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동구러문헌

서로박: 싱거의 "적들 어느 사랑의 이야기" (2)

필자 (匹子) 2021. 12. 16. 11:38

(7) 죽었다고 믿었던 아내가 살아서 돌아오다: 그런데 어느 날 타마라가 그 앞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타마라는 죽은 줄로만 알았던 그의 첫 번째 부인이었습니다. 타마라는 갖은 고초를 다 겪고, 이곳 미국까지 남편을 수소문하여 찾아오게 된 것이었습니다. 며칠 전만 하더라도 헤르만은 마샤에게 평생 함께 살자고 약속했던 터였습니다. 이제 자신만을 생각하고 지구를 반 바퀴 돌아 찾아온 첫 번째 아내를 문전박대할 수는 없었습니다.

 

오히려 정반대였습니다. 폴란드에서 어려운 시기를 함께 지내던 조강지처가 바로 타마라였던 것입니다. 헤르만은 살아서 돌아온 타마라를 부둥켜안고 시간가는 줄 모르는 채 눈물을 흘립니다. 이 일이 발생한 이후로 주인공은 세 명의 여자와 동시에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그는 바쁜 시간을 쪼개어, 세 명의 여자를 조우하며 살아갑니다. 향락주의 속으로의 도피는 결국 그의 삶을 파괴시키고 맙니다. 헤르만은 자신의 존재가 하나의 수수께끼라는 사실을 알아차립니다. 결국 그는 어떻게 살아야 좋을지 고민에 빠집니다.

 

(8) 세 여인과 함께 살아가는 것은 가능한가?: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누가 말했던가요? 그러나 헤르만은 모든 것을 하나의 숙명이라고 생각하며 세 여인과의 관계를 계속 유지합니다. 그렇지만 세 여인은 헤르만의 일부다처주의의 생활 방식을 감지하게 됩니다. 그 후에 그들은 각자 자신의 방식으로 주어진 여건을 개선하려고 애를 씁니다. 타마라는 남편이 다른 여자와 교우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치 천사처럼 남편을 더욱더 잘 받들어 모십니다. 주인공은 타마라의 도움으로 경제적으로 부를 축적하게 됩니다. 직접 가게를 차려서 여행 서적을 판매하게 된 것도 타마라의 덕택이었습니다.

 

두 번째 부인, 야드비가는 어느새 임신하게 됩니다. 그미는 남편의 여자관계를 이해하려고 애를 씁니다. 야드비가는 결국 모든 것을 운명이라고 생각하면서, 자신의 몸을 보살펴주는 타마라를 “언니”로 떠받듭니다. 그들은 한 남자를 모시는 두 여인으로서 서로 사이좋게 지내지요. 그러나 마샤는 처음에 이들 두 여인과는 다르게 행동하려고 합니다. 그미는 헤르만과의 관계를 끊고 어디론가 도망쳐서 잘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마샤는 결국 자신의 어머니와 함께 한 많은 삶을 마감하고 맙니다. 사랑하는 남자가 불행을 겪으며 살아가는 이유는 모두 자신의 나라, 독일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미는 독일의 모든 죄를 스스로 안고 이곳의 삶을 마감하는 길이야 말로 한편으로는 사랑하는 남자를 위하는 길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조국의 죄를 씻는 길이라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9) 살아남은 자의 슬픔, 혹은 유대인의 고향은 과연 어디인가?: 친애하는 J, 소설의 내용이 어떠했는지요? 주인공 헤르만은 바쁜 삶을 보내야 하지만, 근본적으로 고찰할 때 비록 쇼펜하우어의 제자로서 모든 것을 철학적으로 사고하는 인물입니다. 그는 “만약 그러하다면, 어떻게 될까?” 하고 수없이 고민하지요. 헤르만은 자신과 인간을 더 이상 신뢰하지 않고, 도래할 찬란한 미래를 믿지 않습니다. 그는 과거의 자신과 인간의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헤르만은 그러한 한 과거의 노예나 다를 바 없습니다. 대학살 이후에 목숨을 부지하는 일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아우슈비츠 이후에는 더 이상 살아갈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고 술회한 자는 아도르노 (Adorno) 그리고 파울 첼란 (Paul Celan)뿐이었을까요?

 

(10) 살아남은 인간, 절망적인 기억: 오래 살아남는다고 해서 좋은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지금 여기가 통곡의 계곡이기 때문입니다. 성적 욕구에 대한 주인공의 과도한 탐닉은 바로 이러한 절망적 물음으로부터 도피하려는 제스처나 다를 바 없습니다. 한마디로 신의 말씀에 대한 의혹은 살아남은 절망하는 인간을 그야말로 꽁꽁 묶어두고 있습니다. 오로지 신의 말씀만이 결국 고향이란 말인가요?

 

이러한 처절한 사실을 깨달은 주인공은 마지막 대목에서 조용히 어디론가 사라져 잠행하고 맙니다. 이는 유대인의 미래를 더 이상 믿을 수 없다는 절망의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희망의 상징인 딸이 태어났을 때, 주인공은 그미에게 마샤라는 이름을 붙여줍니다. 야드비가는 유대교로 개종하여 타마라와 함께 유대인 공동체 속에서 살아갑니다. 모순을 받아들이는 일 - 그것은 싱거에 의하면 믿음과 의혹 사이의 갈등을 감수하는 행위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