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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박: 토마의 모랄

필자 (匹子) 2022. 4. 16. 11:36

친애하는 F., 오늘은 바이에른의 작가, 루드비히 토마 (Ludwig Thoma, 1867 - 1921)의 극작품,「모랄 (Moral)」에 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토마의 극작품은 1908년 11월 20일에 베를린의 소극장에서 처음으로 공연되었습니다. 토마는 바이에른 농민들의 기발한 유머를 익살스럽게 표현한 작품을 많이 썼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그를 향토 작가로 단정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몇몇 극작품은 신랄한 정치 풍자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작품들은 겉보기에는 외설적이고 유머러스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바이에른의 향토적 보수주의에 대해 비판적인 메스를 가하려고 의도하곤 하였습니다. 오늘 다루려는 극작품 「모랄 (Moral)」역시 시민 사회의 살고 있는 속물들의 위선적 태도를 노골적으로 비아냥거리고 있습니다.

 

사건은 도시 에밀스부르크에서 발생합니다. 에밀스부르크는 게롤슈타인 공작이 머무는 도시로 잘 알려져 있었습니다. 이곳에는 공무원으로 근무하다가 정년퇴직한 프리츠 베어만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약간 보수적이기는 하지만, 정치적으로 자유주의를 표방하여, 제국의회 의원이 되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베어만은 사람들을 모아서 자신의 집에서 파티를 열곤 하였습니다. 파티의 참석자 가운데에는 시인, 한스 야콥 도블러가 있었습니다. 그는 약 2년 전부터 에밀스부르크에서 거주하고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의 재능에 찬탄을 터뜨리곤 했지요. 도블러는 몇 주 전에 『가련한 한스』라는 장편 소설을 간행했는데,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고 있었습니다.

 

몇몇 손님들이 집을 떠난 뒤에 베어만은 아직 남아 있는 사람들과 자신이 건립한 도시의 미풍양속 위원회에 관해 대화를 나눕니다. 베어만의 옆에 앉아 있던 라우트할스는 몇몇 인간들을 신랄하게 비난합니다. 가령 독문학자 오토 바스너는 현재 횡행하고 있는 도덕이 몰락한 부패한 현실을 증명하기 위해서 포르노 책자를 모으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몇몇 여성들은 라우트할스의 견해를 반박합니다.

 

가령 선량한 편이며, 타인을 배려할 줄 아는 베어만의 아내, 린다, 많은 재산을 지닌, 자유로운 정신의 나이든 부인, 룬트 등은 남정네들의 편협하고도 비굴한 태도에 혀를 내두르며, 남정네들이 자칭 미풍양속의 파수자라고 규정하는 태도를 비판합니다. 가령 룬트 부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공공연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미덕만큼 불쾌한 악덕도 없을 거예요.” 말하자면 스스로 미풍양속을 맹신해야 한다고 공공연하게 부르짖는 사람 치고, 뒤에서 호박씨 까지 않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때 법원에서 일하는 하우저 박사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즉 최근에 경찰은 이상한 살롱을 경영하는 여자 한 명을 체포했다고 합니다. 니농 드 호트비유라고 불리는 프랑스 출신의 여성은 젊은 아가씨들과 함께 살롱을 운영하면서, 많은 남자들을 자신의 집으로 맞아들였습니다. 경찰은 물적 증거로서 니농이 작성한 고객의 명단을 압수했다고 합니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베어만은 무슨 영문인지는 몰라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자신의 흥분을 가라앉히려고 애쓰는 게 아니겠습니까? 사실인즉 누군가가 익명으로 살롱에서 자행되는 불륜을 고발하였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니농이 경찰서로 연행되었는데, 그미의 본명은 “니농 드 호트비유”가 아니라, “테레제 호흐슈테터”임이 밝혀지게 됩니다. 니농은 매춘사업으로 돈 벌기 위해서, 자신이 프랑스 출신의 잘나가는 마담이라고 거짓말했던 것입니다. 경찰 내부에서도 니농의 연행을 놓고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경관, 프라이헤어 폰 짐바흐는 가급적이면 신중하게 사건을 수사한 뒤 혐의자를 연행하자고 주장했으나, 말단 경찰인 오스카 스트뢰벨은 일방적으로 니농을 체포했습니다. 스트뢰벨로서는 경력을 쌓고 싶은 일념에서 살롱을 급습하여, 벌집을 쑤셔대었던 것입니다. 극작가 토마는 미풍양속 위원회의 대화에서 오스트리아의 작가, 카를 크라우스 (Karl Krauss)의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하였습니다. “당신, 잊지 마세요, 스캔들은 항상 경찰이 성급하게 사건을 종결지으려고 하는 순간 시작된다는 것을.

 

스트뢰벨이 호트비유의 살롱을 다시 수색하려고 했을 때, 니농은 거의 확신에 찬 듯이 그에게 일갈합니다. 자신은 친구들의 도움으로 즉시 풀려나서 저녁에 자신의 살롱을 열게 되리라고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트뢰벨은 니농과 젊은 여자들을 경찰서로 연행해 갑니다. 니농은 말단 경찰 스트뢰벨이 자신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경찰이 자신의 방으로 들이닥쳤을 때, 그미는 어느 유명인사를 자신의 장롱에 숨겨두었다고 했습니다. 그가 누구인지 밝힐 수는 없다고 했습니다. 살롱에서는 사람 이름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때 스트뢰벨은 몹시 화를 내며, 심문을 종결지으려는 순간, 베어만이 경찰의 취조실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베어만은 모든 사건 진행을 종결지으라고 요구합니다. 도시의 유지와 같은 막강한 권력자인 베어만이 그렇게 명령조로 말했을 때, 말단 경찰은 몹시 당황해 합니다. 심문이 계속되면, 지배 계층의 체면은 엉망이 된다고 베어만은 말합니다.

