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동독문학

서로박: 자라 키르쉬의 서정시 (1)

필자 (匹子) 2021. 9. 15. 09:30

 

자라 키르쉬 (1935 -)는 1965년 당시의 남편 라이너 키르쉬와 함께 엔솔로지 "공룡과의 대화 (Gespräch mit dem Saurier)"를 간행했는데, 이를 계기로 처음 시를 발표하였다. 그미는 대학에서 생물학을 공부했고, 1963년에서 1965년 사이에 라이프치히에 있는 요하네스 베혀 연구소를 다녔다. 초기 시의 경향은 새로운 서정적 자아의 일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는 동년배 시인 라이너 쿤체, 귄터 쿠네르트, 폴커 브라운 칼 미켈 등의 작가들이 공통적으로 추구하던 성향이기도 했다. 1965년 이래로 동독 문학의 새로운 서정적 음색은 당 문화 관료들의 저항에 맞서서 자신의 문학적 경향을 관철시켜야 했다.

 

(1) 1970년에 간행된 "시골 체류 (Landaufenthalt)"는 그미의 첫 시집이다. 여기서 표현되고 있는 것은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1. 생존을 위한 용기, 2. 고유한 자신의 경험에 대한 지속적인 성찰, 3. 동독의 경직된 사회 질서 그리고 처음부터 확정되어 있는 사회주의의 덕목 등에 대한 조심스러운 견해 표명 등이 그것들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미가 이 시기에 사회주의 사회에서의 작가의 기능에 대해서 회의감을 표명하지는 않았다. 비록 약간의 비판적 내용이 도사리고 있었지만, 그미는 동독을 서독보다 더 나은 국가라고 생각했다. 1977년 자라 키르쉬가 비어만 추방령의 여파로 인하여 서독으로 이주하기 전까지 [그미는 비어만 추방령에 대해 강력히 항의했다] 자라 키르쉬는 동독에서 여러 혜택을 누리는 인정받던 시인이었다.

 

그미가 묘사하는 풍경 그리고 문학적 장소는 바로 꿈의 풍경이다. 키르쉬는 산업 발전 그리고 문명 등으로 삭막하게 변한 도시의 정경으로부터 고개를 돌리며, 시골 생활의 공간을 상상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주관적인 내적 공간이 역사와 정치의 현실로부터 완전히 무관한 것은 아니다. 「눈 (雪)은 내 도시에 검게 놓여 있다 (Der Schnee liegt schwarz in meiner Stadt)」에서 시인은 눈 아래에 파묻혀 있는 유대인의 묘지를 거론한다. 「어느 날」은 시인이 갈구하는 베트남 전쟁의 종말을 노래하고 있다. 시인은 여기서 일견 개인적 사적인 내용을 묘사하고 있는데, 이는 주제 상으로 보편적인 무엇으로 확장되고 있다.

 

자라 키르쉬의 은유 (메타퍼)는 기계화된 인지 형태, 개인적 경험에 대한 보편적인 무시 등에 대해서 강력히 항의하고 있다. 그미는 간결한 언어 구사를 지극히 의도적으로 행하며, 전통적인 자연시의 특성과는 완강히 대립되는 것이다. 자라 키르쉬는 더 이상 완전하지 않은 자연을 묘사한다. 여기서 우리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파괴적인 관계를 유추할 수 있다. 자연을 인간에 의해 피해당한 공간으로 묘사한 시인으로서 우리는 드로스테-휠스호프, 릴리엔크론, 보브롭스키 등을 들 수 있는데, 키르쉬는 바로 이러한 시적 전통을 그대로 추종하고 있다. 시적 수단으로 사용되는 생기 있는 시어, 압축과 생략의 기법, 행간을 띄운 문장 연결 등은 자라 키르쉬의 이후의 시에서 주도적으로 드러나는 표현 형식들이다.

 

(2) 1973년에 키르쉬는 시집 "마법의 격언 (Zaubersprüche)"을 간행하였다. 그미는 「반박하는 말 (Widerrede)」에서 역사적으로 잊혀진 무엇 그리고 개인으로서의 내밀한 기억 등을 시로써 담고 있다. 언제나 사라지려고 하는 낯선 삶의 순간은 시적 영상으로 훌륭하게 포착되고 있다. 문화적 풍경, 여행의 체험, 고통스러운 순간 그리고 행복의 순간 등이 바로 그러한 내밀한 경험일 것이다. 시인이 시를 쓴다는 것은 그 자체 과거에 겪었던 중요한 체험에 대한 하나의 “일깨움 (Besinnung)”이다. 그것은 결코 상실되지 않은 중요한 행위일 수밖에 없다. 시 작업은 한 번도 의식하지 못한 무엇에 대한 깨달음을 일깨우는 작업이 아닐 수 없다. 시인은 시간의 정체 현상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고, 스스로를 한 명의 비극적인 광대로 간주하고 있다. “처음에는 나의 본성은 근심이 없었고 즐거웠다/ 그러나 내가 본 것은 발의 방향으로/ 향해서 입 밖으로 삐쳐 나왔다.”

