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유토피아

서로박: 카인호르스트의 비판적 유토피아

필자 (匹子) 2022. 6. 19. 11:18

 

2013년 드레스덴에서 기이한 데모가 열렸다. 누군가 36킬로의 털실로 탱크를 싸고 이를 전시했다. 독일은 1945년부터 지속적으로 해외에 레오파드 1이라는 전차를 판매하면서 돈을 벌었다. 유럽의 평화와 풍요로움은 무엇보다도 중동 지방에 무기를 판매함으로써 가능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유럽은 중동 지방의 전쟁과 살육에 모르쇠로 일관할 수 있는가? 브렉시트에 동의하는 영국인들은 이를 제대로 실감하지 못하고 있다.

 

아네테 카인호르스트는 1985년 『미국 현대 문학에 나타난 여성 유토피아』를 간행하였다. 이 연구서는 단순히 미국 문학의 연구라는 작품 내재적인 분석에 국한되지 않는다. 저자는 본 연구를 통해서 새로운 각도에서 도출해낼 수 있는 “비판적 유토피아”의 성립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다. 이를 고려한다면 카인호르스트의 문헌은 여성 유토피아에 관한 독일어권 최초의 본격적 문헌일 뿐 아니라, 20세기 중엽부터 나타난 환경, 여성 그리고 평화 운동과 접목될 수 있는 비판적 유토피아의 신선한 패러다임을 제시하고 있다.

 

카인호르스트에 의하면 지금까지의 여성의 역할은 남성들에 의해 기술된 유토피아에 거의 명시적으로 언급되지 않았다. 사람들은 전통적 가부장주의의 사회에서 행해지던 억압당하는 여성의 역할을 있는 그대로 기술했을 뿐이다. 이는 토머스 모어, 드니 디드로, 에드워드 벨러미 그리고 윌리엄 모리스의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현상이라고 한다. 여성은 지금까지 전해내려온 유토피아 구상에서 한 번도 행동하는 주체 내지 능동적으로 실천하는 인간으로서의 면모를 과감하게 드러내지 못했다. 물론 여성이 서술한 유토피아도 드물게 존재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경우 미래의 해방된 여성의 역할이 언제나 남성적 국가 구도의 구상을 방해하거나 이에 대한 걸림돌이 된다고 기술되었다. 20년대 초부터 서서히 여성의 지위가 조금씩 향상되기 시작했다. 1960년대에 유럽에서 페미니즘 운동이 활발히 진행되는 동안에 페미니스트들은 남녀평등을 위한 구체적인 제언을 남겼다. 이때 그들은 운동과 병행하여 유토피아의 사고의 필연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비록 남녀평등의 삶이 아직도 완전히 실현되지 않았지만, 여성들 역시 역사의 주체로서 미래를 구상하게 되었으며, 인간다운 세상이 여성의 삶을 고려하여 어떻게 설계될 수 있는가? 하고 숙고하게 된 것이다.

 

여성들은 스스로 성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미래에 관한 구상을 나름대로 행하고 있지만, 이를 실천하는 데 있어서 여러 가지의 제약과 부딪치고 있다. 그 이유는 세계는 –물론 옛날에 비해 많이 나아졌지만- 여전히 남성 중심으로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여성들에게 자신의 사상과 감정을 동시대인들에게 전할 수 있는 활로를 개척하는 데 어려움이 뒤따른다. 여성들은 사이언스 픽션과 같은 문학의 장르를 통해서 여성적 시각의 유토피아를 설계한 것도 이러한 어려움에 기인한다. 사이언스 픽션이라고 해서 무조건 현실과 무관한 장르라고 단언을 내릴 수는 없다. 어떤 가상적인 공간이기는 하지만, 사이언스 픽션을 통해서 작가가 갈구하는 무엇을 은근히 반영할 수 있다. 이에 대한 좋은 범례로서 우리는 웰스의 문학을 예로 들 수 있다.

