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근대영문헌

서로박: 버틀러의 "에레혼" (3)

필자 (匹子) 2022. 1. 14. 19:02

물론 과학 기술은 이 경우 미래를 위한 긍정적 설계로 활용되었지만, 함부로 남용되지는 않았습니다. 과학 기술의 기능은 그 자체 중립적인 특성을 지니지만, 자본주의의 생산 양식이라는 전제조건 하에서는 얼마든지 계급 사회의 도구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과학 기술의 활용은 자본주의 체제의 현실에서는 끔찍한 악영향을 낳을 수 있습니다. 소수의 사람들은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과학 기술을 활용하는데, 이로 인하여 대다수의 노동자의 생활은 더욱더 황폐한 수준으로 나락하게 됩니다.

 

만약 과학 기술이 자본주의에서 통용되는 이유 추구의 가치를 허물고, 다른 유형의 삶의 가치를 병행하게 된다면, 그것은 비로소 해방의 과업을 상당부분 관철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다른 유형의 삶의 가치란 가령 국가적 차원의 사회주의 계획 경제, 혹은 소규모 공동 조합의 차원에서 활용되는 자활 자립 경제, 혹은 아나키즘의 현실적 전제 조건에서 중시되는 사회적 협동과 연대와 관련되는 가치를 가리킵니다.

 

11. 버틀러의 과학 기술 비판: 버틀러의 소설 『에레혼』에서는 기술에 대한 비판이 정면으로 부각되고 있습니다. 기술에 대한 작가의 비판은 사회의 틀과 같은 전제조건을 수정해야 한다는 식으로 전개되는 게 아니라, 기술 자체로 향하고 있습니다. 버틀러는 과학 기술에 대한 지금까지의 유토피아주의자들의 견해를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즉 그들은 기술로 인한 제반 잠재적인 위험성들을 너무 가볍게 고찰하였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그들은 기술이 인간에게 전해주는 악영향을 오로지 사회의 틀 내지 전제 조건과 관련시켰을 뿐, 직접 인간에게 해악을 끼치는 도구라고 묘사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오늘날 생태계 파괴 현상을 고찰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버틀러의 이러한 견해에 동의하게 될 것입니다. 특히 구소련과 동구의 국가들은 생산과 노동의 수단으로서의 기계를 철폐한 다음에 과학 기술을 국가의 차원에서 활용했는데, 이로 인하여 수많은 자연이 생태학적 차원에서 황폐화된 바 있습니다.

 

12. 기계는 인간처럼 의식하게 될 것이다.: 『에레혼』의 국가는 산업화의 과정을 근절하기 위하여 정반대의 끔찍한 정책을 시행하고 있습니다. 이는 이곳 주민들에게는 또 다른 독약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이곳에서는 고도로 발전된 기술이 이미 500년 전에 완전히 철폐되었습니다. 인간은 너무나 빨리 진행되는 산업화의 과정으로 인하여 기술의 노예로 전락했다고 합니다. 이로 인하여 기계 자체가 주체로 변하게 되었으며, 기계를 만든 인간에게 커다란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기계가 인간을 지배하게 된 것은 어떻게 가능하게 되었을까요?

 

기계 스스로 의식을 지니지 않은 채 인간을 지배하는 일이 과연 어떻게 가능하게 되었을까요? 에레혼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기계는 인간과 같이 의식할 수 있는 능력을 장착하지 못했다고 말입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그렇게 주장한다고 하더라도 기계가 언젠가는 그러한 능력을 갖추게 될 것입니다. 작가는 다음과 같이 은근히 호소합니다. 기계가 인간의 오관을 빌어서 자신의 인상을 감지하게 될 날이 멀지 않을 것입니다. 기계는 고도의 소질을 통해서 인간의 청력을 장착하게 될 것이며, 의시 소통의 언어 역시 개발할지 모른다고 말입니다. (Butler: 278).

 

13. 인간에 대한 기계의 지배: 기계가 인간을 지배한다면, 이는 구체적으로 어떤 식으로 출현하게 될까요? 유토피아주의자들도 인간이 기계에 종속되리라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사람들은 지금까지 기계를 도구화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람들의 유형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 하나는 자본주의 체제 하의 소수의 엘리트들이라면, 다른 하나는 시민 전체를 가리킵니다. 에레혼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역동적인 기술 발전에 직면하여 “지배”와 “봉사” 사이의 구분은 그야말로 진부한 것으로 변했다고 합니다. 봉사하면서 살아가는 자는 말하자면 “자신도 모르게 지배하는 등급 속으로 이전”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인간이 자신의 기계를 조작함으로써 스스로 기술을 지배한다고 말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은 기계를 조작할 뿐, 실제로 노동하거나 행동하는 주체는 기계입니다. 흔히 말하기를 소수의 엘리트들은 기계를 작동함으로써 자신의 권한을 떨치고, 자신의 후계자로 하여금 세상을 지배하게 만든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이는 스스로 작동되는 기계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기계의 힘은 인간의 사고 능력보다도 더욱 우월하게 될 날은 멀지 않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