체가 묘사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클라랑 공동체 속에는 세 그룹이 제각기 맡은 바의 기능을 수행합니다. 첫 번째 그룹은 밭에서 포도를 가꾸는 사람 내지 일당 노동자들을 가리킵니다. 두 번째 그룹은 감독관을 지칭합니다. 감독관이라고 해서 모든 노동을 감시하는 역할만을 행하지는 않습니다. 이들은 생산과 소비를 관장할 뿐 아니라, 수공업을 담당합니다.
루소의 클라랑 공동체에서 감독관은 수공업자, 즉 “브리콜뢰르bricoleur”로서, 브리콜라주, 다시 말해서 주어진 도구를 바탕으로 모든 것을 짜 맞추는 일을 담당합니다. 세 번째 그룹은 공동체의 대표에 해당하는 볼마르의 가족 그리고 그의 친구들을 가리킵니다. 과일 정원, 클라랑 공동체는 일견 라블레의 텔렘 사원을 연상시키지만, 만인이 완전한 자유를 구가하지는 않습니다. 이곳의 구성원들은 개별적으로 생활할 수 있지만, 매일 일정 시간 노동해야 합니다. 이들은 공동체의 조화로움을 위해서 나름대로의 법적인 규정을 하나의 내규로 마련하고 있습니다. 가령 누가 누구와 함께 살고, 결혼식을 올리는지를 암묵적으로 정해져 있습니다. 아무도 결혼 제도에 얽매여 생활하지는 않습니다. 비록 엄격한 법체계라든가 처벌 규정은 마련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떤 은폐된 강요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5. 비국가주의의 특성을 지닌 클라랑 공동체: 빈터는 클라랑 공동체 내에서 행해지는 감독 작업, 결혼에 대한 규약 그리고 폐쇄성 등을 이유로 일말의 “국가주의의archistisch” 특성을 지닌다고 주장했지만 (Winter 96), 클라랑 공동체는 한마디로 비국가주의의 특성을 지닌 자생적 공동체입니다. 루소는 자신의 서간체 소설 속에서 클라랑 공동체를 묘파함으로써, 무작정 단체, 사회 그리고 국가의 전체주의의 특성에 이의를 제기하려고 하였습니다. 요약하건대 루소는 더 나은 사회적 삶을 위한 유토피아의 구상을 처음부터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이상적 공간을 떠올린다는 것 자체를 무의미하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루소가 살던 시기에는 지구상의 모든 미지의 공간이 발견된 이후였습니다. 그렇기에 특정한 공간을 하나의 유토피아로 설정하고 이를 미화시키는 작업은 루소의 눈에는 그야말로 하나의 환영으로 비쳤던 것입니다.
6. 루소의 페늘롱 비판: 실제로 루소는 페늘롱의 『텔레마코스의 모험』을 비판하면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한 공동의 설계를 고대의 구태의연한 사고로 경멸하였습니다. 가령 루소의 『에밀』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텔레마코스와 그의 은사는 손에 흙을 묻히지 않는 유한계급이라는 것입니다. (Rousseau 1995: 516). 루소는 땀 흘려 일하는 노동자의 노력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였습니다. 예컨대 그는 시민 주체Citoyes의 최소한의 권리로서의 최소한의 사유재산을 용인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가령 땅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첫째로 거주하기 위한 땅은 사적 소유물이 될 수 없다. 둘째로 인간은 삶에 필요한 만큼의 작은 땅만 소유해야 한다. 셋째로 인간은 노동에 의해서 그 땅 위에서 무언가 결실을 얻어내야 한다.” (Rousseau 1977: 81). 바로 이러한 노동을 위한 최소한의 사적 소유권이야 말로 루소에 의하면 시민주체의 정당한 권리라고 합니다.
7. 루소의 입장, 사회 계약이 관한 이론: 주지하다시피 루소는 이상적 사회의 유토피아의 틀을 내세우지 않고, 그 대신 사회 계약에 관한 이론을 제기했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은 견해를 피력하였습니다. 즉 시민 주체의 정당한 권리는 사회적으로 “일반 의지volonté générale”를 형성하는 토대로 작용합니다. 따라서 “공동의 의지volonté de tous”가 제대로 수행되려면, 전체의 삶을 도모하려는 일반 의지의 실천이야 말로 가장 중요한 방향이라고 합니다.
루소의 사회 계약 이론에 관해서는 많은 자료들이 있으므로, 여기서 재론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다만 우리가 망각해서는 안 될 사항은 루소가 강조한 인간중심적 자결권의 모델이며, 이러한 사상이야 말로 유럽 사회에서 프랑스 혁명의 싹으로 작용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우리는 루소의 삶과 사상에서 어떤 여성 차별에 관한 여러 가지의 흔적을 읽을 수 있습니다. 예컨대 루소의 시민주체의 개념에는 부분적으로 여성 비하의 요소가 은밀히 담겨 있습니다. 이는 그의 작품 『에밀』에서 등장인물, 소피의 우둔한 모습에서 그대로 반영되어 있습니다. (Saage 2006: 148), 그렇지만 루소는 인간의 열정, 최소한의 사유권을 용인하는 자연친화적 노동을 강조하였으며, 이러한 사항이 인간의 삶을 향상시켜준다고 믿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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