 

여성 유토피아가 만개한 시점은 아무래도 20세기 중엽부터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시기에는 더 이상의 거대한 세계대전의 가능성이 현저하게 낮아졌지만, 핵문제 및 생태계의 문제가 중요한 이슈로 대두되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20세기 중엽부터 발전된 것은 이중적 의미를 지닌 자연과학이었다. 이를테면 사이버네틱스, 전자공학, 유전공학, 의학 등의 발전은 인류에게 어떤 야누스의 이중적 감정, 즉 희망 뿐 아니라, 두려움을 가져다주었다. 이와 병행하여 제 3세계의 착취가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잘 사는 자와 못사는 자 사이의 대립은 어느새 자본주의의 신경제정책으로 인하여 잘사는 나라와 못사는 나라의 대립으로 확장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세계 질서의 정황 속에서는 핵전쟁은 일어날 수 없지만, 국가와 국가 사이의 국지전은 빈번하게 발생하게 된다. 

 

자본주의 신경제정책을 통한 자연의 황폐화, 남성 중심적 국가 이기주의, 이에 기인하는 크고 작은 국지전 등은 환경, 평화 그리고 여성 운동의 단초로 작용하였다. 여성 운동이 더 이상 성 차이로 인한 갈등 문제가 아니라, 얼마든지 환경 평화 운동과 접목될 수 있는 까닭은 1950년대 이후의 여성 운동이 남성 중심적 계급 사회, 국가 이기주의로 인한 국지전 그리고 심각한 수준에 이르게 된 생태계의 파괴 등을 해결하기 위한 가능성을 모색하기 때문이다. 이를 고려할 때 여성 운동의 결과로 나타난 성의 혁명과 이와 관련되는 공동체의 삶 그리고 노동 조건 등은 새로운 의미의 유토피아를 유추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인간 삶의 모든 영역은 카인호르스트의 견해에 의하면 생태적 심령학적 신념의 토대에서 전체적 관련성을 지닌다.

 

환경, 평화 그리고 여성 등의 운동은 현대의 유토피아 연구에 있어서도 기이한 경우에 해당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지금까지의 정치적 유토피아 내지 사회 유토피아의 설계와는 부분적으로 다른 방향을 모색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유토피아는 두 가지 가능성 이를테면 국가주의의 유토피아와 비국가주의의 유토피아로 구분된다. 전자는 거대한 국가 중심의 공동체에 관한 구상이라면, 후자는 소규모의 아나키즘의 구상을 담은 공동체를 가리킨다. 이러한 두 가지 유형의 유토피아는 20년대 중엽까지 제각기 병행하여 지금까지의 역사에서 출현하였다. 그러나 환경, 평화 그리고 여성 운동의 유토피아는 처음부터 소규모의 아나키즘의 공동체 유토피아를 지향한다, 왜냐하면 거대한 구도의 국가주의의 유토피아는 당하고 살아가는 사람들 (무산계급, 여성 그리고 하층민)의 자치 자활 그리고 자생이라는 삶의 요구를 처음부터 충족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상기한 사항과 관련하여 카인호르스트는 자신이 염두에 두는 유토피아의 특성을 “비판적 유토피아”로 규정하고 있다. 비판적 유토피아는 카인호르스트에 의하면 새로운 기술과 인간의 능력을 위한 개방성을 고려한 사이언스 픽션의 형식으로 출현하는, 새로운 삶에 관한 하나의 이상적 모델일 수 있다. 이러한 모델은 과거의 전통적 유토피아의 개혁안을 처음부터 배격하는 게 아니라, 부분적으로 계승하고 있다. 토마스 뮌처로부터 푸리에와 오언에 이르기까지 세계를 혁신시키려는 의향은 존속될 수 있지만, 이들의 사회 유토피아에서 발견되는 남성 중심적인 사회 시스템은 환경, 생태 평화 운동에서 결코 채택될 수 없다는 것이다. 

 

요약하건대 카인호르스트는 환경, 여성 그리고 평화 운동의 유토피아를 하나의 비판적 유토피아로 규정하고, 이를 선취하기 위한 방법론으로서 서이언스 픽션을 예로 들고 있다. 왜냐하면 사이언스 픽션의 문학 작품 속에는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이 저항의 가능성 혹은 변화의 가능성과 함께 가상적으로 다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사이언스 픽션은 현재 삶의 정반대되는 어떤 상을 양자택일의 역사적 가능성과 함께 제시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한 한 비판적 유토피아는 수많은 전통적 유토피아에서 드러나는 시공의 무제한성을 뛰어넘는다는 것이다. (Keinhorst 1985, 10 – 17).

