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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박: 로베르트 무질의 '세 여인' (1)

필자 (匹子) 2022. 1. 7. 16:46

 

(1) 무질과 세 여인: 친애하는 P, 오늘은 오스트리아 출신의 소설가, 로베르트 무질 (Robert Musil, 1880 - 1942)의 소설, “세 여인 (Drei Frauen)” (1924)에 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원래 이 소설은 전통적 형식에 입각하여 집필된 세 편의 독립된 소설인데, 나중에 비평가들에 의해서 “하나로 통합된 장편”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리기아” (1921), “포르투갈 여인” (1923), “통카” (1922) 등이 바로 그 세 편의 소설입니다.

 

첫 번째 작품의 “그리기아”는 농사짓는 여인이고, 두 번째 작품의 “포르투갈 여인”은 귀족이며, 세 번째 작품의 “통카”는 회사 직원으로 일하는 여인입니다. 이들은 주어진 삶에서 제각기 남자의 운명을 좌우하게 됩니다. 여기서 무질은 개인의 자기 동일성의 근원을 파헤치려고 세밀하게 서술합니다. 외적 현실은 하나의 틀에 불과합니다. 무질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해명되지 않은 무엇, 즉 내적 현실에 대한 서술,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2) 소설의 중요한 제재로서의 무의식: 친애하는 P, 인간의 무의식 그리고 그것이 깊이 개입하는 인간 삶의 내면을 파헤치는 것은 무질 소설의 핵심적 주제입니다. 가령 인간의 감성 영역, 심리적 공간은 외부적 세계에서는 쉽사리 눈에 띄지 않습니다. 그것은 개개인의 마음 그리고 두뇌 공간 속에 자리하는 중요한 것이지만, 실제 현실에서는 지엽적인, 중요하지 않는 무엇으로 치부되기 마련입니다.

 

이를테면 작가는 “어린 퇴를레스의 혼란” 그리고 대작 “특성 없는 남자”에서 이러한 내용을 초지일관 추적해 나갔습니다. 현대 소설에서 무의식이 중요한 제재로 원용된 시점은 19세기 후반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가령 우리는 무질 외에도 제임스 조이스 (1882 - 1941), 프란츠 카프카 (1883 - 1924), 마르셀 프루스트 (1871 - 1922) 등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입니다.

 

(3) 무의식, 그것은 의식이라는 빙산 아래에 출렁거리는 대양이다: 친애하는 P, 당신은 스스로 공명정대하고 정확하게 판단하며, 스스로 인격적으로 훌륭하다고 생각하고 있는지요? 그러나 그것은 선입견입니다. 당신은 나와 마찬가지로 무의식의 대양 속에 휩쓸린 물방울 하나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이성을 지닌 존재라고 공언하지만, 내면을 조종하는 주체가 무의식의 에너지임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가령 조이스는 “율리시즈”에서 불과 몇 시간 사이에 발생하는 사건들을 두터운 장편 소설로 형상화했습니다. 그는 한 인간의 의식의 저변에 도사린 사고의 편린들을 무의식의 약탕 위에 올려서 부글부글 끓였다고나 할까요?

 

카프카는 어떤 인식되지 않는 세계를 하나의 성 (城)으로 설정하고, 이를 가장 세밀하고 과학적으로 묘사하려고 했습니다. 마르셀 프루스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고향의 어느 알 수 없는 냄새에 의존하면서 유년의 망각된 기억을 추적해나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억은 두 말할 나위 없이 무의식의 영역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무질 역시 “특성 없는 남자”에서 한 인간의 내면적 세계를 밝혀나가려고 시도했습니다.

 

 

(4) 처자를 저버리고 새 여자 사귀기: “그리기아”부터 차례로 살펴보기로 합시다. 소설의 첫 부분에는 호모라고 불리는 장년의 남자가 등장합니다. 그는 모든 의무감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습니다. 가족이란 그의 눈에는 마치 자신의 어깨를 내리 누르는 짐짝으로 비칩니다. 마침내 호모는 아내와 아이를 저버립니다. 혼자 살더라도 인간은 직장을 필요로 합니다. 호모는 광산 회사에서 일하기 위해서 베네치아 근처의 고원지대로 향합니다.

