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근대영문헌

서로박: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 (3)

필자 (匹子) 2022. 3. 24. 11:33

(앞에서 계속됩니다.)

 

16. 지적 능력과 정서적 감정을 지닌 사이보그의 전신: 셸리는 인조인간을 작품의 주인공으로 등장시키고 그로 하여금 모든 것을 서술하도록 조처하고 있습니다. 이로써 창조된 인간은 인간으로 거듭난 이후에 겪었던 자신의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독자에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그는 인간의 영혼을 지닌 뒤에 상당히 많은 지적 교육을 습득합니다. 이를테면 인공적으로 창조된 인간은 플루타르코스, 괴테, 밀턴 등의 작품을 읽는 등, 마치 비교적 살 살아가는 유럽의 중류층 가정의 젊은이들처럼 교양을 쌓아갑니다.

 

이로써 그는 언어상으로도 자신의 세밀한 감정을 분명하게 표현할 줄 알게 됩니다. 그가 조우하게 된 선장, 월튼은 인조인간을 창조한 프랑켄스타인을 놀라운 능력을 지닌 과학자라는 등 칭찬을 아끼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독자는 이 대목에서 프랑켄스타인을 달리 평가하게 됩니다. 프랑켄스타인은 더 이상 인조인간에 대해 어떠한 책임감도 느끼지 않으며, 사람들에게 인조인간이 자신의 창조물이라고 알리지도 않습니다. 이로 인하여 비극은 멈추지 않습니다. 인조인간의 살인 행위로 인하여, 결국 아무 죄 없는 처녀, 저스틴은 빌헬름의 죽음으로 슬퍼하다가 끝내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맙니다.

 

17. 인조인간과 프랑켄스타인의 골육분쟁: 인조인간은 빅터에게 한 가지 사항을 간청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자신과 닮은 여자를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내키지 않지만, 차마 부탁을 거절할 수 없어서 빅터는 그렇게 하겠노라고 약속합니다. 뒤이어 빅터는 친구와 함께 영국의 작은 섬으로 들어가서 연구에 몰두합니다. 그러나 아무런 거리낌 없이 연구에 몰두할 수 없다는 상념이 그의 뇌리를 스칩니다. 만약 두 사람의 사랑으로 인조인간의 수가 자꾸 늘어나게 되면, 사태가 걷잡을 수 없게 될 것 같았습니다. 결국 빅터는 약속의 이행이 불가능하다고 확신합니다. 거의 완성된 두 번째 인조인간의 모델은 파괴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두 번째 인조인간 모델은 연구 도중에 파괴되고 맙니다.

 

인조인간은 몰래 실험실에 잠입하여 두 번째 인조인간이 파괴되는 모습을 목격합니다. 광분한 인조인간은 주인공의 친구인 헨리를 목 졸라 죽이고, 빅터를 살인범으로 몰아가려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의도는 실패로 돌아갑니다. 빅터가 어느새 제네바로 돌아갔기 때문입니다. 빅터는 더 이상 인조인간 연구에 신명을 느끼지 못하며, 엘리자베트와 결혼식을 거행합니다. 인조인간은 자신의 요구를 받아들이기는커녕 개인의 사랑의 삶에 몰두하는 빅터 프랑켄슈타인을 저주합니다. 결혼식이 치러지던 그날 밤에 인조인간은 엘리자베트를 납치하여 살해해버립니다.

 

며칠 후 빅터 프랑켄슈타인의 아버지 역시 자식의 죽음과 불행한 사건 등으로 인하여 유명을 달리합니다. 빅터는 동생, 친구, 연인 그리고 아버지의 죽음까지 겪어야 합니다. 반드시 자신의 손으로 인조인간을 죽이리라고 결심합니다. 이로 인하여 자신의 요구를 들어달라는 인조인간 그리고 자신이 만들어낸 괴물을 파괴하려는 과학자 사이에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시작됩니다. 인조인간은 프랑켄스타인이 지닌 모든 실험 도구들을 박살내며, 지구 끝이라고 그를 찾으려고 노력합니다. 결국 싸움은 인간이 없는 북극에 이르러서야 끝이 납니다. 빅터와 인조인간은 차례대로 목숨을 잃게 된 것이었습니다.

 

18. 다양한 관점에서 서술된 현실: 작품은 세 가지 다양한 관점을 도입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의 변화는 소실의 주제를 심도 있게 그리고 객관적으로 이해하게 하는 수단으로 작용합니다. 첫 번째 관점은 일인칭 화자, 프랑켄스타인에 의한 것입니다. 대부분의 이야기는 프랑켄스타인의 입장에서 서술되고 있습니다. 두 번째 관점은 인조인간의 독백입니다. 작품의 중간에 화자가 뒤바뀌게 되는데, 인조인간이 독백의 형식으로 자신의 과거를 독자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독자는 인조인간이 다른 사람과 똑같은 사고 능력과 감정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이로써 제기되는 것은 다름 아니라 과학자 한 사람의 실험이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세 번째 관점은 월튼 선장의 편지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선장은 인조인간을 잡으려는 프랑켄스타인의 탐험 선을 몰다가, 끝내 목숨을 잃는데, 그가 어떻게 인조인간을 만났는지, 그리고 죽음 직전의 자신의 상황에 관한 이야기를 여동생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19. 농부의 세 아이들, 펠릭스, 아가타, 사피, 희망의 출발점: 지엽적인 이야기인지 모르지만, 세 명의 아이들에 관해서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 아이들은 작가가 염두에 둔 삶의 이상을 구현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드 라시에게는 펠릭스와 사피라는 두 아들이 있으며, 아가타라는 딸이 있습니다.펠릭스 Felix는 라틴어로 “행복”을 가리키고, 아가타 Agatha는 그리스어로 “선 (善)”을 지칭합니다. 사피 Safie는 아라비아어로 “순수함”을 일컫습니다. 이와 비슷한 이름인 소피아 Sophia는 그리스어로 “현명함”을 뜻하지요.

