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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박: 카프카의 '학술원을 위한 보고' (1)

필자 (匹子) 2022. 3. 15. 16:42

(1) 연구하기 껄끄러운, 그러나 독창적인 카프카 문학: 친애하는 B, 오늘은 프란츠 카프카 (Franz Kafka, 1883 - 1924)의 단편 소설 한 편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남한의 카프카 연구는 지금까지 활발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많은 연구자들이 특정 분야에 집중적으로 모여 있는 경향은 그 자체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연구 대상은 다양화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과거 문화의 지하 갱로 속에 은폐되어 있는, 수준 높은 문학 작품들을 발굴해내는 작업은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나의 연구 목록에서는 카프카 문학이 거의 배제되어 왔습니다. 그렇다고 카프카의 문학에서 더 이상 배울 게 없다고 단언하면, 그것은 큰 오산입니다. 카프카의 문학은 그 자체 신비로운 부정의 문학적 현실을 보여주고 있으며, 전체주의가 횡행하는 오늘날의 삶을 고려할 때 많은 가르침을 전해줍니다. 오늘은 카프카의 단편 「학술원을 위한 보고 (Ein Bericht für eine Akademie)」를 다루어보고자 합니다.

 

(2) 원숭이, 인간의 말을 배우다: 「학술원을 위한 보고」는 1917년 5월에 집필되었으며, 바로 이 해에 마르틴 부버 Martin Buber가 간행하는 잡지, “유대인 Der Jude”에 처음으로 게재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1919년 카프카 자신의 소설집 『시골 의사』에 재수록되었습니다. 작품의 판본은 여러 가지로서 미완성 초고들이 여러 편 오늘날까지 전해집니다. 주인공은 “말하는 원숭이”입니다. 그의 이름은 “빨간 피터”입니다.

 

놈은 인간의 말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빨간 피터는 어느 학술원에 초대되어 원숭이로 살던 이전 세계에 관해서 보고하고, 학술원 회원들로부터 질문을 받게 된 것입니다. 독자는 그가 자신의 보고를 글로 기술하는지, 아니면 구두로 전달하는가 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또한 독자는 그의 말을 경청하고 있는 회원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분야를 연구하는 자인지 전혀 파악할 수 없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단편은 처음부터 끝까지 빨간 피터의 연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3) 전생의 과거는 기억되지 않는다, 그러나 현재 삶 속에서의 지나간 과거는 결코 망각될 수 없다: 빨간 피터는 맨 처음 학술원 회원들의 질문에 정확히 답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약 5년 전에 그는 원숭이의 세계로부터 등을 돌렸기 때문입니다. 빨간 피터는 지난 몇 년의 세월 동안 인간 세계와 문화에 한층 더 가까이 다가온 것을 감지하지만, 이로 인하여 원숭이로서 살아가던 삶을 더 이상 기억하지 못합니다. 지난 5년 동안 인간의 언어를 배우고,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살아오는 동안에 자신은 유인원의 세계를 벗어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만약 자신이 유인원으로서의 삶이라든가 젊은 시절의 기억을 고수하려고 했더라면, 결코 인간처럼 사고하고 행동하는 것을 배우지 못했으리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빨간 피터는 최소한의 범위 내에서 학술원의 질문에 답할 수 있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 원숭이로 살던 이전 세계에 관해서 아무 것도 기억해내지 못하지만, 원숭이와 인간의 중간 단계, 다시 말해서 원숭이로부터 인간으로 변화되는 과정에 관해서는 약간 말씀드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4) 원숭이 아프리카에서 발견되어 자유를 잃다: 친애하는 B, 한 인간이 두 개의 서로 다른 세계를 경험하는 경우를 가정해 봅시다. 어떤 새로운 세계에 처음으로 발을 들여놓는다면, 그는 과연 이전처럼 그렇게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마치 인간이 천상의 세계를 유추하듯이, 쥐 한 마리가 인간의 세계를 유추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렇다면 어떤 다른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쥐라는 생명체가 과연 새로운 현실에서 이전처럼 자연스럽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카프카의 작품은 이러한 일련의 질문을 떠오르게 합니다.

 

빨간 피터는 학술원 회원들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맨 처음 그는 아프리카의 황금 해안에서 하겐베크 회사의 탐험대와 조우했습니다. 빨간 피터는 두 발의 총을 맞아 쓰러졌는데, 그 후 철창에 갇힌 채 증기선을 타고 독일의 함부르크에 도착했습니다. 철창 속에서 더 이상 밖으로 탈출할 수 없음을 감지합니다. 만일 인간으로 살아갈 수만 있다면, 자신은 마치 철창 밖의 선원들처럼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쳐지나갑니다. 이때 놈은 오로지 자유롭게 살기 위해서 스스로 원숭이로서의 존재를 포기하려고 결심합니다. 그리하여 빨간 피터가 실천하는 것은 인간의 말과 행동을 모방하는 일이었습니다. 이는 그에게 주어진 유일한 탈출구였습니다. 이때 빨간 피터는 “자유”라는 단어를 의도적으로 사용하지는 않습니다.

