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동구러문헌

서로박: 톨스토이의 "크로이처 소나타" (1)

필자 (匹子) 2021. 12. 26. 18:42

1. 사랑과 성, 그 불일치의 일치성: 친애하는 T, 인생에서 연정 그리고 성처럼 중요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연정 그리고 성이 만약 두 개의 서로 다른 악기라면, 그것들의 연주는 대체로 불협화음으로 울려 퍼지게 될까요? 과연 연정과 성이 제각기 독자적으로 기능한다고 이해해도 되는 것일까요? 흔히 사람들은 사랑 없는 섹스를 방종한 육체적 놀음으로 여기고, 섹스 없는 사랑을 플라토닉 러브라고 간주하곤 합니다.

 

어쩌면 인간은 남녀의 짝짓기에 대해서 동물과는 다른 어떤 의미를 부여하려고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인간은 사랑과 성이라는 두 개의 동일한 (?) 악기에 대해 서로 다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일까요? 확실한 것은 섹스 없는 사랑이 추상적이고 공허하다면, 사랑 없는 섹스가 작위적이고 불결한 짓거리처럼 느껴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사랑과 섹스를 서로 구분할 게 아니라, 하나의 합치점을 찾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2. 사랑과 성의 따로 국밥: 당연한 말이겠지만 사랑하는 임과 육체적으로 결합하는 것은 완전한 사랑으로 향한 지름길과 같습니다. 물론 우리는 일부일처제를 중시하면서, “사랑 따로, 섹스 따로”와 같은 생활 방식을 시큰둥하게 바라볼지 모릅니다. 그게 아니라면 자유연애에 대해 동조하는 입장을 취할 수도 있습니다. 결혼을 전제로 하지 않은 동침 역시 좋든 싫든 간에 사랑의 양태이니 무조건 매도될 수 없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한 파트너에게 사랑의 감정을 품고, 다른 파트너와 성적 욕망을 해소하는 경우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그러한 행동은 노골적으로 하나의 성도착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겠지만, 가부장주의 사회에서 비밀리에 행해진 부적절한 관습일 수도 있습니다. 결혼 전에 마초 유형의 남자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게 아니라면 자기와 비슷한 또래의 처녀를 사랑하면서도, 휴가 나와서 자신의 욕정을 다만 홍등가에 푸는 어느 군인을 생각해 보십시오, 어쨌든 우리 주위에는 수많은 다양한 사람들이 살아가기 때문에 인간의 사랑의 삶을 한 마디로 요약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3. 톨스토이의 집필 의도: 레오 톨스토이의 「크로이처 소나타」는 사랑과 성의 문제점을 비판적으로 지적한 작품입니다. 작품은 1891년에 발표되었습니다. 당시 63세의 톨스토이는 사랑과 성 그리고 결혼에 관해서 무언가 발언하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도덕을 중시하는 톨스토이는 자유분방한 성생활에 대해 거리감을 취하려고 한 것은 분명합니다. 실제로 그는 「마태오의 복음서」제 5장 28절의 구절을 매우 중시하였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고하노니, 다른 여성을 바라보고 성을 탐하는 자는 마음속에서 이미 아내와의 결혼을 파기한 셈이다.

 

그런데 장편 소설의 경우 자주 그러하듯이, 독자는 작가의 집필 의도와는 다른 무엇을 발견해낼 수 있습니다. 예컨대 우리는 발자크의 작품에서 작가와는 전혀 다른 어떤 정치적 견해를 발견할 수 있으며, 디킨스의 소설에서 작가의 정치관과는 정반대의 입장에 동조할 수도 있습니다. 톨스토이의 작품의 경우 우리는 다음의 사항을 예리하게 찾아낼 수 있습니다. 즉 가령 현대를 살아가는 연인들에게 중요한 것은 비단 사랑하는 마음 뿐 아니라, 성 생활도 해당한다는 사항 말입니다.

 

4. 기차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 작품은 광활한 러시아를 관통하는 기차간으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세 사람의 부유한 남녀들은 일주일 이상 지속되는 여행의 따분함을 떨치기 위해서 사랑과 성에 관한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가부장적 시민 사회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나이든 해방된 여성이 자리하고 있고, 그미의 곁에는 화려한 옷을 입은 변호사가 앉아 있습니다. 맞은편에는 가부장주의 시민 사회의 성도덕을 고수하는 상인이 착석해 있습니다. 두 사람은 상인과 견해 차이로 약간의 논쟁을 벌입니다. 한쪽에서는 여성 해방과 남녀평등을 주장하고 있다면, 다른 한쪽에서는 남존여비의 가족 중심주의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성과 변호사는 상인의 가부장적 사고가 시대착오적이라고 혹평합니다.

 

상인이 기차에서 내린 다음에 그 자리에 착석한 사람은 어느 험상궂은 남자였습니다. 그는 바실리 포즈니쇼프라는 이름을 지닌 전형적인 마초로서, 나이에 비해 무척 수척한 편이었습니다. 그의 외모에서는 어떤 어두운 그림자, 일종의 신경쇠약의 증세가 드러나는 것 같았습니다. 기이하게 번득이는 형형한 눈빛을 바라보았더라면, 옆의 사람들은 그에게 아무 말도 건네지 않았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은 오로지 대화의 주제에 깊이 골몰하고 있었습니다.

 

5. 소설의 화자 그리고 소설의 주인공: 소설은 3인칭 소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소설의 화자는 작품에 직접 모습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소설의 화자는 소설의 배후에 머물면서, 질문을 던지거나, 때로는 등장인물을 비판적으로 논평할 뿐입니다. 주인공, 바실리 포즈니쇼프는 착석하자마자 앞 사람들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중요한 것은 사랑의 이상이 결혼을 통해서 성취될 수 있는가?, 아니면 자유연애를 통해서 성취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 아니라고 합니다.

 

이 세상에는 애틋한 연모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바실리는 강하게 주장합니다. 다시 말해서 결혼 생활에서 존재하는 것이라고는 감각적 사랑, 즉 섹스만이라고 단언하면서, 결혼 제도 자체가 하나의 사기이며 현혹이라고 말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주인공은 자신의 삶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냉정하게 고찰할 때 그의 과거사는 새겨들을 게 없는 허망한 치정 살인극 하나에 불과합니다.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