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외국시

서로박: 릴케 파스테르나크 츠베타예바

필자 (匹子) 2022. 9. 18. 15:15

 

릴케의 초상화 

 

 

 

 

아무도 펼치지 않았고, 지금도 외면당하는

잡지 속에 먼지 묻은 채 자리하고 있는

아무도 읽지 않는 나의 시구를 위한

마치 묵은 포도주와 같은 나의 시구를 위한

시대는 반드시 도래할 것이다.

(마리나 츠베타예바)

 

 

 

당신은 오늘 수업시간에 릴케에 관해 발표하였습니다. 그동안의 노고를 치하하며, 앞으로의 공부에 도움이 되는 몇 가지 사항을 언급하려고 합니다. 자고로 위대한 예술가들은 대부분 주위로부터 외면당하며 비참하게 살아갑니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불행하게 살아가게 만들까요? 운명의 신이 후세에 나타날 시인의 커다란 명성을 질투하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그들이 특정한 시대정신을 예리하게 간파하는 촉수를 지니기 때문일까요? 어쨌든 모든 예술가는 게오르크 뷔히너 Georg Büchner가 말한 대로 가을의 시간을 상실한 생명들입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겨울이 지나서야 비로소 씨를 여물게 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위대한 무명의 예술가는 타인으로부터 냉대당하고, 사회로부터 무시당하며 살아갑니다. 이들은 오로지 같은 업을 택한 예술가들에 의해서 유일하게 인정받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1875 - 1926), 마리나 츠베타예바 (1892 - 1941) 그리고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1890 - 1960)가 바로 그 예술가들입니다. 오늘은 이 세 사람이 서로 나눈 예술적 교류 그리고 그들이 서로 주고받은 포에지의 자극과 교감 등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릴케 - 파스테르나크

 

주지하다시피 릴케는 1899년 그리고 1900년 두 번에 걸쳐서 14세나 나이 많은 여인, 루 안드레아스-살로메 (1861 - 1937)와 함께 러시아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이때 그는 러시아의 문호, 레오 톨스토이 (1828 - 1910)를 만나기도 하였습니다. 러시아 여행 당시에 젊은 시인을 경탄에 사로잡히게 한 것은 무엇보다도 러시아 인민들의 깊은 신앙심, 농부들의 순진무구한 생활방식이었습니다. (이는 동방으로 퍼져나간 러시아 정교 지대한 영향 때문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나중에 릴케는 살로메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러시아를 자신의 두 번째 고향이라고 실토하였습니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릴케가 톨스토이의 집에서 레오니드 파스테르나크라는 이름의 어느 러시아 화가를 만났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톨스토이의 절친한 친구로서 "의사 지바고 Доктор Живаго"로 문명 (文名)을 떨치게 될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아버지였습니다.

 

 

 

 

톨스토이의 사진

 

아닌 게 아니라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는 어린 시절부터 릴케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1906년 파스테르나크는 16세의 나이에 릴케의 시집을 접하고, 몇 편을 러시아어로 번역하기도 하였습니다. 보리스는 소설가로 알려져 있으나, 엄밀히 말하면 시인으로 오래 활약한 문인입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독일 문학을 흠모하였고, 1912년에 독일로 유학하여, 마르부르크 (Marburg) 대학에서 한 학기 동안 문학과 철학 등을 공부하기도 하였습니다. 당시 마르부르크 대학에서는 헤르만 코엔 (Hermann Cohen) 니콜라이 하르트만 (Nikolai Hartmann)등이 신칸트 학파를 구성하고 있었습니다. 1910년 릴케의 『말테의 수기 Die Aufzeichnungen des Malte Laurids Brigge』가 간행될 무렵, 보리스는 대시인의 위대한 산문을 접하고 격찬하였습니다. 릴케는 보리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를테면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초기 시 「동물원 Swerinez」을 읽으면, 우리는 이 작품이 릴케의 『신 시집』에 실린 “검은 표범”을 방불케 한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파스테르나크는 아버지의 소개로 릴케에게 편지를 보내어, 자신의 예술과 창작에 필요한 여러 가지 사항에 관해서 조언을 구하기 시작합니다. 릴케 역시 파스테르나크의 편지에 답장을 보냅니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2) 파스테르나크 - 츠베타예바

 

