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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박: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

필자 (匹子) 2021. 10. 28. 06:33

(1) 학교란 무엇인가?: 친애하는 H, 학교는 배우는 곳입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학교에서 무엇을 배울까요? 그것은 오늘날 주로 실용적 지식입니다. 이러한 지식은 사회의 일꾼으로서 갖추어야 하는 능력과 관계됩니다. 교사와 학생들은 무엇을 전공하는가에 따라 제각기 약간의 편차가 있지만, 직업인으로서의 능력을 함양하는 것을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감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실용적 지식은 가령 교양과 지혜를 포괄하지는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처음부터 피교육자의 개인적 자기 발전이라든가 미래 삶에 관한 자신의 고유한 행복과는 거리감을 지닐 수밖에 없습니다.

 

실용적 지식의 함양도 중요하지만, 교양과 지혜를 가꾸어나가는 노력 역시 좌시될 수 없습니다. 만약 배움에 대한 피교육자의 욕망이 학교에서 충족되지 않는다면, 과연 학교가 그에게 어떠한 의미를 지닐까요? 만약 피교육자가 학교 교육과 수업 내용 등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지 않고 거부한다면, 어떤 결과가 출현하게 될까요? 만약 한 젊은이가 자신의 학교에 대해, 교사에 대해 수업 내용에 대해 심리적 거부감을 느낀다면, 그는 어떠한 배움의 길을 걸어가야 할까요? 한마디로 학교 체제는 만약 배움에 대한 자신의 내적 갈망을 충족시켜주지 못할 경우 당사자에게 억압하는 이데올로기의 관청과 다를 바 없습니다.

 

(2) 나에 관한 이야기를 쓰면 소설이 된다.: 헤르만 헤세 역시 학교생활에서 극도의 고통을 느꼈습니다. 자신이 다녔던 학창 시절의 괴로움은 작품 라틴어학교에서 자세히 묘사된 바 있습니다. 작가는 평범한 사람들이 거치는 김나지움, 대학교의 과정을 마다하고, 혼자서 책을 읽고 쓰며 스스로 무언가를 배우는, 이른바 독학파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친애하는 H, 어쩌면 진정한 배움의 길은 독학의 길인지 모릅니다. 헤세가 살아온 길을 조명해보면, 우리는 학교가 그저 배움에 크고 작은 자극을 가하는 대상일지 모른다고 여겨집니다. 물론 학교를 폄하한다고 해서, 우리는 선생의 임무 역시 하찮게 취급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오늘은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를 다루어보고자 합니다. 이 작품은 1904년 신 취리히 신문에서 처음으로 소개되었으며, 1906년에 발표되었습니다. 마치 로베르트 무질 Robert Musil이 자신의 첫 작품 「생도 퇴를레스의 혼란」에서 그렇게 했듯이, 헤세 역시 자신의 과거를 기억하면서 자전적 체험을 소설 속에 반영하였습니다. 소설은 -많은 평론가의 조롱 섞인 발언에서 드러나듯이- 건전하고 영특하기 이를 데 없는 젊은이가 어떻게 패망과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는가? 를 생생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나중에 헤세는 오로지 자신의 체험 뿐 아니라, 친동생, 한스가 겪었던 학교생활의 고통 역시 소설 속에 반영하였다고 합니다.

 

(3) 영특하지만, 마음이 여린 주인공: 1900년에 남부 독일, 슈바르츠발트 지역에서 작은 상점을 경영하는 소시민이 살고 있었는데, 그에게는 섬세하고 영리한 아들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한스 기벤라트인데, 소설의 주인공입니다. 아버지는 자식 욕심이 대단하여 어린 시절부터 공부 열심히 하라고 닦달하였습니다. 주인공은 어린 시절부터 친구들과 마음대로 뛰놀지 못하고 고독한 유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어느 날 한스는 어느 날 학교를 대표하여 슈투트가르트에서 치러지는 뷔르템베르크 주의 공개 시험의 후보자로 선발되었습니다. 아버지는 도시에서 오로지 아들만 선발되었다는 것을 동네방네 자랑하며, 주인공이 오로지 공부에 몰두하도록 조처를 취합니다. 시험을 잘 치르려면 방과 후에도 죽기 살기로 공부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스는 어린 시절부터 자연친화적으로 살아왔습니다. 시험 치르려고 떠나기 전에 그는 자신이 언젠가 애지중지하며 만들었던 토끼장을 부숴버립니다. 한스는 수백 명의 학생 가운데 차석의 성적을 차지하게 되는데, 이로 인하여 마울브론에 있는 수도원학교에 장학금을 받고 공부하게 됩니다. 아버지, 학교의 교장 그리고 도시의 목사 등은 주인공이 방학에도 공부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최상의 그룹에 속할 수 있다고 훈계합니다. 그래서 방학인데도 그는 특별 과외수업을 받습니다. 주위에서 삶의 여유를 가지도록 조언하는 사람은 구두수선공 플레그밖에 없습니다. 플레그는 평생 공부만 하는 게 무슨 대수냐? 하고 말하지만, 이웃 사람들은 플레그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봅니다.