 

 

카인호르스트의 비판적 유토피아는 다음과 같은 10가지의 특성을 표방한다. 1. 페미니즘의 유토피아는 현재 지구상에 온존하고 있는 남성 중심주의의 제반 질서를 비판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가부장주의의 원칙은 차제에는 반드시 파기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계층 차이를 당연시 여기게 하고, 남성적 이권을 강화시키기 때문이다. 2. 중요한 것은 인간의 발전 능력과 교육 능력은 무제한적이라는 사실이다. 모든 남자와 여자들은 교육의 기회를 균등하게 얻어야 한다. 개개인의 능력 차이는 어쩔 수 없는 것이지만, 오로지 여성이라는 이유에서 능력의 결과와 업적이 무시되는 것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된다.

 

3. 새로운 사회는 계층적이어서는 안 되고, 권력을 분산시켜야 하며 무정부주의적으로 조직화되어야 한다. 지방분권적이며 만인의 평등을 지향하는 공동체야 말로 마르크스가 숙고한 “계급 없는 사회”일 수 있다. 지방분권적이고 평등한 사회의 토대는 무엇보다도 자급자족하는 시골의 공동체이다. 4. 이러한 공동체는 더 이상 성의 역할을 구분하지 않는다. 이러한 공동체는 때로는 모계의 권한으로 조직화될 수도 있다. 모든 여성적인 것은 합리적인 억압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 때에 따라서는 영성적 차원으로 설계될 수 있는데, 이 경우 모권의 신을 숭배하는 단체일 수 있다. 그럼에도 중요한 것은 인간의 사회적 결속이지, 동일한 성의 결속이어서는 곤란하다. 왜냐하면 페미니즘은 성의 대결로 치달아서는 곤란하기 때문이다.

 

5. 지방분권적 평등 공동체는 생태계를 고려한 하나의 단체이어야 한다. 사람들은 공동체의 삶을 통하여 자연과 조화를 이루어야 하며, 더 이상 자연을 지배하려는 망상을 품어서는 안 된다. 자본주의 체제의 경우처럼 잉여가치를 위한 생산품, 필요로 하지 않는 상품은 더 이상 생산되지 말아야 한다. 6. 과학 기술은 무조건 배격의 대상은 아니다. 잠재적으로 생명을 위협하는 기술은 반드시 차단되어야 한다. 인간의 기술은 마력적인 기술, 이를테면 텔레파시 혹은 이전 기술 등으로 보완되어야 한다.

 

7. 공동체 내에서는 다양한 문화적 삶이 존재한다. 인종, 나이 그리고 종교의 차이로 인한 차별과 증오 등은 용납될 수 없다. 8. 어떠한 경우에도 간접 민주주의는 허용되지 않는다. 오로지 당사자만이 직접적으로 관련되는 모든 문제의 결정을 내릴 수 있다. 직접적으로 실천하는 풀뿌리 정치의 모델을 통해서 소수의 견해는 철저히 보호될 수 있다. 모든 사람들은 자유로운 주권을 행사할 수 있다. 9. 종족 번식의 측면은 기술의 발전으로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인공수정과 같은 실험적 출산은 20세기 초에는 비난의 대상이 되었지만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를 생각해 보라), 이제는 인구 감소의 정책 내지 여성의 인권 보호를 위해서 얼마든지 적극적으로 활용될 수 있다.

 

10. 일부일처제의 결혼 제도는 사라지고, 아이들은 여성공동체 내에서 공동으로 교육받을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공동체는 무조건 일부일처제의 결혼 제도를 배격하지는 않는다. 중요한 것은 사랑의 삶이 하나의 철칙으로서의 일부일처제를 통해서 완전하게 실현될 수 없음을 분명히 인식하는 일이다. 새로운 여성 유토피아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개방된 사회를 설계할 수 있다. 주어진 현재는 변화 가능하며, 미래는 하나의 상으로 확정될 수는 없다.

 

참고 문헌

- Heyer, Andreas: Der Stand der aktuellen deutschen Utopieforschung, Bd. 2, Ausgewählte Forschungsfelder und die Analyse der postmodernen Utopieproduktion, Hamburg 2008.

- Keinhorst, Annette: Utopien von Frauen in der zeitgenössischen Literatur der USA, Frankfurt a. M. 1985.

- Annette Keinhorst: Das war alles sehr, sehr aufregend. 25 Jahre autonome Frauenbewegung in Saarbrücken. Gabriele Jakobi Verlag, Saarbrücken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