러시아의 두 시인은 1919년 전후에 모스크바에서 잠시 일시적으로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리나 츠베타예바는 1922년 5월에 망명을 떠나 베를린에 정착합니다. 그미가 독일로 망명한 까닭은 남편 세르게이 에프론이 소비에트 혁명군과 대항해서 백군으로 싸우다가 행방불명되었기 때문입니다. 츠베타예바는 이어지는 박해를 피하기 위하여 독일로 입국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그미는 파스테르나크와 개인적으로 자주 접촉할 기회를 놓치게 되었습니다. 파스테르나크는 이미 20년대 초에 마리나의 시집을 구해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직접 만날 수 없었던 관계로 그는 베를린에 체류하던 마리나 츠베타예바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었습니다. 그의 편지는 오늘날 보존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파스테르나크의 글발에서 정갈하고 절제된 시인의 내면, 열정적 에너지 그리고 음악적 리듬으로 충만한 표현 등을 접할 수 있습니다. 가재는 게편이라고, 시인을 알아보는 자는 어떤 다른 시인이라고 누가 말했나요? 한마디로 파스테르나크는 마리나 츠베타예바의 시에 푹 빠져 있었습니다. 츠베타예바 역시 파스테르나크에게서 어떤 기이한 동류의식을 느꼈습니다. 그미는 파스테르나크의 시집 『나의 누이 - 그대 삶이여 Moja sestra-shisn』 (1917)를 읽고 그를 자신의 예술적 분신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두 사람 사이의 정신적 교감은 오래 이어졌습니다. 하나의 에피소드를 들겠습니다. 1978년 올가 이빈스카야 (Olga Iwinskaja)라는 여인은 『라라. 파스테르나크와 함께 한 시간』이라는 책을 파리에서 러시아어로 간행하였습니다. 이 책은 바로 그 해에 다른 언어로 번역되어 유럽 전역에 퍼졌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라라”는 다름 아니라 “닥터 지바고”에 등장하는 미인으로서, 보리스 파스테르나크가 실제로 열렬하게 사랑했던 여인을 가리킵니다. (여러분 “Somewhere my Love”라는 노래를 기억하고 계시는지요? 이 노래는 데이비드 린 (David Linn)감독의 영화, “닥터 지바고”의 주제가로서 세상에 널리 알려진 곡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책에 파스테르나크가 남긴 두 편의 시 「막달레나 Magdalena」가 실려 있다는 사실입니다. 말하자면 올가는 세 번째의 시 「막달레나」의 집필자로서 파스테르나크를 지목했습니다. 그러나 이 시를 쓴 사람은 파스테르나크가 아니라, 마리나 츠베타예바였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츠베타예바의 미발표 시작품이 공교롭게도 파스테르나크의 작품으로 둔갑한 것일까요? 그것은 두 사람 사이의 편지 교환에 기인합니다. 1960년 파스테르나크가 사망했을 때, 파스테르나크의 서재에서 시인의 친필로 기술된 한 장의 종이가 발견되었습니다. 사실인즉 파스테르나크는 마리나 츠베타예바의 너무나 훌륭한 작품을 암송하기 위해서 그것을 필사해두었던 것입니다. 

 

 

 

 마리나 츠베타예바

 

(3)  릴케 - 츠베타예바

 

그렇다면 릴케와 츠바타예바 사이의 서신 교환은 어떠한 계기로 성사되었을까요? 1925년 파스테르나크는 여전히 간간이 츠베타예바와 편지를 교환하고 있었습니다. 당시에 츠베타예바는 프랑스의 파리 그리고 생 지스 쉬비 (Vendee)에 거주지를 옮기면서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릴케는 스위스에 체류하고 있었습니다. 파스테르나크는 서유럽에서 빈궁하게 망명 생활을 보내고 있는 츠베타예바를 어떻게 해서든 도와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대 시인 릴케에게 부탁의 편지를 한 통 작성했으나, 공교롭게도 릴케에게 직접 송부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소련과 스위스 사이에 (러시아 혁명으로 인하여) 우편 협정파기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파스테르나크는 릴케에게 보내는 편지를 츠베타예바에게 부쳤고, 츠베타예바는 그의 편지를 프랑스에서 스위스로 송부하였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미는 대시인 릴케와 서신을 교환하게 됩니다. 마리나 츠베타예바는 어머니의 영향으로 독일어로 구사할 줄 알았습니다. 그미가 보낸 편지는 독일어로 작성되어 있습니다.

 

릴케는 츠베타예바로부터 편지를 받고, 어떤 묘한 감정에 사로잡혔습니다. 츠베타예바는 마치 아프로디테, 사포 그리고 오이리디케특성을 모조리 견지한 여인처럼 각인되었습니다. 사랑에 대한 열정, 시적 재능 그리고 어떠한 장애물에도 개의치 않는 적극성이 릴케를 매료시켰던 것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지금까지 릴케가 조우한 여인들은 -살로메를 제외한다면- 아름다움의 대상, 아니면 자신에게 열광하는 후견인들밖에 없었습니다. 당시에 릴케는 백혈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그는 병상에서 틈틈이 편지를 씁니다. 두 사람의 서신 교환으로 인해 릴케는「마리나를 위한 비가」를 집필하였고, 마리나 역시 릴케를 의식하면서, 「어느 방의 시도 Popytka komnaty」 라는 시를 집필하였습니다. 1926년 릴케는 그만 장미 가시에 찔려 이로 인한 후유증으로 유명을 달리합니다. 이로 인하여 릴케, 파스테르나크 그리고 츠베타예바의 만남은 수포로 돌아갑니다.

 

릴케가 오래 살았더라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그랬더라면, 츠베타예바는 경제적 궁핍함을 해결했음은 물론이며, 아마도 독일과 러시아 시인 사이의 대단한 창조적 작업이 생겨났을 것입니다. 릴케가 오래 살았더라면, 츠베타예바는 유럽에서 문학적 명성을 쌓았을 것이고, 대 시인으로 등극했을 것입니다. 그랬더라면, 그미는 1939년 소련으로 되돌아가서 한많은 삶을 마감하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어쨌든 릴케가 죽은 뒤 츠베타예바는 에세이 「그의 죽음」을 발표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그"는 당연히 위대한 시인 릴케를 가리킵니다. 후세에 살고 있는 우리는 시인들이 남긴 편지를 통하여 다음과 같은 물음을 유추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엇이 세 시인을 하나로 묶었으며,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제각기 다른 불운한 운명을 겪게 하였는가? 하는 물음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