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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박: 로베르트 무질의 '세 여인' (2)

필자 (匹子) 2022. 1. 7. 16:46

(8) 어느 맑게 갠 날 아침 갑자기 찾아온 옛 친구: 자신의 정적 (政敵)인 트리엔트 주교가 죽었을 때, 케텐의 거친 심성은 순간적으로 사라집니다. 마치 한 마리의 벌에 쏘인 듯이 힘이 빠지는 것이었습니다. 케텐은 서서히 죽음을 기다리는 신세로 전락합니다. 그리하여 아내에게 달려가서 자신을 간호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어느 맑게 갠 날 아침 갑자기 누군가 포르투갈 여인을 방문합니다. 방문객은 여인이 청춘 시절에 사귄 적이 있었던 남자였습니다.

 

이때 케텐은 방문객에게 커다란 질투심을 느끼지만, 침대에 누워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방문객은 포르투갈 여인에게는 그야말로 친구에 불과합니다. 지난 11년 동안 그미는 하루도 빠짐없이 연인 한 사람을 기다려 왔습니다. 고독한 삶을 견뎌내기 위하여 머리속에 하나의 상을 창조하여, 이를 갈구하면서 살아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방문객은 그미의 갈망을 충족시켜주지 못합니다. 한 여자와 두 남자 - 그들은 모두 사랑을 갈구하지만, 상대방에 대해 배타적 태도를 취합니다.

 

(9) 어느 환시자의 꿈: 기적은 고양이 한 마리의 등장으로 실제로 출현하는 것 같습니다. 어느 날 창포병에 걸린 작은 고양이 한 마리가 대문 앞에 서성거리고 있었습니다. 포르투갈 여인은 문을 열어주고 고양이를 안으로 들여놓았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미의 행동이었습니다. 그미는 고양이를 마치 자신의 연인이라도 되는 듯이 정겹게 포옹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다음부터 그미는 고양이를 치료하고, 애지중지 보살핍니다. 성의 하인들의 눈에는 포르투갈 여인이 정신 나간 사람으로 비칩니다. 하인들은 끝내 그 고양이를 살해해 버립니다. 그렇게 하면 여주인이 제 정신을 차리리라고 섣불리 판단했던 것입니다.

 

(10) 고통의 객관적 상관물로서의 고양이: 고양이가 죽자, 포르투갈 여인은 임이 떠나갔다고 생각하며, 더욱 침울하게 변합니다. 그러나 그미만이 자신의 임을 고양이와 동일시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병든 케텐 그리고 방문객은 고양이를 때로는 자신의 임으로, 때로는 자신의 연적 (戀敵)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한편으로는 고양이를 못내 사랑하면서도, 포르투갈 여인으로부터 사랑 받고 있던 고양이에 대해 질투심을 느껴왔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고양이는 일종의 객관적 상관물로서의 존재였습니다. 즉 고양이는 한편으로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 스스로 고통 받으며 살아가는 연인이라면,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연인을 독차지하는 연적이었던 것입니다.

 

케텐은 스스로 고양이의 운명에 동참할 수 없다고 말하며, 아무도 오르지 못하는 암벽을 타고 산위로 올라갑니다. 신이 내린 운명적 싸움에 도전한 그는 마침내 승리했다고 믿습니다. 그 이후 케텐은 아내의 침실로 살그머니 들어갑니다. 그는 아내가 방문객과 동침한다고 지레 짐작하고, 그를 살해하려고 결심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내는 혼자 평온하게 잠들어 있었습니다. 케텐은 안도의 미소를 지으며 잠을 청합니다. 다음날 아침 하인들은 방문객이 하루 전에 성을 떠났다고 보고합니다.

 

오스트리아의 빈에 있는 그의 거주지 무질은 1921년부터 1936년까지 이 집에 거주하였다.

 

(11) 사랑을 가로막는, 신분이라는 장벽: 친애하는 P, 세 번째 작품 “통카”는 가장 감동적 내용을 지니고 있습니다. 특히 무질은 자신의 첫사랑의 체험을 문학적으로 훌륭하게 형상화했습니다. 통카는 단순하지만 무척 아름답고 꿈 많은 처녀로서, 섬유 회사의 판매 담당 직원으로 일하면서 살아갑니다. 회사에서 일하는 젊은 학자를 만나, 그에게 뜨거운 연정을 품습니다. 섬유회사는 학자의 아버지 소유였습니다. 젊은 학자는 그미의 “천한” 신분을 알면서도 그미를 받아들입니다. 그미는 학자의 할머니 집으로 가서 살게 됩니다. 젊은 학자는 통카를 그다지 귀중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때로는 욕정의 대상, 때로는 하녀에 불과했습니다. 물론 애호의 감정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한번도 결혼 대상으로 생각한 적이 없었습니다.

