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동독문학

서로박: 슈테판 하임의 "아하스베어"

필자 (匹子) 2021. 10. 17. 11:38

슈테판 하임 (Stefan Heym, 1913 - 2001)의 장편 소설 "아하스베어"는 1981년에 간행되었다. 어째서 유대인들은 영원히 방랑하는 숙명을 지니는 것일까? 하임 역시 스스로 유대인이자 사회주의자로서 일찍이 나치 독일을 떠나야 했다. 그는 30년대에 체코를 거쳐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1947년에 미국에서 메카시 선풍으로 인한 반공산주의적 분위기에 혐오감을 느끼며, 구 동독으로 돌아왔다. 이로써 구 동독은 하임으로 하여금 수많은 갈등을 빚게 만든 고향이 되었다. 예컨대 1976년 비어만 추방령을 철회해 달라는 공개적 서한문에 서명하였다.

 

하임은 소설 "아하스베어"에서 창세기 이전의 신비로운 이야기를 추적하고 있다. 아하스베어는 원래 루치퍼와 함께 천사였다. 그는 불과 정령을 관장하는 존재이다. 두 천사는 하나님으로부터 추방당한다. 그 이유는 두 천사가 이른바 먼지로 만들어진 인간에게 봉사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으로부터 벌을 받은 두 천사는 천국 아래로 떨어져, 시공을 초월하여, 방랑 생활을 보낸다.

 

귀스타프 도레의 방황하는 유대인

 

소설의 주된 이야기는 16세기 중엽의 비텐베르크, 함부르크 그리고 고토르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파울 아이첸”은 루터 학교에 다니는데, 우연한 기회에 어느 기이한 인간과 사귄다. 그는 “요하네스 로이히텐트레거”라고 불리는 사람이었다. 요하네스는 비록 자리를 절지만, 기이한 초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요하네스는 파울과 언제나 함께 자리하며, 파울의 미래 삶을 돌봐주게 된다. 가령 파울은 신학교 마지막 시험에 합격해야 하는데, 요하네스는 기이한 방법으로 답안지를 작성해 준다. 게다가 파울이 직장 문제로 어려움을 지니고 있었는데, 요하네스는 파울을 위해서 직장마저 알선해 준다. 파울의 직장은 슐레스비히 공작령의 대교구 감독 자리였다. 그럼에도 파울은 요하네스가 천사, 루치퍼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파울은 요하네스를 통하여 유태인, “아하스베어”를 알게 된다. 그는 아하스베어가 영원히 생명을 유지하는 천사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파울은 아하스베어를 사귐으로써, 무언가를 의도한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알토네 지역에서 유대교를 믿는 유대인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게 바로 그의 의도였다. 말하자면 아하스베어는 다름 사람 앞에서 “예수가 자신을 희생시킴으로써 인류를 구하려고 한 구원자”라는 사실을 증언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하스베어는 파울이 의도한 바와는 정반대로 증언한다. 파울은 아하스베어에게서 두려움을 느낀다. 즉 아하스베어는 파울의 눈에는 선동적이고, 교회 그리고 교회에 의해지지 받는 국가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자로 비친다. 아하스베어는 사형을 선고받게 되지만, 파울은 이를 그저 수수방관한다. 그러나 아하스베어는 죽지 않는다. 결국 그는 요하네스와 함께 파울의 영혼을 데리고 간다.

 

소설 내에는 어떤 편지들이 삽입되어 있다. 편지의 내용은 현재에 발생하는 사건을 유추하게 하는데, 두 사람의 교수에 의해 교환된 것들이다. 한 사람은 동베를린 학문적 무신론 연구소 소속인 바이푸스 교수이고, 다른 한 사람은 예루삼렘에 있는 헤브류 대학교 요카나안 로이히텐트레거 교수이다. 로이히텐트레거 교수는 영원한 유태인을 개인적으로 알고 있다고 주장하며, 그의 존재에 관한 역사적 문헌을 고증으로 내세운다. 그러나 바이푸스 교수는 죽지 않는 존재인 아하스베어를 믿을래야 믿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그는 점점 더 아하스베어에 관한 테마에 깊이 매몰된다. 바이푸스 교수는 학문 굥동체의 전체적인 요구 때문에 로이히텐트레거 그리고 그의 친구들의 방문을 거절한다. 거절 이유로서 로이히텐트레거가 무정부주의자이며, “가장 암울한 반동주의 내지 자본주의의 도구”라는 것이다. 결국 바이푸스는 악마에 의해 잡혀간다. 아하스베어와 루치퍼는 그를 유혹하여 서방세계로 향하게 조처한다.

