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나의 글

처음 투표하게 된 J에게

필자 (匹子) 2021. 3. 28. 10:01

1. 친애하는 J, 이제 당신은 선거권을 취득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을 위해서 선거에 관한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선거철이 다가오면, 주위에는 온갖 현수막이 나돌고, 아줌마들이 길가에 서서 90도 각도로 인사합니다. 이 무렵이면 행인들은 분에 넘치는 칙사 대접을 받습니다. 현수막에는 후보자의 이름만 뎅그렁 적혀 있습니다. 그가 어떠한 정책을 펴나가겠다는 말은 눈을 씻고 보아도 찾을 수 없습니다. 다시 들러리 일회용품 취급을 받는 것 같아, 입맛이 씁쓸해오는 것을 느끼곤 합니다.

 

2. 선거는 항상 평일에 치러집니다. 그렇기에 일하는 사람들은 일손을 놓고, 투표장에 가기가 어렵습니다. 일부 정치가들은 사람들이 투표하지 않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어째서 우리는 수요일에 선거를 치러야 하는가요? 일부 정치가들은 투표율이 낮아지기를 은근히 바랍니다. 일반 사람들이 정치에 식상하게 되면, 권력자들은 방해 당하지 않은 채 마음대로 일을 처리할 수 있을 테니까요. 유럽에서는 휴일에 선거가 치러집니다.

 

3. 통계에 의하면 많은 사람들이 후보자를 정할 때의 기준을 “인품”으로 꼽고 있습니다. 뒤이어 학벌, 직업, 출신 지역 등이 고려되는 것 같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의 생각은 단순하고 소박합니다. 그들은 올바르고 청렴결백한 사람을 지도자의 재목이라고 여기는 것 같습니다. (사실 정치가 가운데 청렴결백한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ㅠㅠ) 그렇지만 나는 인물을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말하기가 고통스럽지만, 인간은 믿을 게 못되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한편으로는 천사 같은 존재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악마와 같은 존재입니다.

 

4. 이는 나 자신에게도 해당됩니다. 내 마음속에는 선과 악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유럽 사람들은 “사람을 믿는 것은 좋다. 그렇지만 감시는 더 좋다. Vertrauen ist gut, aber Kontrolle ist besser.”고 말하지 않습니까? 유럽 사람들은 수백년 동안 선한 왕을 갈구하면서도, 어리석게도 항상 가난과 폭정에 시달리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사안 정책 중심의 민주적 정당정치를 긍정적으로 여겨야 하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사람을 믿을 게 아니라, 어떠한 사안이 어떻게 해결되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숙고해야 할 것입니다.

 

5. 선거는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를 지닐까요? 내가 유권자의 권리를 행사하기 위해서 투표장에 가는 것은 누구를 당선시키기 위한 목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가 뽑은 사람이 우리의 뜻대로 정치하지 않는 경우를 수없이 겪어 왔습니다. 우리는 A의 일을 해달라고 국회의원 한 사람을 뽑았는데, 국회의원은 비A의 일을 하면서, 여의도 국회의사당에서 지역 주민들의 뜻을 거스르는 일을 자행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제도 상으로 누군가를 당선시킬 수는 있으나, 중도에 당선자를 탈락시킬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에 나는 회기 내의 불신임 투표 제도가 없음을 몹시 아쉬워하고 있습니다.

 

6.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위하여 투표장으로 가야하는 것일까요? 언제까지 우리는 누구를 뽑기 위해서 투표장에 가야할까요? 천재 바둑기사인 이창호는 “무엇보다도 좋은 기보를 남기려고 노력할 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자고로 패배는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쓰라리게 다가오기 마련일 것입니다. 그러나 승리냐, 패배냐를 따지기 전에 우리는 한 번 숙고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지금까지 특정한 정책을 지지하기 위해서 과감히 투표한 적이 있는가? 하고 말입니다. 괜스레 군소 정당에게 한 표를 던져 보아, 아무런 소득이 없지 않는가? 하고 지레짐작하지 않았습니까? 자신의 뜻과는 상치되지만, 당선 가능한 후보자에게 한 표를 던지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데에서 "현실과의 타협”이 시작됩니다.

 

7. 당락이 중요한 게 아니라, 정책이 중요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누구를 당선시키기 위해서, 혹은 낙선시키기 위해서 투표장으로 갔습니다. 리영희 선생도 말한 바 있지만,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납니다. 한국이라는 새에는 좌측 날개가 거의 없습니다. 정치가들은 지금까지 수없이 정당을 만들고 "헤쳐 모여"로 일관해 왔습니다. 국민의 힘은 극우 보수 정당입니다. 국민의 당 역시 보수를 지향하는 정당입니다. 이에 비하면 더불어 민주당은 중도 우파 정당입니다. (둥지에서 새끼를 친 열린민주당 역시 중도 우파입니다.) 좌파 정당은 정의당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한국 정치의 새는 하늘위에서 언제나 비틀거리며 비상할 수밖에 없습니다.

 

8. 남한의 정당 지형도가 우파 중심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안타깝게도 분단 상태에 기인합니다. 수많은 정치가들이 북풍의 피해를 입고 좌절해야 했습니다. 지금까지 반공주의는 한국의 대부분의 정당을 우파 중심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좌파 정당의 지지도가 낮다고 해서 좌파 정당이 사악하거나, 올바르지 않다는 말은 아닙니다. 우파 정당의 지지도가 과다하다고 해서 그들이 바람직한 정치를 편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좌파 정당이 무조건 옳다고 판단할 수도 없고, 우파 정당이 무조건 정당하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문제는 유권자들이 북한을 의식하며 우파정당들에게 몰표를 던지는 데 있습니다.

 

9. 친애하는 J, 필자가 골수 좌파라고 지레짐작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에게 도움을 주고 호의를 베푸는 분들 가운데 우파들이 더러 있습니다. 나와 정치적으로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나를 미워하고 적대시하는 분들도 이따금 나타나더군요. 중요한 것은 좌파냐, 우파냐를 따지기 전에 매사를 사안 중심적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차제에 "좌파는 공산주의자이고, 우파는 자본주의자다."라는 선입견은 사라졌으면 좋겠습니다. 마르크스가 사망한 시점은 1883년입니다. 21세기에 사는 우리는 언제까지 공산주의 운운 하면서 경악에 사로잡혀야 하는가요?

 

10. 당신은 현명한 분이기 때문에 남한의 이러한 정치적 지형도를 객관적으로 판단하리라고 믿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드리는 진정한 충고는 단 한 가지입니다. 당신이 누구를 지지하든, 어떠한 정당을 지지하든 간에 그것은 당신이 스스로 결정해야 할 사항입니다. 다만 무언가를 판단할 때, "나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가, 되지 않는가?" 를 따지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내가 저 사람을 찍으면, 내 호주머니가 두둑해지겠지 하고 생각하는 순간, 선거판은 순식간에 돗대기 시장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설령 나 자신이 손해보더라도 주위의 불행한 사람을 돕는 후보자 그리고 병든 사회를 고칠 수 있는 후보자를 선택하는 게 현명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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