 

(12) 부자들을 사악하게 그리고 빈자들을 선량하게 만드는 것은 오로지 돈인가?: 통카는 천성이 고우며, 과묵하고, 인정이 풍부한 여자였습니다. 그미는 학자의 “진심으로 사랑해”라는 감언이설을 곧이곧대로 믿을 정도였으니까요. 조만간 개최될 웨딩마치에 그미는 마냥 즐거울 뿐이었습니다. 그렇기에 “할머니 집에서 동거하자”라는 학자의 권고를 거절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할머니는 학자의 가족들 가운데 유일하게 통카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할머니의 집은 마치 궁궐과 같았습니다. 값비싼 가구 그리고 으리으리한 응접실 등은 그미가 한 번도 접해보지 못한 것들이었습니다. 갑자기 생활환경이 바뀐 데 대해 통카 자신도 몹시 놀랍니다. 학자 집안의 사람들이 교우하는 자들 역시 고위층에 속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격식 차리기를 좋아하고, 고상한 언어를 선호하고 있었습니다. 학자의 친척들은 그미를 “높은 지위의 남자를 꼬드겨, 재산을 탐내는 천한 여자”라고 지레 짐작하지만, 나중에는 그러한 생각을 바꾸게 됩니다. 통카의 단순하고도 선량함 때문이었지요.

 

(13) 이별 이후에 느끼는 때늦은 사랑: 친애하는 P, 소수의 인간은 어리석게도 임의 고결함을 제때에 인식하지 못합니다. 임이 가까이 있을 때 우리는 임의 소중함을 망각하곤 하니까요. 임을 애타게 그리워하는 자들 가운데에는 임을 그냥 차버린 눈먼 인간들이 많습니다. 젊은 학자 역시 그러했습니다. 그에게서 사랑의 감식 능력을 빼앗아간 것은 무엇보다도 신분 차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참고로 말하건대 때늦은 사랑의 슬픔과 아쉬움을 문학적으로 감지하려면, 당신은 셰익스피어 (Shakespeare)의 극작품 “겨울이야기 (Winter tale)”를 읽어보기 바랍니다.)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통카는 학자를 떠나 그녀의 이모 집으로 떠나려고 합니다. 불쌍한 통카는 할머니가 죽은 뒤에야 비로소 자신이 학자에게 아무 것도 아닌 존재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된 것입니다. 소설 속에서 그미의 내면은 상세하게 밝혀지지 않습니다. 당시에 그미가 임신했는지, 그렇지 않는지 독자로서는 알 길이 없습니다.

 

(14) 출산, 죽음 그리고 사랑의 슬픔: 이때 학자의 어느 친구가 나타나서 그미를 도시로 데리고 갑니다. 통카는 어느 누구에게도 부담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친구의 뒤를 따라 나섭니다. 그리하여 그미는 학자 친구의 애인이 됩니다. 1년 후에 통카의 임신 사실은 사람들에게 알려집니다. 이때 젊은 학자는 깊은 고민에 빠집니다. 과연 뱃속의 아이가 자신의 것일까, 친구의 것일까?

 

이러한 고민의 와중에서 그는 지금까지 이기주의적으로 살아왔다는 것을 뼈저리게 후회합니다. 이러한 후회의 감정과 함께 학자의 가슴속에 은은히 다가오는 묘한 느낌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통카에 대한 연정이었습니다. 그러나 통카에 대한 연정은 무척 고통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랑하는 임을 그냥 저버렸다는 양심 그리고 사랑을 인식하지 못한 자신의 우둔함 등과 뒤섞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15) 무심한 자연, 죽은 자들의 들리지 않는 통곡: 친애하는 P, 현대 사회를 지배하는 자들은 여전히 남성입니다. 어쩌면 오늘날에도 수많은 여성들이 통카처럼 그렇게 불행하게 살아가지 않는지요? 통카는 임신한 뒤부터 서서히 원인 모를 병에 시달립니다. 모든 것은 외부적 사건에 의해 발생했지만, 젊은 학자는 어떤 일이 발생하든 간에 그미의 행복을 위해 애쓰리라고 굳게 결심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결심은 아무 짝에도 쓸모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통카는 배가 불러오는 동안 더욱더 병약해지고, 출산한 직후에 안타깝게도 숨을 거두었기 때문입니다. “아기가 과연 누구의 자식일까?” 하는 비밀 역시 죽음과 함께 무덤 속으로 안장됩니다. 젊은 학자는 슬픈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미의 묘지 앞에 서 있습니다. 주위의 정적은 마치 죽은 사람들의 들리지 않는 통곡처럼 느껴집니다. 때는 바야흐로 구름이 무심하게 스쳐지나가는 토요일 오후 세시였습니다.

 

참고로 다음의 문헌을 지적할까 합니다. 황선애: 무질의 『세여인』에 나타난 자연의 문제. 생태 비평적 글쓰기, 실린 곳: 독일문학 그리고 생태주의, 국중광 교수 퇴임기념 논문집, 간행위원회 편, 한신대학교 출판부 2009, 110 - 13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