 

소설 속에는 또 다른 측면이 다루어지고 있다. 그것은 아하스베어와 “렙 요수아 (예수)”의 만남이다. 아하스베어는 예수로 하여금 그가 겪는 고난의 과정을 포기하도록 요구한다. 나아가 그는 실패한 신의 창조 작업에 함께 저항하자고 예수에게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요구는 실패로 돌아간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아하스베어는 자신의 집 앞에서 마지막 길을 걷는 예수에게 조금의 휴식도 제공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때문에 아하스베어는 영원히 방랑해야 하는 숙명을 지니게 된다.

 

샤갈의 영원히 방황하는 유대인

 

마지막 신화적 단락에서 예수는 지구로 되돌아온다. 그는 20세기에 자행된 수많은 인간 목숨의 잠재적인 파괴에 대해 전율을 느낀다. 예수는 아르마게돈의 마지막 전투를 준비하며, 성스러운 질서를 허물어뜨릴 수 있는 강력한 폭풍을 마련한다. 그렇지만 예수는 신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는 어떤 다른 새로운 자유의 나라를 창조할 수는 없다. 마지막 대목에 이르러 아하스베어는 새로운 역도들과 하나가 된다. “그와 신 (GOtt)은 하나이기 때문에 나 역시 신 (GOtt)과 하나가 되었다. 하나의 위대한 사고. 하나의 꿈.”

 

하임의 두 천사, 루치퍼와 아하스베어는 무언가를 예견한다. 즉 인간은 신과의 유사성을 보존하기 위하여 실체를 지니지 않는다는 점, 신의 피조물인 인간은 결국 굳어버리리라는 점 등이다. 만약 세상을 움직이게 하는 두 천사의 존재를 자신보다 못한 존재라고 간주하고, 이들을 추방하면 말이다. 두 천사는 확정된 질서에 이의를 제기하고, 세상이 맨 처음 존재했던 불안한 상태로 바꾸려고 한다. 그렇지만 방법에 있어서는 서로 다르다. 루치퍼는 인간의 내면에 담긴 파괴적 본능을 강화시키려 하며, 지배 계급에 봉사한다. 왜냐하면 세계는 신 (GOtt)이 부여한 질서에 의해서 몰락하리라고 처음부터 정해져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따라서 인간의 모든 노력은 루치퍼에 의하면 무의미할 뿐이며, 고통만을 연장시킬 뿐이라는 것이다.

 

이에 반해 아하스베어는 인간이 어떤 조화로운 세계를 실현시키기 위하여, 이러한 질서에 저항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 그는 두 가지의 잘못된 예를 알려준다. 그 하나는 파울 아이첸의 경우이며, 다른 하나는 가상적인 독단론자, 바이푸스의 경우이다. 전자는 종교 개혁의 자세를 고수하나, 결국 국가를 보존하려는 독단론에 경직된다. 후자는 혁명적 폭동과 경직된 체제 사이를 영원히 맴돌고 있다. 아하스베어는 작가에게 혁명가이자 유태인의 상징적 존재로 간주될 수 있다. 작가 하임은 소설 아하스베어에서 반유태주의의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종교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반유대주의는 종교 개혁 이후에 성격이 바뀌어 어떤 경제상의 근원을 지니게 되었다.

 

“아하스베어” 소재는 파우스트 소재와 마찬가지로 독일 민중서적을 통하여 전통적으로 전해내려 왔다. 그것은 유진 수 (E. Sue), 아힘 폰 아르님 (A. v. Arnim), 니콜라우스 레나우 (N. Lenau), H. Chr. 안데르센, 시몬느 드 보바르 등의 작품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슈테판 하임은 영원한 유태인에 관한 신화를 몰락한 천사와 연결시킨 셈이다. 이로써 소설 속에 묘사된, 아하스베어의 역사적 사건들을 초시간적 원형으로 승격시킨 셈이다. 하임의 소설은 구서독에서는 다양한 반응을 얻었다. 혹자는 언어의 정밀성 그리고 철학적 내용을 칭찬한 반면에, 혹자는 소설이 지적 깊이에 있어서 함량미달이라고 주장했다. 어쨌든 "아하스베어"는 하임의 소설 가운데 가장 성공을 거둔 작품으로 간주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