 

(4) 친구 헤르만 하일너: 한스 기벤라트는 마울브론 수도원 학교에서 친구 한 사람을 사귑니다. 친구는 헤르만 하일너라는 이름을 지녔는데, 상상력이 풍부한 꿈 많은 남학생이었습니다. 처음에는 헤르만이 학교 공부를 등한시하고 말썽을 피워서 주인공에게 거부감을 불러일으켰는데, 나중에 헤르만은 매우 지적이고 저항적인 성격을 지닌 것을 간파하게 됩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한스는 헤르만을 좋아하게 됩니다. 헤르만과 함께 어울리게 되었을 때 주인공의 성적은 자꾸 떨어집니다. 왜냐하면 너무 이른 나이에 공부에 몰두하다보니, 외부로부터 심리적으로 압박감에 시달리게 되고, 자신의 정신 또한 피곤함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헤르만은 3일 동안 무단으로 결석한 다음 마을에서 선생님에게 붙잡혔는데, 이로 인하여 수도원 학교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한스는 결국 친구인 헤르만과 작별하게 됩니다. 학교의 선생님은 헤르만이 사라진 다음에 한스가 집중하여 공부할 줄 믿었습니다. 그렇지만 한스는 심리적으로 심한 충격을 받게 되고 집으로 가서 요양해야 한다는 판정을 받게 됩니다. 그후 그는 영원히 수도원 학교를 떠나게 됩니다.

 

(5) 젊은 시기에 우정의 상실로 인한 고통은 엄청난가?: 한스 기벤라트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몇 주를 허송합니다. 며칠 전 에마라는 처녀와 마주친 적이 있었습니다. 에마는 자신보다 몇 살 더 많은 것 같았으나, 얼굴이 눈부실 정도로 뽀얗고 아름다웠습니다. 게다가 걸어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니, 순식간에 그미를 사랑하고 싶은 욕구가 솟아올랐습니다. 그미는 아무런 인사도 건네지 않은 채 그냥 한스의 뒤를 돌아 사라지는 게 아니겠습니까? 자신을 무시하는 그미에 태도에 순간적으로 가슴이 아파오는 것을 감지했습니다. 바로 이 순간 기이하게도 그의 마음속에서 자살의 욕구가 불현듯 솟아오릅니다.

 

한스는 기계 공작소에서 단순 노동의 기술을 배우기 시작합니다. 옛날에 함께 학교 다니던 친구들은 공장에서 일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바라보고 비웃습니다. 주인공을 위로해주는 친구는 오로지 아우구스트밖에 없습니다. 아우구스트는 옛날에 함께 학교 다니던 친구로서 기계 기술을 배우는 중이었습니다. 어느 날 주인공, 한스 기벤라트는 동료들과 술을 마신 다음에 강에 빠져 목숨을 잃게 됩니다. 강가는 주인공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친숙한 공간이었습니다. 그가 사고로 죽었는지, 아니면 자살로 삶을 마감했는지는 밝혀지지 않습니다. 그가 어떻게 강물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6) 작품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을까?: 소설의 주제는 주인공의 죽음의 주변을 맴돌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한스 기벤라트의 죽음을 추적해야 할 것입니다. 소설 내의 몇몇 문장으로 미루어 우리는 성인의 세계에 대한 무지가 주인공으로 하여금 끔찍한 변을 당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추측할 수 있을 뿐입니다. 한스는 고향에서 가장 훌륭한 학생이었습니다. 그가 나중에 대학에 진학하여 고등교육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주인공은 하루 종일 공부에 매달려 불행한 삶을 보냈습니다. 도시 전체가 그에게 기대감을 품었던 것입니다.

 

한스는 아버지를 실망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이로써 그는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도구가 되어야 했습니다. 언젠가 그는 작은 상점을 열어서 치즈를 팔든가 작은 사무실에서 사원으로 일하는 꿈을 꾼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공부하느라고 어떠한 취미 생활도 영위할 수 없었습니다. 물론 낚시할 시간이라든가 휴식을 취할 시간이 주어졌지만, 이는 무척 드물었습니다. 결국 열심히 공부하여 슈투트가르트에서 개최되는 주 시험에 차석의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다가 마울브론에 있는 수도원 학교를 다니게 됩니다. 이곳에서 저항적인 예술가 타입인 헤르만을 사귀게 됩니다. 육체적으로 그리고 심리적으로 몹시 지치게 된 무렵에 주인공은 친구 헤르만으로부터 학업에 도움이 되지 못하는 자극을 받게 됩니다.