 

(3) "등 뒤의 바람" (1976)은 키르쉬가 서 베를린으로 이주하기 1년 전에 비퍼스도르프에 머물다가 집필한 연작시 모음집이다. 비퍼스도르프는 마르크 브란덴부르크 주에 있는 작은 마을이다. 이곳은 아힘 폰 아르님 (Achim v. Arnim)의 고향으로서 구동독 작가들의 작업실로 사용되기도 한 지역이다. 자라 키르쉬는 비퍼스도르프 연작시에서 주로 “시대의 우울”을 문학적으로 형상화시켰다. 시인은 간간이 베티네 폰 아르님의 무덤가에서 타인의 목소리를 빌어, 주위의 암울한 분위기를 시적으로 묘사하였다. “여기서 시의 척도는 비가조이다./ 시제는 과거이며/ 아름다운 발그레한 여자 멜랑코리아는/ 머리 깎인 울타리 사이로 베를 짜고”.

 

(4) "라 파제리" (1980): 1977년 서독으로 이주한 그미의 시는 더욱 사적이고 개인적인 면모를 지니게 되었다. 1983년 이후로 키르쉬는 서독으로의 진출을 위한 과도적 장소로서 주로 슐레스비히-홀슈타인에 머물렀다. "라 파제리 (La Pagerie)"는 여행의 체험을 담은 산문시 모음집이다. 이 시들은 그미가 프로방스에 머물 때 집필된 것들이다. 그것은 일종의 일기 형식으로 씌어져 있는데, 부분적으로는 무척 동화적 요소를 담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서 지속적인 유토피아를 찾을 수는 없다. 그미는 라이너 키르쉬와 이혼하고, 동료 시인 칼 미켈의 아들을 낳았다. 그 후 서독에서 소설가 크리스토프 메켈 (Chr. Meckel)을 사랑한 뒤, 연하의 작곡가 볼프강 폰 슈바이니츠와 동거에 들어갔다. 자라 키르쉬는 이 시기에 달콤한 삶을 보냈다. 그러나 이 시기의 시편들은 유감스럽게도 수준 이하라고 혹평 당했다. 자고로 문학 작품은 고난의 시대에 탄생하니까.

 

(5) "지상의 나라 (Erdreich)" (1982): 1982년에 간행된 시집 "지상의 나라 (Erdreich)"에서는 두 가지 내용이 담겨 있다. 그 하나는 시인의 미국 여행의 체험이 용해되어 있다는 점이다. 시적 자아로서의 “나”는 일상적 삶으로부터 떠나 미국 대륙의 익명적 존재 속에 자신을 잠입시켜 본다. 다른 하나는 “여행의 양식”이라는 연작시에 표현된 동화적이고 아름다운 시적 현실의 상실이다. 특히 자라 키르쉬는 과거의 시인 현대의 시인들, 예컨대 그라베 (Grabbe), 브라운 (Braun), 보브롭스키 등을 인용한다. 자라 키르쉬는 70년대 이후 북쪽 독일 지방의 풍경을 작품 배경으로 자주 도입하였다. “향수로 죽을 생각은 추호도 없다./ 내 머리 속에는 수많은 상이 그칠 줄 모르고 나타난다./ 밝은 상들과 어두운 상들”

 

북독의 풍경은 자라 키르쉬의 고독을 그대로 반영해주는 암호로 작용하고 있다. 추위, 눈, 겨울 산책로, 밋밋한 서리, 자갈 더미 등과 같은 시어는 (시인을 포함한) 현대인들의 고립된 삶에 대한 상징으로 이해될 수 있다. 80년대 말부터 씌어진 자라 키르쉬의 시는 "고양이의 삶 (Katzenleben)" (1984), "눈 (雪)의 열기 (Schneewärme)" (1989) 등에 수록되었다. 키르쉬의 최근작들은 한마디로 “검은 상에 대한 거울 (Spiegel für schwarze Bilder)”이나 다름이 없다. 더 이상 진정한 의미에서 의사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 서방 세계의 일상, 아무도 역사적 진리에 대해 귀 기울이지 않는 무관심, 공동체에 대한 이상은 마냥 추상적 인간의 꿈으로 치부되고 마는 반 유토피아적 시대의 분위기 등을 생각해 보라. 그렇기에 신문에 실리는 여러 사건들은 인간의 경거망동에 불과할 뿐이다. “차라리 고독은/ 오랫동안 나를 기쁘게 한다./ 인간들의 경거망동/ 나의 치가 떨릴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