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유토피아

에코토피아 십계명

필자 (匹子) 2023. 1. 13. 11:40

얀 홀림의 학위 논문 『앵글로아메리칸 에코토피아. 어떤 녹색 세계에 관한 문학적 설계 Die angloamerikanischen Ökotopie. Literarische Entwürfe einer grünen Welt』는 1998년에 간행되었다. 여기서는 전통적 유토피아의 연구 경향이 생태학의 관점과 접목되고 있다. 연구 대상은 다음과 같다. 1. 윌리엄 모리스의 『유토피아 뉴스』, 2. 로버트 블래취포드 Robert Blatchford의 『마술의 상점 The Sorcery Shop』, 3. 샬로트 퍼킨스 길먼의 『여자만의 나라 Herland』, 4. 오스틴 타판 라이트의 『아이슬란드 Islandia』, 5. 올더스 헉슬리의 『섬 Eiland』, 6. 로버트 그레이브스, 어니스트 칼렌바크 그리고 마지 피어시의 작품들. 많은 작품들이 다루어지기 때문에, 일견 방만하게 보이지만, 이론적 논의에 있어서 홀림의 논지는 예리하고 명징하다.

 

유토피아는 흘림의 경우 르네상스의 시대에 출현한 것이므로, 토마스 모어의 문학적 장르의 전형으로 이해된다. 유토피아의 개념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홀림은 두 가지 기본적 요소를 지적한다. 그 하나는 사회 비판적인 요소이며, 다른 하나는 유토피아의 지평을 가리킨다. 특히 유토피아의 실현의 문제 그리고 이와 관련되는 에른스트 블로흐 그리고 카를 포퍼의 견해를 염두에 두면서, 홀림은 유토피아 Utopie 그리고 유토피아적인 무엇 das Utopische을 구분시킨다. 여기서 말하는 유토피아는 문학 유토피아와 관련되고, 유토피아적인 무엇은 정치적 유토피아 사상과 관련된다. 그런데 홀림은 이 두 가지 특성을 일차적으로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문학 유토피아의 서술자는 사회 설계의 어떤 가상적 특성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일시적 특성을 스스로 의식하고 있다,

 

이에 비하면 정치적 유토피아의 사고를 추구하는 자는 어떤 정치적 메시아주의를 의식하면서 마치 계시의 기록에서 나타나는, 결코 거짓될 수 없는 정치적 전복을 획책한다고 한다. 이로써 유토피아적인 무엇, 다시 말해서 정치적 유토피아의 사고는 종교의 의향을 세속적으로 대치시킨 것으로 확정된다고 한다. 물론 우리는 문학 유토피아와 정치적 유토피아의 사고 사이의 이러한 구분을 개별 작품에 모조리 적용시킬 수는 없다. 그렇지만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와 마르크스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 사이에는 홀림의 견해에 의하면 근본적으로 분명한 차이가 도사리고 있다고 한다. 요약하건대 문학 유토피아의 저자는 우선 지배와 무관한 논의를 개진하려고 하는 반면에, 정치적 유토피아주의자는 자신의 유토피아 문헌을 통해서 정치적 권력을 얻으려고 의도하며 어떤 다른 세상에 관한 상을 실현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상기한 입장에 근거하여 홀림은 생태주의 유토피아를 새롭게 규정하려고 한다. 20세기 후반부에 이르러 활발하게 수용된 유토피아의 경향은 한마디로 에코페미니즘의 문제점으로 귀결된다. 왜냐하면 생태주의 운동과 페미니즘 운동은 어떤 영역에서 서로 겹치고 있기 때문이다. 기실 생태주의와 페미니즘의 운동은 20세기 후반까지 이어진 착취와 억압의 메커니즘에 대해 공히 적대적 태도를 취하고 있다. 따라서 생태주의 유토피아를 분석하는 일은 홀림에 의하면 처음부터 페미니즘의 근본적 문제와 연결될 수밖에 없다고 한다.

 

이러한 언급을 통해서 홀림은 생태주의와 여성 운동을 동등한 연구 대상으로 병치시키고 있다. 사실 생태주의와 여성 운동은 지난 수 십 년 동안 제기된 사회적 문제를 포괄할 뿐 아니라. 디스토피아의 논의와 아나키즘의 사고와 맥락을 함께 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홀림은 에코토피아는 문학 유토피아의 특징적인 형태로 이해한다.

