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동독문학

서로박: 몸젠과 뮐러 (2)

필자 (匹子) 2021. 6. 22. 10:21

8. 몸젠은 로마사 제 4권을 못 쓴 게 아니라, 의도적으로 완성하지 않았다. 그의 학문적 열정과 부지런함을 고려할 때 우리는 다음의 사실을 추론할 수 있습니다. 즉 몸젠은 로마사 제 4권을 못 쓴 게 아니라, 안 쓴 것이라고, 왜 그는 로마사 제 4권의 집필을 그토록 꺼렸던 것이었을까요? 이는 나중에 독일의 극작가, 하이너 뮐러가 마음속에 품었던 질문이었습니다. 몸젠은 어느 편지에서 “왕궁의 잡다한 가십거리에 관해 왈가왈부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하고 대꾸하였습니다. 또한 몸젠은 1885년 어느 저녁 모임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로마 황제의 역사 그리고 로마의 붕괴와 멸망에 관해 기술하려는 심리적 욕구가 솟아오르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몸젠은 집필에 더 이상 신명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프로이센은 그에게 연구비를 주며, 은근히 압박을 가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다름 아니라 프로이센 국가를 마치 로마의 찬란한 제국으로 거론해주기를 명령하는 요구사항이었습니다. 몸젠은 당국이 요구하는 대로 “로마 황제 치하의 역사는 당시 유렵 사람들에게 가장 행복하고 찬란한 역사였다.”라고 기술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는 지식인으로서 결코 저질러서는 안 되는 어용의 행위이며, 황제의 권력에 아첨하는 행위였기 때문입니다.

 

9. 1992년에 세상에 나타난 몸젠의 로마사 제 4권: 몸젠은 의도적으로 자신의 책을 완성시키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일부 완성된 부분 원고는 화재로 소실되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로마사 제 4권을 더 이상 접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1992년 몸젠의 로마사 제 4권은 간행되었습니다. 그것은 알렉산더 데만트와 바르바라 데만트가 편찬한 테오도르 몸젠의 『로마 황제의 역사』였습니다. Theodor Mommsen: Römische Kaisergeschichte (hrsg. Alexander Demandt u. a. C. H. Beck 1992. 이 책은 로마사 제 4권으로 명명될 수 없지만, 적어도 역사학계에서 몸젠이 기술한 로마 황제의 역사의 내용으로는 합당한 것으로 인정 받게 됩니다.

 

10. 로마 황제의 역사: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1980년 독일의 문헌학자 알렉산더 데만트 (Alexander Demandt, 1937 -)는 우연한 기회에 고서점을 뒤지다가 놀라운 문헌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몸젠의 친구이자 제자였던 제바스티안 헨젤 그리고 그의 아들 파울 헨젤이 기술한, 로마사 제 4권에 관한 강의록,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몸젠은 거의 20년에 걸쳐 대학에서 로마사를 강의를 강의하였습니다. 그러나 몸젠의 강연을 들었던 몇몇 제자들은 자신의 강의록을 집필하였습니다. 제바스티안 헨젤은 로마사에 매우 관심을 기울였으며, 몸젠의 강의를 반복해서 수강하였습니다. 그의 아들 역시 로마사에 관심을 기울였는데, 심지어는 부자 (父子)가 개인적으로 강의해줄 것을 몸젠에게 별도로 부탁하기도 하였습니다. 강의록은 상당부분 생략된 사항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문헌학자 알렉산더 데만트는 빠진 부분을 보충하여 『로마사』 제 4권을 재구성하는 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11. 문학적 유언: 그렇다면 하이너 뮐러는 어째서 장시「몸젠의 블록」을 집필 발표하게 된 것일까요? 작품은 1993년에 발표되었습니다. 놀랍게도 뮐러는 독일이 통일된 이후부터 극작품의 집필을 더 이상 시도하지 않았습니다. 드물게 발표된 것은 시작품입니다. 이러한 경우는 공교롭게도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경우와 매우 흡사합니다. 브레히트 역시 1948년 구동독에 정착하여 더 이상 구동독에 관한 새로운 극작품 집필에 몰두하지 않았습니다. 브레히트는 연극의 공연에 관여하거나, 시작품을 집필했을 뿐입니다. 하이너 뮐러 역시 더 이상 극작품을 집필하지 못하고 시작품만 간간이 발표했을 뿐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브레히트의 경우 사회주의 극작품을 집필하는 것보다는 과거 청산에 몰두하는 게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뮐러의 경우 사회주의의 몰락과 이로 인한 사회의 변화가 그로 하여금 더 이상 극작품을 집필하지 못하도록 작용한 게 분명합니다. 이를 보다 구체적으로 파악하려면 우리는 일차적으로 하이너 뮐러가 처했던 정황을 살펴야 할 것입니다.