 

어느 날 헤르만은 주인공의 입술에 입을 맞춥니다. 말하자면 헤르만은 자신의 동성연애의 감정을 친구에게 노골적으로 드러내게 된 것이었습니다. 사춘기 시절의 온갖 상상들이 주인공의 마음을 더욱 헝클리게 만들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한스는 집중력을 상실하게 되는데, 이는 학교 성적의 하락으로 이어집니다. 수업시간에도 자신이 공상이라든가 잡념에 사로잡히는 것에 대해 스스로 소스라치게 놀랍니다. 헤르만이 학교를 떠난 다음에 주인공은 더욱 커다란 소외감에 사로잡힙니다. 선생님들이 그를 도와주었지만 그의 성적은 자꾸 곤두박질치게 됩니다.

 

(7) 친구의 영향과 배움의 과정: 한스의 삶은 헤르만이 사라지고 난 다음부터 그야말로 고통의 수렁과 같았습니다. 동급생 친구도 없었고, 나이든 선생 역시 친구의 역할을 대신해줄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학교생활 역시 어떠한 기쁨도 마련해주지 못했습니다. 이는 결국 주인공의 죽음으로 이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의 죽음이 자살 충동으로 인항 것인지, 아니면 술을 과음한 탓으로 인한 과실인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그리고 작가가 던지는 암시의 문장을 염두에 둘 때 우리는 한스의 자살에 무게 중심을 둘 수 있을지 모릅니다.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 주인공의 유일한 친구인 구두수선공 플레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에게 공부하라고 독려하던 모든 사람들이 결국 어린 영특한 학생 한 명을 끔찍한 불행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고 말입니다. 소설의 화자는 시작 지점부터 등장인물에 대해 무언가 암시를 던지고 있습니다. 주인공 한스 기벤라트는 매우 영리한 젊은이이지만, 심리적으로는 매우 약한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정신적 측면에서 지적 능력과 의지는 뛰어나지만, 육체적으로 그리고 심리적으로는 무척 유약한 사람이 바로 한스입니다. 주인공의 이러한 특징을 알아차린 사람은 구두수선공 플레그밖에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주인공의 이러한 내적 특성을 간파했더라면, 비극은 비켜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8) 사고사인가, 자살인가?: 소설은 이에 관한 흐릿한 사항만을 암시해주고 있습니다. 만약 그의 죽음이 자살이라면, 많은 사람이 그를 자살하도록 부추긴 게 틀림없습니다. 교장과 아버지는 주인공에게 항상 공부만을 강요했습니다. 우연히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해준 엠마는 한스에게 자비의 일격을 가함으로써 상처를 입혔습니다. 오로지 구두수선공 플레그만이 주인공을 이해해주고 약간의 대화를 나누었을 뿐입니다. 사람들은 오로지 자신의 입장에서만 주인공을 바라보면서 공부하라는 임무만을 부추겼을 뿐, 삶에 있어서 스스로 무언가 결단 내리도록 기회를 제공하지 않았습니다.

 

소설에서는 익사에 관한 여러 가지 에피소드가 언급되고 있습니다. 첫째로 작품 중간 부분에 주인공의 친구 힌두가 사원 근처의 호수의 얼음 아래로 빠져서 익사했다는 에피소드가 서술되고 있습니다. 둘째로 한스는 세미나 시간에 환각에 빠져서 예수가 배를 타고 손짓하는 모습을 바라봅니다. 예수가 주인공에게 손짓하자, 한스는 배로 향하여 수영하려고 강물에 뛰어드는 공상에 빠집니다. 셋째로 한스가 정신을 잃기 전에 소설의 화자는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어느 누구도 가냘픈 소년이 짓는 탄식의 미소에서 몰락하는 영혼이 얼마나 괴로워하는지를 바라보지 못했다. 물에 빠진 소년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거의 절망적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던 것이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한스 기벤라트의 영혼은 이미 오래 전에 완강한 세상의 파도 속에서 익사해 있었습니다.

 

(9) 한스의 아버지: 한스의 아버지는 혼자서 자식을 키우지만, 사랑스러운 부친상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는 자식이 시험에 합격해야 비싼 학비를 절약할 수 있습니다. 만약 한스가 시험에 떨어지면, 김나지움에 다녀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한스의 아버지는 수업료를 정기적으로 납부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그에게는 많이 빚이 있습니다. 정말로 그에게 자식의 수업료로 지불할 돈이 없는지는 불분명합니다. 분명한 것은 소설의 앞부분에 묘사된 바 있듯이 주인공의 아버지가 찢어지게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어쨌든 아버지는 아들이 공부 외의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이로써 주인공은 자연을 벗삼아 뛰노는 모든 일 그리고 낚시 등을 포기해야 합니다. 주인공이 죽은 뒤에 아버지는 선생, 교장 그리고 목사 등과 마찬가지로 한스가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고 생각합니다.

