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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박: 베데킨트의 "죽음의 춤"

필자 (匹子) 2022. 3. 3. 09:27

프랑크 베데킨트 (1864 - 1918)의 세 장면으로 이루어진 단막극, 「죽음의 춤」은 1905년에 씌어져, 잡지 “횃불 (Fackel)”에 발표되었다. 이 작품은 1906년 뉘른베르크에서 처음으로 공연되었다. 원래 베데킨트는 이 작품을 “메피스토의 죽음” 혹은 “메피스토의 죽음의 투쟁” 등으로 명명했으나, 1909년에 세 번째 판에서는 스트린드베리 (Strindberg)의 작품 제목처럼 「죽음과 악마 (Tod und Teufel)」라는 제목으로 바뀌기도 했다. 베데킨트는 작품의 부제로서 “세 장면”이라고 명기했는데, 이는 특이하다. 「죽음의 춤」은 「소 극단 가수 (Kammersänger)」라는 극작품의 틀을 위해서 집필된 것이다. 1905년만 하더라도 단막극은 무척 드문 것이었다. 따라서 이 작품은 공연 후에는 검열 당국의 격렬한 간섭에 시달려야 했다.

 

작품의 주인공은 여성 옹호주의자 엘프리데 폰 말후스이다. 엘프리데는 “인신 매매에 투쟁하는 국제 연맹”에서 열성적으로 일하는 당원이다. 그미는 홍등가에서 일하는 창녀들을 해방시키려고 그곳으로 향한다. 어느 처녀가 인신매매에 관한 엘프리데의 책을 읽고, 매춘 사업에 띄어들었는데, 엘프리데는 처녀 부모의 애 타는 요구로 인하여, 처녀를 사악한 맹금의 발톱으로부터 해방시키려는 것이다. 엘프리데를 가로막는 자는 사랑 사업의 매니저이자, 뚜쟁이인 마르키스 카스티 피아니이다. 마르키스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사기꾼으로서, 세상을 시니컬하게 바라보는 남자이다. [마르키스 카스티 파아니는 베데킨트의 「판도라의 상자」에서 이미 등장한 바 있다.]

 

첫 장면에서 사건은 마르키스와 엘프리데 사이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두 사람 사이의 대화는 오로지 어떤 극적 상승을 유도하는 막간극에 의해서 중단될 뿐이다. 마르키스는 처녀 매매에 격렬히 반대하는 엘프리데의 태도를 비정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 즉 그미의 태도 속에는 근엄함이 자리고 있으나, 이러한 근엄함은 이른바 인간적 충동을 승화시키려는 병적 증상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이로써 작가 베데킨트는 극적 승화의 형태를 통해서 자신의 입장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마르키스 카스티 피아니는 시민주의의 성도덕 속에 도사리고 있는 모순을 예리하게 발견한다. 주지하다시피 시민주의의 성도덕은 여성에 대한 억압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엘프리데가 관여하는 일은 마르키스에 의하면 지엽적인 것이라고 한다. 매춘 여성을 해방시키는 일보다 더 중요하고 시급한 사업은 시민 사회의 도덕 자체를 파괴시키는 일이라고 한다. 이는 극작가, 베데킨트의 입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

 

마르키스는 엘프리데의 비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약 당신이 당신의 불행한 여성의 억압에 대해서 투쟁하려면, 당신은 무엇보다도 시민 사회를 우선적으로 비난해야 합니다.” 여성의 자연적 권리는 마르키스에 의하면 남성 중심주의적 사회에 의해서 억압되고 있다고 한다. 마르키스는 결혼이라는 토대를 무엇보다도 이윤을 추구하는 시민들의 사고 가운데 가장 기본적인 규칙이라고 여긴다.

 

“한 여자와 함께 사는 한 남자는 여자 없이 혼자 사는 남자보다 경제적으로 막강해요. 또한 그는 두 명 혹은 세 명의 여자를 먹여 살리는 남자보다 경제적으로 더 막강합니다. 바로 이 사실이 결혼의 시금석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독신 남자는 결혼한 남자보다도 씀씀이가 클 수밖에 없다. 시민 사회에서 그의 사랑은 그저 돈으로 해결될 뿐이다. 시민주의 남성 사회에서 첩을 둔다는 것은 그 자체 부를 상징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마르키스는 시민 사회의 억압된 사랑의 삶을 철저히 혐오하면서, 순수한 감각적 향유를 행복의 가능성으로 파악한다.

 

마르키스와 엘프리데의 대화는 막간극에서 첨예하게 대립된다. 막간극은 시적인 다른 현실로 이전된 영역에 해당하는데, 여기서는 두 사람의 갈등이 다시금 거론되고 있다. 어쩌면 베데킨트는 막간극을 드라마 구상의 핵심 사항으로 단언했는지 모른다. 엘프리데가 찾는 젊은 여자는 리시스카 (Lisiska)이다. 그미는 홍등가의 손님인 왕과 함께 나타난다. 무대의 측면에는 마르키스, 엘프리데가 은밀하게 등장 인물들을 엿보고 있다. [대화를 통해서 엘프리데는 마르키스의 견해에 의해 설득 당한 채, 마치 메피스토펠레스와 같은 그의 비아냥거림에 대해 감탄하고 있다.] 극적인 막간극은 엘프리데와 마르키스 등이 처음에 내세우던 견해를 제각기 번복하게 작용한다.

 

마르키스는 “자신의 고유한 냉소주의에 대한 내적 필연성을 견지하”고 있는데, 그저 쾌락을 추구하는 자신의 철학이 얼마나 공허한지 깨닫게 된다. 막간극에서 리시스카는 다음과 같이 토로한다. “왜냐면 지옥 같은 충동만이 머물고 있었지/ 기쁨 대신에 남아 있는 것은 충동 뿐이니까.” 리시스카의 전언은 홍등가 내의 황량한 삶을 암시하고 있는데, 이는 마르키스의 견해를 거대한 정도로 반박하기에 충분하다. 베데킨트에 의하면 등장인물, 리시스카는 다음과 같은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즉 (돈 주고 사랑을 교환하는) 불행한 희생이 중시되고 있는 한에서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감각적 향유 불가능하거나 무가치할 뿐이라는 게 바로 리시스카가 관객에게 전하는 기능이다. 이에 반해서 엘프리데는 모든 쾌락을 포기하라는 자신의 철학이 근본적으로 인간의 열정 해결에 대한 해답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는다.

 

세 장면의 구조는 -이전에 쓴 극작품, 「소극단 가수」와 유사하게- 대화 중심으로 구상된 것이다. 상황을 시사해주는 발단을 제외한다면, 「죽음의 춤」에서는 환상을 유발하는 극적 행위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대신에 주인공, 두 사람이 상대방을 향해 움직이는 모습이 재현되고 있을 뿐이다. 주인공 두 사람은 특히 같은 문장을 반복해서 사용한다. 이로써 두 사람의 논쟁은 우스꽝스럽게 서로 대비되고 있다. 베데킨트는 무대의 배경은 르네상스의 이탈리아로 설정하고 있다. 이로써 극작가는 19세기말에 유행하는 천박한 고전적 사조를 풍자하려고 했다. 당시 사람들은 르네상스 시대의 생명 예찬의 경향을 답습하려고 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