 

놀랍게도 베어만은 미풍양속 위원회의 목표를 경찰에게 전합니다. 즉 “쉽사리 자신의 고삐를 상실할 정도로 방종하게 변하는 하층민들의 부도덕함에 대항하기 위함”이 위원회의 목표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상류층은 돈으로 무슨 작태든 마음대로 저지를 수 있지만, 하류층은 미풍양속이라는 관습, 도덕 그리고 법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권위가 상실되면, 대중들은 돈 많은 상류층에 대한 존경심을 더 이상 지니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트뢰벨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습니다. 그는 물적 증거로서 니농이 고객 명부로 사용하던 일기장 한 권을 보여줍니다. 베어만은 자신의 이름이 고객 명부에 적혀 있다는 것을 감지합니다. 그는 말단 경찰에게 전화를 걸어서 고객 명부를 자신에게 건네 달라고 요구합니다. 경찰 당국에는 도둑맞았다고 보고하면 족하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베어만은 마침내 고객 명부를 차지하여, 그곳을 빠져 나갑니다.

 

베어만이 떠나고 난 뒤에 스트뢰벨은 다른 증거들을 살핀 다음, 수색 당시에 장롱에 숨어 있던 사람이 누구인지를 마침내 알아차리게 됩니다. 그는 다름 아니라 황태자 에밀이었던 것입니다. 이 순간 어안이 벙벙해진 말단 경찰은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바로 이때 경찰 서장이 스트뢰벨의 사무실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서장은 보토 슈메타우 남작을 대동하고 있었습니다. 남작은 황태자를 모시는 군인으로서 막강한 권력을 지닌 귀족이었습니다.

 

사실인즉 슈메타우 남작 역시 수색 당시에 황태자와 함께 팬티 차림으로 장롱 속에 숨어 있었던 것입니다. 남작은 사건을 없었던 것으로 마무리 지으라고 강요합니다. 만약 사민당의 신문사가 내막을 알게 되면, 무척 곤란해지니, 스트뢰벨 자신이 모든 것을 책임지고, 사태를 수습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날 저녁에 린다 베어만은 남편이 더 이상 미풍양속 위원회의 일을 추진하지 말 것을 요구합니다. 그미는 남편이 비밀리에 홍등가에 들락거린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남편이 겉 다르고 속 다른 태도로 미풍양속 위원회의 일을 계속하면, 자신과 남편의 명예에 흠집이 나는 것은 자명했던 것입니다. 독문학자 오토 바스너는 자신이 경찰에 비밀리에 투서를 보냈다고 고백합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스트뢰벨이 등장하여, 사건의 진행 과정을 설명합니다. 즉 그는 비밀리에 니농에게 살롱의 권리금을 챙겨서 도시를 떠날 것을 권고했는데, 니농은 이러한 제안을 거절하고, 경찰 당국에 피해 보상금을 요구했다는 것입니다. 이때 우스꽝스러운 일이 벌어집니다. 베어만은 황태자의 탈선을 묵인하는 대가로 미풍양속 위원회에서 모은 자금인 15.000 마르크를 니농에게 건네줍니다.

 

토마가 작품을 집필하게 된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는 1904년 10월 25일에 페터 슐레밀이라는 가명으로 「라인 강가의 쾰른에 있는 미풍양속 설교자에게」라는 시를 잡지 『짐플리치시무스 (Simplicissimus)』에 발표했습니다. 이 작품에서 토마는 쾰른 주변의 미풍양속 위원회의 기이한 사업을 신랄하게 비아냥거렸는데, 이로 인하여 슈타델하임의 관청은 토마에게 6주 동안의 구금 형을 내렸습니다. 토마는 1906년 10월 16일에 옥살이해야 했습니다.

 

바로 이 무렵 그는 우스운 극작품 한 편을 집필하려고 결심했고, 이로써 탄생한 것이 바로 이 작품입니다. 작품의 원래 생각해낸 제목은 “사랑과 결혼에 관하여”였습니다. 토마는 작품을 쓰기 위해서 스웨덴의 사회개혁 여성인 엘렌 케이 (Ellen Key)의 논문을 참조하였고, 쇼펜하우어의 「도덕의 토대에 관하여 Über die Grundlage der Moral」에 적혀 있는 말씀 “도덕성의 근본적 토대는 연민이다.”는 말을 깊이 숙고했다고 합니다.

 

친애하는 F, 마지막으로 니농 드 호트비유의 이국적 여성에 관해서 당신에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니농은 토마와 결혼한 이국적인 여성을 연상시킵니다. 토마는 1905년에 베를린의 카바레에서 필리핀 출신의 무희인 마리아 트리니다드 델라 로사 (1880 - 1966)를 알게 되었습니다. 당시에 토마는 38세의 장년이었고, 마리아는 25세의 여성이었으니, 두 사람은 13년이라는 나이 차이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미는 다비드 게오르크 슐츠라는 남자와 이미 혼인한 사이였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남편을 멀리하고, 루드비히 토마를 사랑하게 됩니다.

 

토마는 마리아를 사랑했습니다. 그는 자신과 결혼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남편과 헤어져야 한다고 마리아를 설득하였습니다. 극작가는 이혼을 성사시키기 위해서 15.000 마르크를 지불해야 했습니다. 루드비히 토마와 마리아는 1907년에 결혼했으나, 두 사람은 불행하게도 4년 후인 1911년에 헤어졌습니다. 상기한 내용은 토마의 사생활입니다. 그렇지만 작품에 드러나고 있는 남녀의 비 인습적인 관계는 극작가와 마리아의 관계와 결코 무관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