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유토피아

서로박: 뮌처의 천년왕국설 (2)

필자 (匹子) 2022. 1. 21. 16:29

(앞에서 계속됩니다.)

 

6. 계시에 대한 뮌처의 믿음: 뮌처의 혁명적 자세의 배후에는 어떤 계시에 대한 믿음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뮌처는 선택받은 자들의 공동체를 신뢰하였습니다. 이러한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내적 언어를 신뢰하고 이를 믿음으로써 지속적으로 발전되리라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까닭에 그는 전통적 권위를 내세우는 가톨릭 신앙에 대해 격렬하게 저항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전통적 교회와 성당은 계시가 이미 오래 전에 종결되었다고 믿으면서 권력과 결탁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신의 정신은 뮌처의 견해에 의하면 오늘날 신앙인 개개인에게 직접 전달되고 있다고 합니다. 내적인 신앙의 불빛은 교회의 문헌학적인 권위에 가로막혀 마냥 은폐되고 차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신의 계시는 성서를 연구하는 학자라든가 신학자들에게가 아니라 오히려 평신도에게 더욱더 분명하게 전달될 수 있다고 합니다. “신의 말씀은 심장, 두뇌, 피부, 머리카락, 뼈, 골수, 즙액 그리고 힘과 에너지를 관통하고 있는데, 우리의 어리석은, 마치 고환주머니 같은 박사들과는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잘 알려지게 될 것입니다.” (Müntzer: 47). 여기서 우리는 상류층 뿐 아니라, 체제옹호적인 신학자들에 대한 뮌처의 노여움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7. 사회의 죄악은 고위 수사 그리고 귀족과 제후들에 의해서 나타난 것이다.: 뮌처는 다른 고전적 유토피아 사상가들과 마찬가지로 동시대인들이 끔찍한 죄악의 상태 속에 빠지게 된 근본적인 이유를 기존하는 사회 구조에서 찾고 있습니다. 사회의 근본적 죄악은 군주에 의해서 비롯된다고 뮌처는 확신합니다. 그렇기에 군주들은 뮌처의 견해에 의하면 “도둑, 강도 그리고 고리대금의 악덕주인”과 다를 바 없다고 합니다.

 

나아가 뮌처는 교회 사람들이 행하는 짓거리를 신랄하게 비난합니다. 교황은 뮌처에 의하면 “로마의 요강 덩어리”이며 수사와 주교들은 “배운 것을 자랑하는 어리석은 당나귀들”이라고 합니다. 뮌처는 사회의 고위 계층에 대한 비판에 있어서는 고전적 유토피아 사상가들과 입장을 같이 합니다. 고위 계층의 비리와 온갖 술수를 제거하면, 공화국과 유사한 신의 국가가 얼마든지 건립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8. 신의 의지와 토마스 뮌처: 혹자는 뮌처가 바람직한 사회의 상이 구체적으로 어떠해야 하는가? 하는 물음에 관해서는 단 한 번도 명확하게 대답한 적은 없다고 비판합니다. (Schölderle: 64) 물론 뮌처는 바람직한 사회상을 설계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노력하지 않아도 신은 이미 구원을 위한 어떤 계획을 마련하고 계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세계의 거대한 파국이 도래하기 때문에 인위적인 조처를 취하지 않은 묵시록의 신봉자, 예수 그리스도의 입장을 그대로 고수한 것입니다.

 

뮌처는 무력 투쟁을 감행하는 순간에도 동지들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했습니다. 즉 농부들의 혁명과 개혁을 위한 운동은 오로지 정치적 사회적 목표를 위해서 이행되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뮌처는 새로운 변화의 시대가 이미 종말론적으로 예정되어 있으며, 차제에 신의 예정된 의지에 의해서 실현되리라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뮌처가 처음부터 끝까지 신의 예정조화설을 맹신하고 있었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뮌처는 신의 과업과 인간의 과업을 분명히 구분할 줄 알았습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사회정치적인 측면의 일밖에 없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뮌처가 자신의 과업이 신의 뜻에 의해서 좌지우지된다고 믿지는 않았습니다. 뮌처는 신의 노예로서 신을 믿지 않는 사악한 인간과 싸우려고 했습니다. 마지막 전투에서 폭동을 일으킨 6000명의 농부들은 대포 공격으로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습니다.

 

9. 뮌처의 영향: 뮌처가 기대했던 새로운 질서는 유토피아의 모델에 의해서 구성적으로 축조된 것이 아니라, 신앙과 믿음에 근거한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혁명의 시도가 아무런 계획과 방법을 전제로 하지 않은 혁명과 개혁의 프로그램이라고 통째로 폄하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뮌처가 주도한 농민혁명은 어떤 구원의 예언, 종말론적인 기대감, 폭력적인 선교의 의지 등의 동인으로 출현한 거사였기 때문입니다. 물론 뮌처는 평등 사회에 관해서 분명하고 명징한 모델을 미리 설계하지는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인간의 이성에 의해서 축조될 수 있는 유토피아의 모델을 설계할 겨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뮌처에게 당장 시급한 것은 기존의 사악한 무엇을 척결하는 행위였지, 결코 한가한 자세로 편안하게 앉은 채, 주어진 비참한 사회상과 반대되는 상상의 찬란한 사회 유토피아를 설계할 수 없었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최소한 죄악을 척결하려는 뮌처의 의향은 공명정대한 신에 대한 굳은 믿음에 의해서 출현하였으며, 농부들의 혁명으로 때 이르게 실천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뮌처의 사상과 실천은 나중에 “전근대 사회에서 가난에 억눌린 민중들의 저항 운동과 혁명운동을 촉진하는” 강령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황대현: 101).

 

참고 문헌

 

- 블로흐, 에른스트: 마르크스, 뮌처, 혹은 악마의 궁둥이, 박설호 편역, 울력 2012.

- 황대현: 혁명의 신학자, 토마스 뮌처, 실린 곳: 박상철 외, 꿈은 소멸하지 않는다, 한겨레 출판 2007, 75 – 102.

- Bloch, Ernst: Thomas Münzer als Theologe der Revolution, München 1921.

- Mannheim, Karl: Ideologie und Utopie, Frankfurt a. M. 1996.

- Müntzer, Thomas: Schriften und Briefe; Frankfurt a. M. 19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