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동독문학

서로박: 자라 키르쉬의 서정시 (2)

필자 (匹子) 2021. 9. 15. 09:30

자라 키르쉬 (Sarah Kirsch, 1935 -)의 본명은 잉그리트 베른슈타인입니다. 베르슈타인이라는 이름에서 우리는 유대인의 흔적이 엿보입니다. 어쩌면 그미의 집안에 유대인의 피가 섞여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자라 키르쉬의 아버지는 이를 은폐하고 순수 독일인임을 자처했습니다. 나아가 그미의 할아버지는 모든 것을 교회 중심으로 사고하였습니다. 그에게 무신론이란 바로 죄악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시인은 부계 혈통의 어리석은 생각을 징벌한다는 의도에서 자신의 이름을 일부러 유대인 특유의 “자라”로, 성을 “키르쉬”로 달았던 것입니다.

 

자라 키르쉬의 시는 거친 강렬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시인은 매끈한 문장, 조화롭고도 유연한 문체를 사용하는 적이 별로 없습니다. 실제로 작품에 나타나는 것은 호흡이 차단되는 간결한 어투입니다. 키르쉬의 문학은 이렇듯 거칠고 생명력 담긴 어투를 통하여 독자의 자연스러운 독서를 방해 하려고 의도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롤프 미하엘리스 (R. Michaelis)는 자라 키르쉬의 시를 “반항적인 비가”라고 명명하였습니다. 우리는 키르쉬의 시에서 놀라울 정도의 생생한 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일상생활에서 얻을 수 있는 것과는 대립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곱 번째 날에도 비가 온다 Aber es regnet den siebten Tag

이때 나는 눈썹 끝까지 화를 내고 있다 Da bin ich bös bis in die Wimpern

고양이처럼 씩씩거린다 거리는 비어있다 Ich fauche mir die Straße leer

정직한 비둘기 사이에 내려앉는다 Und setz mich unter ehrliche Möven

 

자라 키르쉬는 현대 독일 시에서 나타나는 극단적인 압축을 선호하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자는 키르쉬의 시에서 어떤 침묵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가령 가음과 같은 구절을 생각해 보세요. “이번 겨울에 나는 하나의 집을 필요로 한다/ 나는 거주하려고 한다, 서로 다른/ 방들은 서로 다른 창문들과/ 전혀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 가끔 키르쉬는 자신의 사적인 고통스러운 체험을 시구 속에 담고 있는데, 독자는 이를 어느 정도 분명하게 간파할 수 있습니다.

 

만약 그대가 나에게 벗어나서

다른 아름다운 여자를 더욱더

좋게 여긴다면, 나를 모래 폭풍 속으로

향하게 하면 나의 눈과 귀를 차단시키고

내 손이 아무 것도 만지지 못하도록 피부를

먼지 속에 거의 썩게 한다 하더라도

나는 결코 너를 떠나지 않겠다.

 

나는 다른 나날을 기다린다 어리석게

기다리는가? 그대의 후회를, 내일이 되면

화장한 그미는 그대를 저버리고

그대는 문 앞에서 급히 빗장을 당기리라고!

 

Wenn du dich meiner

entledigen willst, eine andere Schönheit

vorziehst, mich in den Sandsturm

schickst daß mir Hören und Sehen vergeht

meine Hände nichts fassen die Haut

im Staub fast erstickst

will ich dich längst nicht verlassen

 

Ich warte auf andere Tage warte

töricht? auf deine Reue, schon morgen

setzt die vorgezogne Geschminkte

du vor die Tür ziehst eilig den Riegel!

 

고독, 고독을 어렵사리 견뎌내기, 진정한 자신의 발견에 대한 어려움, 고유한 자신에 대한 동경,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전하고 싶은 갈망 - 이 모든 것들은 자라 키르쉬의 주된 시적 주제들입니다. “밤은 자신의 손가락을 뻗친다/ 내 집에서 다를 발견하고/ 나의 의자에 살그머니 앉는다/ 밤은 드러누워 거대한 몸을 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