 

이들은 인조인간을 만나기 전에는 그야말로 천사의 모든 특성을 모조리 지니고 있지요. “행복”, “선” 그리고 “순결함/ 현명함”의 특징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러한 이름들은 그 자체 인종주의와는 거의 무관하다는 점에서 우리는 인종에 차단되지 않은 인간적 품성에 대한 메리 셸리의 견해를 읽을 수 있습니다. 마지막 대목에 이르러 펠릭스는 사피와 함께 이슬람 문화가 지배하는 터키로 돌아갑니다. 당시에 영국의 시인 바이런이 터키에 대항하는 그리스 독립 전쟁에 참가한 사실을 고려한다면, 우리는 이 대목에서 인종주의를 극복한 작가의 평화적 자세를 읽을 수 있습니다. 그밖에 우리가 망각해서는 안 될 사항은 아가타가 사회적 한계를 극복하고 사랑을 실현하려고 노력한다는 사실입니다.

 

20. 사이언스 픽션, 교육소설, 발전소설: 셸리의 환상적인 소설은 괴물의 인조인간을 만들어내는 어느 병적인 자연과학자의 이야기를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작품은 교육 소설 내지 발전 소설로 이해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조인간은 처음에는 지적 능력과 정서적 풍요로움을 겸비한 인간 존재에 다를 바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작품은 사이언스 픽션의 선구적 위치를 점하고 있으며, 인간이 무언가 좋고 나쁜 사항들을 차례로 배워나간다는 측면에서 교육 소설이며 발전소설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특히 주인공은 주위 환경의 낯설고 공격적인 반응으로 인하여, 인간이 아니라, 괴물로 성장하고, 급기야는 자신 스스로를 반인반수로 여기게 됩니다. 이로 인하여 나타나는 것은 끔찍한 살인극이었습니다. 과학자는 자신의 피조물에게 끔찍한 얼굴을 지닌 괴물의 형상을 부여함으로써, 결국 피조물의 인성을 파괴시키게 하고, 종국에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비극을 안겨주게 됩니다.

 

이 점에 있어서 인조인간은 빅토르 위고 Victor Hugo의 『노트르담의 곱추』의 주인공, 과지모도과 같은 운명을 맞이합니다. 과지모도는 못생긴 얼굴 그리고 흉측한 외형 때문에 사회로부터 친구로부터 외면당하고, 결국에는 자신의 마지막 도피의 공간인 노트르담 사원마저 저버려야 하는 처지에 처하게 됩니다.

 

21. 과학과 기술은 더 이상 낙관적 진보를 위한 수단이 될 수 없다: 일견 작품은 디스토피아의 문학의 선구적 위치에 처하는 것 같은 인상을 풍깁니다. 실제로 셸리의 작품은 얼핏 보기에는 고딕식의 괴기 소설과 같은 인상을 불러일으킵니다. 메리 셸리는 작품 내에서 사회의 끔찍한 상을 세밀하게 문학적으로 형상화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작품 속에서 강조되는 것은 놀라운 재능을 지닌 과학자와 그에 의해 창조된 피조물 사이의 변증법적인 관계입니다.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자신의 모든 능력을 발휘하여 인조인간을 만들었지만, 인조인간은 나중에 통제 불능의 상태에 빠지고 맙니다. 작가는 창조에 관한 과학 기술적 세부 사항에 관해서 자세하게 묘사하지 않았습니다. 이 작품이 사이언스 픽션을 대변하는 작품이라고 단언하기에는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그렇지만 이 작품은 인조인간이 창조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시사해줌으로써 사이언스 픽션의 선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은 작가의 입장입니다. 즉 자연이 인간에게 전적으로 예속되지 않으며, 인간의 완전한 삶을 위한 처녀지로서 얼마든지 활용될 수는 없다는 입장 말입니다. 이것은 프랜시스 베이컨의 기계주의의 세계상에 대한 거부로서, 자연과학 연구가 더 이상 인간의 행복을 완전히 충족시켜주지 못한다는 확인으로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자연과학을 활용하여 만든 인조인간은 인간이 아니라, 괴물로 출현하고 있습니다. 이로써 과학 기술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뢰는 깨어질 수밖에 없으며, 진보에 대한 낙관주의 역시 상대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