 

에코토피아에 관한 십계명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1. 일련의 에코토피아는 이미 제기된 생태학적 논의 사항을 포괄하고 있으며, 이를 유토피아의 공간 속으로 이전시키고 있다. 2. 에코토피아에 관한 새로운 설계는 모더니즘 내지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른바 대안 없는 절망적 사고를 극복하려는 시도이다. 특히 포스트모더니즘의 체념과 수수방관주의는 더 이상 인간의 찬란한 갈망을 포괄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배격되어야 한다. 3. 에코토피아의 원조는 윌리엄 모리스의 『유토피아 뉴스』로 거슬러 올라간다. 왜냐하면 모리스의 작품은 시골의 단아한 아름다움과 자연의 소박한 이상에 관한 상을 선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4. 에코토피아의 목표는 인간이 자연 속에서 어떠한 역할을 행하는지를 새롭게 규정하려는 데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과 자연의 이원론적으로 구분되는 사고를 극복하는 일이다. 인간이 주체이고 자연이 객체라는 사고는 일방통행식의 사고로 비판되어야 한다. 5. 고전적 유토피아에서 인간은 자연을 정복하거나 자신의 필요성에 따라 자연에 순응하는 게 고작이었다. 그러나 에코토피아의 경우 인간은 자연과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6. 지금까지의 고전적 유토피아에서는 사랑이 중요한 가치를 지니지 않았다. 이에 반해 에코토피아의 경우 모든 생명체에 대한 사랑이야 말로 생태주의 세계관의 핵심적 관점으로 이해된다. 7. 아르카디아 내지 목가적인 문학 작품들은 산업 사회를 의식하지 않는다. 이에 반해 생태학의 유토피아는 직접적으로 산업공해와 맞서 싸우고, 산업이 끼치는 환경 파괴의 결과를 퍼뜨리기 위해서 구체적이고 지속 가능한 전략을 세운다. 8. 생태주의의 포괄적이자 핵심적인 관점은 문학적 개연성을 지속적으로 만들어나가는 일이다. 여기서 말하는 개연성이란 구체적으로 실천될 수 있는 객관적 가능성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9. 에코토피아는 근본적으로 역동적 성격을 표방한다. 이로써 가상적으로 묘사되는 생태 공동체에서 변화와 발전은 종결되지 않을 것이다. 생태 공동체는 일시적으로 영위되겠지만, 인간에 의해 만들어지는 상태일 것이다. 10. 에코토피아의 구체적 실천은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을 수밖에 없다. 인간이 살아가는 모든 곳에서는 으레 갈등이 자리하기 마련이다. 어떤 다른 사회를 설계하는 일에서 빈틈이 자리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하자는 유토피아의 토론에 의해서 계속 드러나게 될 것이다.

 

상기한 사항을 전제로 홀림은 산업 구조와 반대되는 사회적 구조를 포괄적으로 설계하는 일 그리고 문학적 개연성을 확립시키는 작업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서 그는 에코토피아를 규정하는 작업을 위해서 다음과 같은 문학적 특성과 비교 분석하고 있다. 미리 말하자면 홀림은 다음의 특성에 대해 에코토피아의 이론적 근거로서 어떤 변증법적이며 찬반 양립의 관계를 내세운다.

 

1. 천국에 관한 사고. 에코토피아는 결코 이미 알고 있는 이전 상태로 되돌라가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2. 황금의 시대. 헤시오도스 이래로 이어진 고대의 사고는 신시대에 생동하였으며, 다른 장으로 이전된 바 있다. 이를테면 홀림은 엘도라도 그리고 디드로의 타히티 유토피아를 언급한다. 여기서 공통되는 것은 조화로움과 평화로운 어떤 땅을 찾아서 여기서 바람직한 인간 삶의 토대를 마련하는 일이다. 3. 아르카디아. 작가의 삶의 영역에서 맹수의 출현과 같은 어떠한 위험이 도사리지 않을 경우 아르카디아의 실현은 가능하다. 4. 놀고먹는 나라. 이곳에서 사람들은 먹고 마시며 즐기는 자유로운 사랑을 누리며 살아간다. 삶의 즐김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과학기술의 발전 때문이다.

 

5. 농업 유토피아. 홀림은 농업 유토피아의 원조를 윈스탠리 그리고 장 작 루소에게서 발견한다. 왜냐면 초기 자본주의 시대의 농업 유토피아의 경우 사회적 참담함이 현저하게 출현하기 때문이다. 6. 로빈슨 크루소 소설. 물론 에코토피아의 경우 로빈슨의 이야기는 에코토피아의 구조 설정과는 커다란 관련성을 드러내지는 못한다. 왜냐면 로빈슨 크루소는 문명화된 개인으로서 살아남기 위해서 문명 이전의 자연과 싸우고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사항만 지적하도록 하자. 홀림이 윌리엄 모리스의 『유토피아 뉴스』를 에코토피아의 전형으로 규정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모리스가 예견한 에코토피아의 계획은 1970년대에 이르러 완전히 실현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대표적인 문학 작품으로서 그는 어니스트 칼렌바크의 『에코토피아』 그리고 마지 피어시의 『시간의 경계에 선 여자』를 예로 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