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1958년에 발표된 브루노 아피츠 (Bruno Apitz, 1900 - 1979)의 소설 「늑대들 사이에서 헐벗은 채 (Nackt unter Wölfen)」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피츠는 1927년에 독일 공산당에 가입하여, 1934년에 부헨발트 수용소에 정치법으로 수감되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까닭에 그는 수용소 내의 삶을 누구보다도 생생하게 묘사할 수 있었습니다.
작가는 이 작품을 발표함으로써 하루아침에 독일 전역에서 유명한 소설가로 부상하게 되었지만, 실제 자신이 강제수용소에서 겪었던 체험은 기억하기조차 싫을 정도로 끔찍한 것이었습니다. 과거의 상흔에 대한 기억은 작가를 우울하게 만들고, 결국 그로 하여금 더 이상 창작에 몰두하지 않게 합니다. 절필은 그 자체 안타깝지만, 개인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습니다.
소설은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직전, 1945년 겨울부터 시작됩니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장소는 부헨발트의 강제수용소입니다. 그곳에 수감되어 있던 사람들은 대부분 공산주의자들로서, 지금까지 수동적인 태도를 저버리고 은밀하게 무장 폭동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무장 폭동은 은밀히 진행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들은 모두 비밀리에 자신이 맡은 바를 시간에 맞추어 수행하도록 약속합니다.
이들은 외부로부터 한 가지의 나쁜 소식과 한 가지의 좋은 소식을 접합니다. 그 하나는 소련 지역에서의 독일군의 많은 패배로 인하여 히틀러가 조만간 항복을 선언하리라는 소식입니다. 다른 하나는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동쪽 독일 지역 그리고 폴란드 지역에 위치한 강제수용소에서 수많은 유대인들이 독가스로 처형당한다는 소식입니다. 부헨발트 강제수용소의 수인들로서는 어떻게 하든 간에 이러한 처형을 사전에 막고 살아남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이때 수인들은 차라리 거사를 앞당겨서 거행할까? 하고 고심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세 살 난 아이가 계획했던 거사를 어렵게 만들었다는 사실입니다. 어느 유대인이 아우슈비츠에서 그 아이를 몰래 데리고 이곳으로 잠입했던 것입니다. 그 아이는 회펠이라는 사람의 침대 아래에서 은닉해서 살고 있었습니다. 회펠은 무장 폭동을 위한 무기 제작을 담당한 기술자입니다. 만약 독일 군인이 아이를 발견하면, 어떻게 될까요? 그렇게 된다면 회펠이 비밀리에 무기를 만들었다는 사실이 발각될 테고, 많은 사람들이 즉결 처분도 받지 않은 채 총살당하기 십상일 것입니다.
국제 공산당 위원회의 연락책을 맡고 있는 보쇼라는 남자는 이를 잘 알고 있습니다. 만약 아이를 계속 은닉하게 되면, 오만 명의 유대인들은 결코 수용소를 탈출하지 못하리라고 보쇼는 굳게 믿습니다. 그는 대를 위해서 소를 희생하라고 회펠에게 요구합니다. 다시 말해 누군가 아이를 죽여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아이가 결국 수인들을 서로 다투게 만듭니다. 가령 회펠은 아이를 계속 은닉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도 중요하지만, 불과 세 살 난 아이의 목숨 역시 중요하다는 게 그의 항변이었습니다. 어느 날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합니다. 아이는 먹을 것을 구하려고 밖을 돌아다니다가, 독일군 PX 근처에서 군인들에게 붙잡힙니다. 이로 인해서 강제수용소에 수감되었던 사람들은 한 명씩 불려가서 문초를 당합니다. 특히 회펠과 어느 폴란드 사람은 거의 목숨을 잃을 정도로 끔찍한 고문을 당합니다. 나치는 수인들을 협박하기 위하여 한 사람을 본보기로 살해합니다. 그럼에도 문초를 당하는 사람들은 끝내 입을 열지 않습니다.
다른 한편 반군이 어느 날 새벽부터 부헨발트로 향해서 진군해 옵니다. 이러한 소식을 접한 독일 군인들은 경악에 사로잡힌 채 소스라치게 놀랍니다. 이로 인하여 독일 장교들의 회의가 일립니다. 그들은 죄수들을 처벌하는 일에 있어서 제각기 다른 의견을 내세웁니다. 수용소장 클루티히는 아이를 통해서 불법적인 조직을 찾아내었다고 굳게 믿습니다.
수인들을 하나씩 처형하면, 거사에 관한 진상을 모조리 알아낼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에 반해서 독일군 사령관 슈발은 이후에 이루어질 전범 재판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죄수들을 대대적으로 학살하는 데 반대합니다. 독일 장교의 회의가 끝난 뒤부터 수인에 대한 심문의 강도는 약화됩니다.
수인들의 마음속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생존하리라는 실낱같은 희망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처형당한 뒤에 죽느니, 차라리 거사를 앞당기고, 수용소를 탈출하는 게 낫다고 믿습니다. 4월의 어느 날, 다시 말해서 거사가 일어나기 하루 전날 강제수용소의 수인들은 순간적으로 해방감을 맛봅니다. 수용소를 지키던 나치 군인들이 히틀러의 자살 소식을 접하고 어디론가 도주해버렸기 때문입니다. 수인들은 비록 가족들의 죽음에 고통을 느꼈지만, 이제 목숨을 부지했다는 안도감을 느낍니다. 그들은 아이를 어깨에 맨 채 수용소의 연병장을 빙빙 돌면서 승리의 노래를 부릅니다. 숨어 지내던 아이는 말하자면 저항 운동의 상징과 다를 바 없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소설의 제목은 영웅으로서의 아이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아이의 존재는 소설의 줄거리를 이어나가고, 외부적 사건의 시발점으로 작용합니다. 게다가 그것은 우리에게 어떤 양자택일의 근본적인 문제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한 아이의 생명을 위해서 자발적으로 행동해야 하는가, 아니면 조직의 계획을 실천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우선인가? 하는 물음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러한 양자택일의 문제는 우연하게 나타난 정치적 사건으로 인해서 그냥 해체되고 맙니다. 그렇지만 아이는 최소한 수인들의 도덕성을 강화하는 데 커다란 도움을 주었습니다. 아이의 존재는 묘하게도 공산주의자들이 파시스트에 대항해서 싸우는 동안 하나의 심리적 자극제로 작용한 셈입니다.
작가는 지나간 독일의 더러운 역사를 이른바 수용소라는 몰골로 비유하려 했습니다. 그렇지만 수많은 인명 피해에 대해 누가 과연 책임이 있는지, 파시즘이 어떠한 전제조건 하에서 탄생했는지 등에 관해서 신랄하게 추적하지 않습니다. 바로 이러한 까닭에 소설은 오늘날의 시각으로 고찰할 때 피상적 사건에 대한 생생한 묘사 그 이상의 의미를 전해주지 않습니다. 이러한 비판은 소설 속의 고문 장면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고문은 너무나 끔찍하지만, SS대원들의 개인적 사악함으로 귀결되고 있다는 점에서 파시즘의 본질을 분명하게 꿰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은 박진감 넘치며, 독자에게 긴장감을 불러일으킵니다. 사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아이는 나중에 폴란드인 슈테판 예르치 츠바이크라는 자로 밝혀졌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작품은 전쟁의 근본적 원인 그리고 파시즘의 정체 등을 파헤치지 못하고 있지만, 파시즘 전쟁에 대한 생생한 증언을 들려준다는 점에서 약간의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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