 

12. 뮐러가 처한 정황: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1990년에 독일이 통일되었습니다. 1989년 하이너 뮐러는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에서 통일 대신에 민주화를 촉구하는 연설을 행했습니다. 크리스타 볼프 그리고 크리스토프 하인 역시 그렇게 행동을 취했습니다. 그러나 일부 동독 국민들은 작가들을 규탄하면서, 구동독 체제에서 특권을 누리는 족속들이라고 비난했습니다. 그들은 “개혁 (페레스트로이카)” 대신에 “개방 (글라스노스트)”을 선택하였습니다. 장벽이 붕괴된 다음, 이듬해에 총선거가 치러지고 독일이 통일되었습니다. 1991년 독일의 문화계에서는 동독 문학 논쟁이 일어났습니다. 이때 구설수에 오른 것은 구동독에서 체제 비판적인 자세를 취하던 사회주의자 작가들이었습니다.

 

놀랍게도 구동독에 기회주의적으로 처신하던 체제옹호적인 “아첨 작가들 Hofdichter”이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마땅했는데, 독일 문화계는 사회주의 문화의 청산의 일환으로 비판적 지식인들을 도마 위에 올렸던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크리스타 볼프, 폴커 브라운, 하이너 뮐러 등의 작가들은 언론으로부터 집중 포격을 당했습니다. 사람들은 이들 작가의 작품을 놓고, 객관적으로 평가한 게 아니라, 이들의 세계관 내지 지조를 놓고 시시비비를 따졌던 것입니다. 이듬해에 구동독 작가들의 슈타지 연루설이 대두되었습니다. 수많은 동독 작가들은 “비공식 협조요원 (IM: informelle Mitarbeiter)”으로서 동료 작가들을 감시감독하며, 생활비를 받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상기한 두 가지 일련의 사건들은 하이너 뮐러와 같은 작가들의 사기를 위축시켰으며, 더 이상 작품 활동을 전개하지 못할 정도로 거대한 심리적 압박을 가했습니다.

 

13. 몸젠에 관한 두 권의 책 (1): 1992년 우연한 기회에 두 권의 신간 서적을 접하게 됩니다. 그 하나는 아델하이트 몸젠의 회고록 『나의 아버지. 테오도르 몸젠에 관한 기억』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알렉산더 데만트가 편찬한 테오도르 몸젠의 『로마 황제의 역사』였습니다. 첫 번째 책은 평이하게 읽을 수 있는 책입니다. 몸젠의 자식은 12명이었고, 그 가운데 여섯 명의 딸이 있었습니다. 몸젠에게는 12명의 자식이 있었는데, 몸젠 부부는 그들을 먹여 살리는 데 무척 힘겨워하였습니다. 몸젠은 아들의 미래의 직업에 몹시 관여하였으며, 딸들에게는 비교적 자유롭게 살도록 권했습니다.