 

(10) 구두 수선공 플레그와 마을 목사: 플레그는 신앙심이 투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심지어 목사가 신을 믿지 않고, 믿음보다 학문을 더욱 중시한다고 비아냥거립니다. 플레그는 말하자면 한스의 수호천사와 마찬가지입니다. 마을사람 가운데 플레그가 유일하게 주인공의 자살을 확신합니다. 술이 그의 목숨을 끊은 게 아니라, 선생들이 그의 생명을 잃게 한 장본인들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비극은 플레그에 의하면 학교이며, 아버지의 공명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합니다. 학교와 아버지의 명예욕이 한스의 유년과 자유 그리고 주인공의 귀중한 삶을 앗아갔다는 것입니다. 플레그에 비하면 마을 목사는 전혀 다른 유형의 사람입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한스에게 자유 시간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만약 수도원 기숙사에 들어가면, 학교 공부를 따라가기 어렵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11) 친구 헤르만 하일너: 헤르만은 상상력이 풍부한 문학도입니다. 주인공은 헤르만을 사귐으로써 학교에 대한 입장을 바꾸게 됩니다. 헤르만은 학교 공부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사고는 하나의 틀을 벗어나야 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선생님들은 헤르만의 이러한 태도를 좋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헤르만이 학교를 떠나게 되자 한스는 그와의 관계를 더 이상 지속할 수 없게 됩니다. 그는 헤르만을 통하여 자신이 진정으로 무엇을 원하는가? 그리고 학교가 사회적 이데올로기를 심화시키기 위해서 학생 개개인의 자유 의지를 압살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하게 됩니다. 헤르만과 한스는 작가의 분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헤르만과 한스의 이니셜은 HH입니다. 이는 헤르만 헤세 Hermann Hesse를 가리키지요.

 

(12) 수레의 의미는 무엇인가?: 수레바퀴는 작품 속에 언제나 반복되어 나타납니다. 한스는 어린 시절부터 물수레의 바퀴를 조립하곤 하였습니다. 어른들은 물수레 만드는 것을 그저 하나의 장난으로 간주했지요. 물수레를 만드는 일은 공부할 시간을 앗아간다는 것이었습니다. 교장은 주인공에게 언제나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절대로 무기력해지지 마. 멍한 상태에 빠지면, 스스로 파멸하고 말거야.” 여기서 파멸하게 된다는 말은 숙어로서 “unters Rad kommen”으로 표현됩니다.

 

주인공이 아름다운 처녀, 에마와 조우하게 되었을 때 자신이 마치 바퀴에 달라붙은 채 기어가는 달팽이가 된 것처럼 느낍니다. 주인공이 기계공 수업을 받게 되었을 때 기계의 부품인 톱니바퀴를 생산하게 됩니다. 이때 톱니바퀴는 주인공의 뇌리에 자신의 마음을 내리 누르는, 부정적인 물건으로 투영됩니다. 요약하건대 “수레바퀴 아래서”라는 제목은 주인공 한스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무엇에 대한 객관적 상관물이며, 내용을 고려한다면 “파멸로 향하여”라고 번역되는 게 온당할 것 같습니다.

 

(13) 학교와 배움: 친애하는 H, 헤르만 헤세는 작품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1900년 당시의 독일의 학교 체제를 신랄하게 비판하려고 한 게 분명합니다. 학교 체제는 오로지 당국의 필요에 의한 기능적 인간을 키워내려는 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학교는 유능한 사회적 일꾼을 교육시킨다고 대외적으로 공표하지만, 개별적 인간을 언제나 배움의 도구로 전락시키고, 공부하는 기계로 살아갈 것을 종용하고 있습니다. 이로써 무시되는 것은 피교육자의 삶에 있어서의 포부 그리고 갈망입니다. 그렇기에 오로지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하게 배우는 비굴한 인간형만이 이러한 권위주의적 학교 체제에서 승리를 구가하게 됩니다.

 

헤세는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원시림이 사람들에 의해서 깎이고, 벌채되며, 무지막지하게 이용당하듯이, 학교 역시도 자연적인 인간의 고유한 마음을 깎고, 벌채하며 파괴시키는 게 틀림없다.” 아니나 다를까, 헤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선생은 한 명의 탁월한 재능보다 열 명의 올바른 당나귀들을 선호한다. 왜냐하면 그의 과업은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는 탁월한 정신을 발굴하는 게 아니라, 라틴어 잘 구사하고, 수학 문제 잘 풀며,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유능한 일꾼을 키우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선생의 의무는 젊은 아이들의 거친 힘과 자연스러운 욕망을 억누르거나 근절시키고, 그 대신에 국가가 인정하는 조용하고 말 잘 듣는 인간형을 키워내는 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