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외국시

서로박: 츠베타예바의 시 "막달레나" (1)

필자 (匹子) 2022. 9. 25. 09:57

너: 선생님은 러시아의 시인, 마리나 츠베타예바 (1892 - 1941)의 연작시 「막달레나」를 살펴보자고 제안하였습니다. 굳이 이 작품을 선정한 계기는 무엇인가요?

: 마리나 츠베타예바는 고대 시인, 사포 Sappho에 견줄 정도로 위대한 20세기의 대표적 연애시인입니다. 오랜 기간 베를린 그리고 파리 등지에서 망명생활을 보냈으므로, 생전에 시인으로서의 명성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물론 라이너 마리아 릴케 Rilke,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Pasternak 등은 편지에서 그미의 시적 재능을 높이 평가하였지만 말입니다. 오늘날에도 츠베타예바 문학의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지 않는 게 무척 안타깝습니다. 그미는 때로는 독일어로 시를 썼습니다. 그렇기에 츠베타예바의 문학세계는 러시아 문학에 국한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너: 시인의 이름조차 생소한데, 츠베타예바의 연작시 「막달레나」가 반드시 언급되어야 하는 까닭은 무엇인지요?

: 「막달레나」 연작시는 미리 말씀드리자면 “속죄하고 새로운 더 나은 인간”의 가능성을 다루고 있습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든 살아가면서 낮은 곳으로부터 높은 곳으로, 어두운 곳에서 밝은 곳으로, 고통스러운 삶을 박차고 나와, 즐거운 삶을 향유할 수 있도록 애써야 합니다. 「막달레나」 시편은 바로 이 점을 우리에게 깨우쳐 줍니다. 더 나아지고 더욱 발전하는 모습은 사회적 삶뿐만 아니라, 사랑의 삶에서도 나타나는 게 바람직합니다. 진정한 사랑은 억압과 인위적 구속으로부터 벗어나, 한 인간을 자유롭게 발전시키도록 작용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가 추구한 사랑의 삶이었으며, 막달레나 역시 그것을 본받았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츠베타예바의 연작시는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 그리스도와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혼연일체가 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중요한 것은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수직적 종속 관계도 존속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 시에서 묘사되는 두 사람의 가상적인 결합 행위는 -빌헬름 라이히 Wilhelm Reich가 『그리스도의 살인』에서 표현한 바에 의하면- “평등한 남녀의 생식기의 포옹 genitale Umarmung”에 해당합니다. 그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작위적인 사랑의 농탕질 내지 “여성을 농락하는 남성적 폭력”과 비교될 수 없습니다. 전자, 즉 예수 그리스도의 창조적 신앙에 근거한 평등 관계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사랑의 행위는 후자, 즉 사도 바울 이후의 사제들이 주장하는 억압하는 천사의 경고 그리고 불평등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부자연스러운 사랑의 예속과 구분되어야 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창조적 삶을 추종해야 마땅하지, 위계질서를 강조하는 사도 바울 이후의 사제들의 소시민적 사고를 맹목적으로 추종해서는 곤란할 것입니다.

 

: 신학적 논쟁의 소지가 있는 발언이로군요.

: 글쎄요. 그 점에 관해서 시작품을 대하면서 나중에 재론하기로 하지요.「막달레나」시편은 언제 집필되었습니까?

나: 일단 발표 시점부터 말씀드리지요. 시작품은 1928년 파리에서 간행된 시집 『러시아 이후 Posle Rossii』 (1928)에 실렸습니다. 츠베타예바가 작품을 탈고한 시기는 여러 문헌을 종합하건대 1923년 8월 말로 추측됩니다. 이때 츠베타예바는 프라하에 살던 콘스탄틴 로체비치 Konstantin Rodsewitsch라는 평범한 사내를 만나서, 어떤 격정적 로맨스에 빠집니다. 로체비치와의 애정관계는 불과 6개월 지속되지만, 맨 처음의 예감이 작품 완성을 위한 하나의 계기로 작용한 셈입니다.

 

: 그렇다면 사랑을 체험하기 이전에 무언가를 감지했다는 말씀인가요?

: 네, 이 경우 시작품은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시인의 미래 삶을 설계하는 설계도나 다름이 없어요. 파울 첼란 Paul Celan도 유대 출신의 러시아 시인, 오시프 만델스탐 Ossip Mandelstam에 관해서 논할 때 그렇게 말한 적이 있지요. 시인은 자신이 묘사한 시작품대로 살아가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지 않습니까? 예컨대 랭보 A. Rimbaud는 일찍이 “포에지는 삶을 앞선다. La Poésie ne rythmera plus l’action.”고 토로한 바 있어요. 츠베타예바는 로체비치에게 애정을 품었을 때, 멀리 떠나 있는 남편을 생각하고, 분명히 어떤 죄의식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째서 수많은 인물 가운데에서 하필이면 “간통녀 adulteress”로 알려진, 그러나 나중에는 성녀로 추앙받던 여성을 시적 대상으로 선정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