 

좋게 말하자면 몸젠은 딸들에게 스스로 자신의 직업을 선택하게 했으며, 나쁘게 말하면 딸들을 세밀히 돌보지 않고, 학문과 직업을 택하는 일에 있어서 수수방관으로 일관하였습니다. 물론 당시에는 엄격한 남성중심의 시민 사회가 온존하고 있어서 여성이 좋은 직업을 얻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여섯 딸 가운데 네 명의 딸이 교사 그리고 간호사 등으로 일했다고 합니다. 뮐러는 아델하이트 몸젠의 회고록에서 몸젠의 일상적 삶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마르크 가의 집이 방화에 휩싸인 이야기는 무척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14. 몸젠에 관한 두 권의 책 (2): 1992년에 고대 문헌학 연구가 알렉산더 데만트는 그의 아내, 바르바라 데만트와 함께 몸젠의 역사서를 간행하였습니다. 몸젠은 이미 언급했듯이 생전에 『로마사』라는 제목으로 네 권의 책을 발표한 바 있었습니다. 이 가운데 4권, 다시 말해서 로마 황제 치하의 역사 부분은 결본으로 남아 있습니다. 데만트는 우연히 고서점에서 어느 필사본을 발견했는데, 이것은 몸젠의 로마사 제 4권에 관한 강의록이었습니다. 역사가 테오도르 몸젠은 프로이센의 왕실 연구소로부터 금전적 지원을 받고, 로마사를 집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프로이센은 은근히 몸젠이 프로이센을 찬양하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만약 몸젠이 로마 제국의 찬란한 문화를 프로이센 제국의 그것과 비교한다면, 프로이센 권력자로서는 더 이상 바랄 게 없었습니다.

 

그러나 몸젠은 “로마 시민들은 황제의 치하에서 가장 행복하게 살았다.”라고 기술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왕의 지배는 자유주의를 표방하는 몸젠으로서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체제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로써 몸젠은 로마 황제 시기의 역사를 시시콜콜 재론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결국 몸젠은 죽을 때까지 로마사 제 4권을 집필하여 이를 발표하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몸젠은 거의 20년 동안 자신의 제자들에게 로마사를 강의하곤 하였습니다. 몸젠에게서 강의를 듣던 제바스티안 헨젤 그리고 그의 아들 파울 헨젤은 비교적 꼼꼼하게 강의록을 기술하였습니다. 데만트는 바로 이 강의록을 발견하여, 몸젠의 로마 황제 시기의 역사를 한 권의 책으로 발간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15. 베를린 훔볼트 대학에서의 흉상 교체의 사건: 당시에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는 마르크스의 동상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테오도르 몸젠의 동상을 세웠습니다. 왜냐하면 소련의 붕괴 후에 마르크스 레닌주의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독일의 통일 후에 구동독의 카를 마르크스 도시는 켐니츠라는 이름을 다시 얻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동상 교체 자체에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마르크스의 동상 철거로 인하여, 독일 사람들은 더 이상 인간 삶의 평등과 정의로움을 위한 공동적 유토피아의 꿈을 견지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하이너 뮐러는 동베를린이 새로운 투자지역으로 돌변하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사회 정의와 경제적 평등의 삶을 주창하지 않고, 서서히 황금만능주의의 시대적 현실 속에 순응하며 살아가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가치는 돈으로 측정되고, 성공 여부는 경제적 부에 의해서 판단되는 이즈음, 사회주의 국가 출신의 작가로서 더 이상 무엇을 어떻게 집필해야 하는가? 하고 뮐러는 깊이 고심하기에 이릅니다. 물론 전체 국가적 차원에서의 사회주의의 실험이 실패로 돌아간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인간이 원초적으로 갈구하는 사회주의 이상의 꿈, 자유 평등 그리고 동지애의 이상만이 황금만능주의에 의해서 훼손되는 것을 극작가 뮐러로서는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까닭에 하이너 뮐러는 절필을 깊이 성찰하게 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