 

(5) 원숭이, 5년 만에 두발짐승으로 살다: 선원들로부터 빨간 피터는 악수, 침 뱉기, 담배 피우기, 술 마시기 등을 차례로 배워나갑니다. 선박에서 개최된 축제가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놀라운 사건이 발생합니다. 빨간 피터의 주둥이에서 “헬로”라는 단어가 터져 나오는 게 아니겠습니까? 주위 사람들은 원숭이 한 마리가 내뱉는 말에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빨간 피터는 그때부터 주위 사람들로부터 인간의 단어를 하나씩 습득하기 시작합니다. 누군가 그를 함부르크에서 어느 유명한 조련사에게 맡깁니다.

 

빨간 피터는 동물원에서 조련사와 함께 곡예를 배우면서 생활합니다. 그런데 그는 더 이상 동물원에 우두커니 앉아서 사람들이 던져주는 바나나만 먹으며 지내는 수동적인 삶에 싫증을 느낍니다. 다행히 빨간 피터는 곡예단 그리고 버라이어티쇼 단원들과 함께 세계 전역을 돌아다닙니다. 그는 다섯 명의 조련사와 한 조를 이루어 곡예를 벌입니다. 빨간 피터는 시간만 나면 무언가를 배우려고 애를 썼으며, 수년의 세월이 지난 뒤에 유럽 사람들의 평균 수준의 지적 재능에 도달합니다.

 

(6) 겉모습은 유인원이지만, 속은 인간이라니, 이는 과연 믿을 만한가? 빨간 피터는 사람처럼 옷을 걸치며, 비싼 호텔에서 주로 거주합니다. 겉보기에는 원숭이지만, 그는 인간의 언어를 체득했으므로 인간과 거의 동일하게 사고하고, 사람의 오욕칠정을 고스란히 느낄 정도입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빨간 피터는 사회적으로 유명인사가 되었으며, 경제적으로도 부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의 턱은 이전의 원숭이 시절의 그것과는 달리 약간 퇴화되었습니다. 다만 그의 피부에 덮인 가죽 그리고 버라이어티 쇼를 위한 번호 그리고 그의 여자친구 “작은 아직 길들여지지 않은 암컷 침팬지”만이 유인원의 흔적으로 남아 있을 뿐입니다. 빨간 피터는 마치 고루한 속물처럼 살아가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지금까지 전개된 발전 과정 그리고 지금까지의 목표를 되돌아보면, 나는 스스로 만족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해서 자신을 한탄하지도 않습니다.

 

(7) “넥타이 유대인”을 패러디하기 위한 이야기인가? 그렇다면 친애하는 B, 이 작품은 어떻게 해석될 수 있을까요? 첫째로 카프카의 이 소설은 서유럽 유대인의 사회적 동화에 대한 알레고리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특히 작품이 마르틴 부버의 잡지에 간행된 것을 고찰할 때 이러한 해석은 설득력을 지닙니다. 카프카의 친구 막스 브로트 (Max Brod)도 유대주의와의 관련성 속에서 카프카 문학을 해석했지요.

 

프라하에 살던 일부 유대인들은 스스로 서방세계에 동화되어 유럽인으로 살려고 애를 썼습니다. 이들은 지식인 그룹으로서 20세기 초반까지 동유럽 유대인들로부터 소외되어 있었지요. 이들은 지식인들이었고, “넥타이 유대인들 (Krawattenjuden)”이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이들에 비하면 동유럽의 유대인들 (Aschkenasen)은 유대주의라는 고유한 전통을 고수하면서, 부분적으로는 하시디즘과 같은 메시아사상을 추종하고 있었습니다.

 

빨간 피터의 모습은 유럽 사회에 동화되어 신분적으로 상승하려고 의도하는 “넥타이 유대인”을 방불케 합니다. 그는 낯선 삶의 방식을 아무런 비판 없이 받아들임으로써 불과 몇 년 내에 자신의 근원 내지는 유대주의의 고향을 망각한 자에 해당합니다. 이러한 해석은 오늘날까지 설득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8) 예술가로서의 작가의 소외된 존재를 말하려고 했는가? 둘째로 빨간 피터가 예술가로 등장한다는 사실은 무척 의미심장합니다. 이는 카프카 자신의 삶과 관련되는 문제로서 “작가 자신의 존재에 관한 성찰”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가령 카프카 연구가, 발터 조켈 Walter Sockel은 텍스트 속에 담긴 아이러니를 거의 무시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습니다. 즉 「학술원을 위한 보고」 속에는 무엇보다도 관객의 놀라운 호응을 얻는 예술가의 상이 반영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핑어후트 Fingerhut 같은 연구자는 카프카 자신이 (마치 베를린의 낭만주의 작가 E. T. A. 호프만 E. T. A. Hoffmann처럼) 낮에는 사무실에서 직장 생활을 영위하고 밤에는 창작에 몰두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빨간 피터는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서 자신의 원래의 삶을 포기하고, 천박한 군중 앞에서 자신의 얄팍한 재주를 자랑하는 대중 예술가의 아양 떠는 행위를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이는 핑어후트에 의하면 자신의 존재를 타인에게 팔아먹는, 이른바 매춘 행위나 다를 바 없습니다. 따라서 빨간 피터는 예술가의 진정한 예술 작업으로서의 유인원의 삶을 포기했다는 이유만으로 비난 받아야 마땅하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