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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박: 옐리네크의 '노라가 남편을 떠 난 뒤에...'

필자 (匹子) 2022. 2. 19. 13:16

오늘은 2004년 노벨상을 수상한 오스트리아 작가, 엘프리데 옐리네크 (Elfriede Jelinek, 1946 - )의 극작품 한 편을 소개하겠습니다. 이것은 「노라가 그의 남편을 떠난 뒤에 무슨 일이 생겼는가? (Was geschah, nachdem Nora ihren Mann verlassen hatte?)」인데, 1977년 그라츠에서 처음으로 공연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브레히트가 시도한 바 있는 실험극으로서 50년대 그리고 60년대의 팝 문화라는 문학적 수단을 동원하고 있지요. 이 작품의 틀로서 작용하는 것은 당연히 입센의 작품 「인형의 집」(1879), 「사회의 버팀목」(1877)입니다.

 

미리 말하자면 옐리네크는 마르크스주의를 신봉하는 페미니스트로서, 입센의 태도를 비아냥거리고 있습니다. 옐리네크에 의하면 입센은 하부구조로서의 경제적 측면을 중시하지 않고, 그저 추상적으로 여성의 동등권을 주장했다고 합니다. 나아가 옐리네크는 사회 곳곳에서는 여성으로 하여금 자유인으로 살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로 가득 차 있다는 점을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맨 첫 장면에서 노라는 생계를 위하여 일자리를 찾습니다. 그미가 택한 것은 직물 공장인데, 이곳에서 자신이 주체로 거듭나 살아가기를 애타게 바랍니다. 그곳의 공장주는 과연 그미가 제대로 일할지를 면밀히 검토한 뒤에 노라를 고용합니다. 노라는 일터에서 수많은 여자 노동자들과 조우합니다. 이들은 사회의 하층 계급 출신으로서, 그저 잠을 잘 수 있는 공간 그리고 변변치 못한 일자리를 찾는 데에도 힘들어 합니다.

 

주인공은 이들과는 다른 신분으로 살아왔습니다. 지금까지 자택에서 남편을 뒷바라지하며, 비교적 편하게 자식들을 키워 왔으니까요. 맨 처음 노라는 동료들을 설득하려고 합니다. 여성 스스로 자아를 찾아야 한다는 게 설득의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나 여성 해방에 관한 노라의 주장은 가난한 여자 노동자들에게 제대로 먹혀들 리 만무합니다. 왜냐하면 노라의 주장은 이들의 시각에 의하면 사치스럽고 배부른 주장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거대한 재벌 한 명과 부동산업을 행하는 외교관 한 명이 공장을 시찰합니다. 그들은 다름이 아니라 한스 마르틴 슐라이어 회장 그리고 부동산 투기를 행하는, 바이강이라는 영사였습니다. 이들은 공장 주위의 부지에다가 원자력 발전소를 건설하려는 계획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그곳을 들렀던 것입니다. 이때 노라는 그들 앞에서 타란텔라 춤을 덩실덩실 춥니다.

 

타란텔라 춤은 이탈리아 남부에서 유행하는 춤으로서, 급한 템포의 음악에 맞추어서 매우 고혹적이고 율동적인 동작을 드러냅니다. 처음에 노라는 무지몽매한 노동자들을 선동하고, 오로지 이윤만을 추구하는 회장과 영사의 사업 계획을 망치게 하려고 의도했습니다. 그러나 그미는 춤이라는 퍼포먼스가 제 격이라고 판단하고, 두 남자 가운데 한 명을 유혹하려고 마음을 바꿉니다.

 

아니나 다를까, 바이강 영사는 노라의 거칠고 관능적인 춤에 매혹되어 첫눈에 그미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노라를 자신의 으리으리한 집으로 데리고 가서 정부 (情婦)로 살게 합니다. 이곳에서 노라는 때로는 천진난만하게, 때로는 거친 춤으로 바이강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이는 바이강의 경계심을 풀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그는 노라를 경박하지만 재미있는 애인으로 여기며, 그미에 대한 경계심을 풀어버립니다.