 

(친애하는 P, 남한에서는 처자를 저버리고 어디론가 훌쩍 떠나는 남자는 무책임한 가장으로 비난당하곤 합니다. 처자를 저버리고 잠행하는 일 - 서양 사람들 역시 이를 좋은 행동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비난의 강도에 있어서는 동양보다는 약한 편입니다. 그 까닭은 서양인들이 의무의 삶보다는 자유의 삶을 중시하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호모는 그곳에 살면서 그리기아를 사귀게 됩니다. 그리기아는 근처에서 농사지으면서 살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상대방에 대해 애정을 느낍니다. 호모는 조화로운 자연 풍경을 대하면서, 평온을 찾습니다. 그리기아 역시 호모와 함께 지내는 것을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5) 비극적 사건은 행복의 양념인가?: 친애하는 P, 그렇지만 호모의 마음 한구석에는 처자의 상이 여전히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행복의 순간에도 버림받은 처자를 문득 떠올리고 남몰래 눈물을 흘립니다. 어느 날 한 가지 사건이 발생합니다. 호모는 광산 근처의 어느 낡은 지하통로에서 그리기아를 애무하고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지하 통로의 입구에 어느 남자의 그림자가 보이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는 그리기아의 남편이었습니다.

 

바람기 많은 남편은 많은 술집 여자와 교우하면서도, 아내에게 정조 지키기를 강요해 왔습니다. 최근에는 집으로 발 들여놓지 않아서, 그리기아는 고독하게 혼자 농사지으면서 살아왔던 것입니다. 그는 거대한 바위를 굴려 지하 통로의 좁은 틈을 막으려고 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리기아는 절망에 사로잡힌 채 흐느껴 울면서, 남편에게 하소연합니다. 오로지 어두운 공간을 벗어나겠다는 일념 하에서 남편이 제시하는 모든 약속에 동의합니다.

 

(6) 남아있는 마지막 죽음: 소설의 마지막은 지극히 절망적인 죽음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러한 소란의 와중에서 호모는 일순간 피곤함을 느끼고, 자리에 누워서 잠이 듭니다. 오래 전부터 기력이 쇠약해진 터라 조만간 목숨을 잃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반시간 후에 깨어나니 그리기아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어느새 지하 통로의 틈을 빠져나갔던 것입니다.

 

아마도 그녀는 남편의 강요에 의해서 불행한 결혼 생활을 지속할지 모릅니다. 어떤 말 못할 상실감과 비애가 호모에게 엄습합니다. 차라리 그리기아를 데리고 어디론가 함께 도망쳐 버릴까? 이는 경제적 이유 때문에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렇다고 호모로서는 처자에게 되돌아가고 싶지도 않습니다. 소설은 광산 회사가 채광 사업의 중단을 결정하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로베르트 무질의 생가

 

(7) 외로운 여인 (Die grüne Witwe): 두 번째 작품은 현실과 비현실이 마구 교차되는 과정을 그대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실제와 가상은 서로 교차되고, 용해되고 있습니다. 편력기사 케텐은 아름답고 젊은 여인을 아내로 맞아들입니다. 그미의 고향은 푸른 바다가 보이는 포르투갈의 항구 도시인데, 케텐은 그녀를 트리엔트 근처의 고적한 성으로 데리고 옵니다.

 

그러나 케텐은 항상 출타중입니다. 결혼한 뒤부터 그는 못된 짓을 일삼는 강도로 돌변하게 된 것입니다. 그는 거의 일 년에 한 번씩 집을 찾아옵니다. 아내가 두 명의 아이를 낳았는데도 케텐은 아이들의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합니다. 포르투갈 여인은 낯선 환경에서 순응하며 살아가지만, 남편의 존재는 예나 지금에나 여전히 낯선 존재입니다. 그미는 활기 있는 삶 그리고 마력적인 풍습 등을 좋아하지만, 남편은 비밀과 정적을 즐기는 편이었습니다.

 

(8) 어느 맑게 갠 날 아침 갑자기 찾아온 옛 친구: 자신의 정적 (政敵)인 트리엔트 주교가 죽었을 때, 케텐의 거친 심성은 순간적으로 사라집니다. 마치 한 마리의 벌에 쏘인 듯이 힘이 빠지는 것이었습니다. 케텐은 서서히 죽음을 기다리는 신세로 전락합니다. 그리하여 아내에게 달려가서 자신을 간호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어느 맑게 갠 날 아침 갑자기 누군가 포르투갈 여인을 방문합니다.

 

방문객은 여인이 청춘 시절에 사귄 적이 있었던 남자였습니다. 이때 케텐은 방문객에게 커다란 질투심을 느끼지만, 침대에 누워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방문객은 포르투갈 여인에게는 그야말로 친구에 불과합니다. 지난 11년 동안 그미는 하루도 빠짐없이 연인 한 사람을 기다려 왔습니다. 고독한 삶을 견뎌내기 위하여 머리속에 하나의 상을 창조하여, 이를 갈구하면서 살아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방문객은 그미의 갈망을 충족시켜주지 못합니다. 한 여자와 두 남자 - 그들은 모두 사랑을 갈구하지만, 상대방에 대해 배타적 태도를 취합니다.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