 

노라는 바이강의 재력을 활용하면서, 그의 사업 문제에 관여합니다. 스스로 “도미나”라는 여성으로 변장하여, 이리저리 뛰어다닙니다. 그런데 바이강 영사는 노라의 전 남편인 헬머의 은행과 거래하고 있었습니다. 노라가 이전에 잠시 일하던 공장의 부지는 은행 소유로 되어 있었는데, 나중에는 바이강 영사의 소유로 둔갑합니다. “도미나”로 변장한 노라는 전남편 헬머를 통해서 다음의 사실을 알게 됩니다. 즉 공장의 부지 그리고 노동자들이 살고 있는 아파트촌은 조만간 매각되어 헐리리라는 게 그 사실이었습니다.

 

노라는 공장의 여자 노동자들에게 다음의 사실을 알립니다. 즉 부동산 업자들이 공장과 임대 가옥을 헐고, 그 자리에 원자력 발전소를 세우려고 한다는 사실 말입니다. 바이강은 노동자의 권익에 관해서는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노라는 이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즉 “여성의 역사는 오늘날까지 여성에 대한 살인의 역사였어요. 새로운 폭력 외에 살인을 멈추게 하기 위한 다른 방도가 있는지 도저히 모르겠어요.”

 

그러나 여자 노동자들은 함께 힘을 합하여 이에 대해 저항하려 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에바”라는 노동자만이 그들을 부추겨서 함께 연대하자고 호소할 뿐입니다. 에바의 노력은 실패로 돌아갑니다.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소시민적으로 자신의 호주머니 생각밖에 하지 않습니다. 가난이 그들을 고립시키고 개인주의의 태도를 취하게 만든 것입니다.

 

작품의 마지막 장면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관객은 갈등 구조의 부딪침으로 인한 첨예한 파국을 접하는 게 아니라, 희석된 갈등만을 접할 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끝에서 잡쳤다.”는 반응은 극작가의 복합적인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해석입니다. 바이강은 노라에게 섬유 사업을 추진하여 그미에게 물려줍니다. 다른 한편 헬머는 은행장으로부터 물러나서 경제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몰리게 됩니다.

 

결국에 노라는 헬머에게 도움의 손길을 보내면서, 그리고 가족들과 재결합합니다. 이때 바깥에서는 행군가의 팡파르가 울려 퍼집니다. 헬머는 자신의 사회적 신분이 하락된 데 대해서 반유대주의의 독설을 터뜨립니다. 이에 반해 노라는 남편과 아이들과 걱정 없이 살아갈 꿈을 꾸고 있습니다. “자본의 그림자 속에서 살아가는 삶은 나를 질식할 것 같았어요. 내가 언젠가 당신을 떠났을 때 얻으려고 한 것은 강인한 성격이었고, 이를 증명해냈거든요.”

 

자고로 남성이 지배하는 계층사회는 여성으로 하여금 상품 그리고 도구로 살아갈 것을 강요합니다. 그러한 한에서 옐리네크의 노라는 수동적으로 고통당하는 객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보여주지 않습니다. 이는 지극히 의도적입니다. 작품 속에서 주인공은 오로지 남성에게 주어져 있는 권력을 에로틱한 춤으로 획득하게 됩니다. 그미는 편안하고 안락한 삶, 소비적 향유를 즐김으로써, 결국 광적이고 추상적으로 표현되는 페미니즘의 저항으로부터 한발 물러나게 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노라는 -입센이 「사회의 버팀목」에서 냉소적으로 비아냥거린 바 있듯이- 사회적 인습을 공고히 하는 역할을 행하게 되지요.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여주인공은 남성 사회에서 희생당하는 여성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영웅적으로 행동하는 여성도 아닙니다. 어쩌면 마르크스주의자, 옐리네크는 입센의 사회 비판을 급진적으로 표현하려고 했으며, 앞에서 언급했듯이 “경제적 토대를 고려하지 않은 채 여성의 동등권만을 추상적으로 강조하는” 입센의 유토피아를 패러디하려고 했는지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