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근대영문헌

서로박: 버틀러의 "에레혼" (1)

필자 (匹子) 2022. 1. 14. 19:01

1. 과학 기술과 기계에 대한 비판: 19세기 중엽 이후로 과학 기술의 폐해를 지적하는 일련의 유토피아 소설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메리 셸리가 작품 『프랑켄슈타인』을 통하여 자연과학의 잘못된 활용 가능성을 지적할 때만 하더라도, 사람들은 자연의 질적 개념인 마력적 요소를 부분적으로 신뢰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과학자들은 산업 혁명을 염두에 두면서 인간의 지적 능력으로 자연의 모든 요소들을 인간 삶을 위하여 활용할 수 있다고 믿고 있었는데, 메리 셸리는 자연 그리고 과학 기술 사이에는 결코 일치할 수 없다는 낭만주의의 자연관을 빌어서 자연과학이 차제에 얼마나 커다란 악영향을 끼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지적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한 작품 『프랑켄슈타인』은 17세기부터 서서히 전개되기 시작한 기술적 유토피아에 대한 강렬한 비판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20세기에 출현한 사이언스 픽션의 여성 유토피아의 선구적 작품일 뿐 아니라, 현대적 의미에서 생태학적 시각에서도 새롭게 연구될 필요가 있는 작품으로 이해됩니다. 어쨌든 19세기 중반 이후의 시점에 사람들은 과학 기술이 인간 삶에 얼마나 파괴적으로 작용할 수 있는가? 에 관해서 열렬히 토론하곤 하였습니다. 이러한 문제들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불워 리턴의 『미래의 사람들』 (1871)에서 다시 한 번 문학적으로 형상화된 바 있습니다.

 

2. 기계에 의한 인간의 지배: 새뮤얼 버틀러는 학문과 과학기술에 바탕을 둔 진보가 과연 어떠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가? 추적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가 현대의 가장 끔찍한 문제로 파악한 것은 다름 아니라 기계가 인간을 지배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었습니다. 이러한 가능성은 버틀러가 1872년에 발표한 『에레혼 혹은 산맥의 저편 Erewhon oder Jenseits der Berge』에서 자세히 묘사되고 있습니다. 사실 작품 속에서는 어떤 가상적인 미래 사회의 모델이 구성적으로 묘사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렇기에 버틀러의 작품은 엄밀히 말하자면 문학 유토피아의 장르에 포함되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작품은 마치 조나탄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와 같은 풍자 문학의 범주에 포함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자고로 풍자문학은 주어진 현실과는 무관한 상상의 이야기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주어진 시대를 비판하지 않습니까?

 

3. 버틀러의 삶 (1): 새뮤얼 버틀러 (1835 – 1902)는 영국의 작가이며, 작곡가, 화가, 철학자 그리고 교사 등으로 잘 알려진 인물입니다. 1835년에 영국의 랑가르라는 마을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명민한 아이였으나, 언제나 아버지로부터 매질을 당하면서 살아야 했습니다. 버틀러의 문학에 반영된 세계에 대한 부정적이며 냉소적인 시각은 어린 시절의 체험에 기인합니다.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이탈리아 예술과 문학을 전공하였는데, 아버지는 그가 교회와 관련되는 직업을 택하기를 원했습니다. 버틀러는 아버지와 심하게 싸운 다음에 1859년에 뉴질랜드로 이민을 떠나게 되나, 오년 동안의 외국 생활을 접고 영국으로 되돌아옵니다. 귀국을 결심한 까닭은 자신의 친구 찰스 파울리가 영국에서 살아가기를 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버틀러는 동성연애자로서 어느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았습니다.)

 

1864년에 그는 자신의 재산을 처분하여 런던 근교의 클리포드 인에서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정주하며 살았습니다. 1886년 아버지가 사망한 뒤에 버틀러는 제법 많은 유산을 상속받았는데, 매년 여름 이탈리아로 가서 그곳에서 집필에 몰두했다고 합니다. 버틀러는 친구 찰스 파울리가 1892년에 사망할 때까지 그의 생활비를 대주었다고 합니다. 찰스 파울리는 생전에 버틀러만 사랑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여러 명의 남자와 깊은 동성연애의 관계를 맺으면서, 그들로부터 돈을 받고 있었습니다. 이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버틀러는 배신감에 사로잡혔다고 합니다.

 

4. 버틀러의 삶 (2): 버틀러는 오래 전부터 다윈의 진화론을 신봉하였습니다. 1872년에 작품 『에레혼』을 발표하여, 세인의 주목을 끌었습니다. 작품은 19세기 말 영국 사람들이 종교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가치 전도된 사회에서 살아가면서 표리부동한 삶을 영위하고 있다는 것을 신랄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버틀러는 언제나 사회의 국외자로서 고독하게 살았습니다. 그는 작품을 통하여 빅토리아 시대에 횡행하고 있는 과학 기술의 추구를 통한 진보에 대한 믿음을 낱낱이 고발하고 싶었습니다. 말년에는 다윈의 진화론으로부터 거리감을 취했으며, 다시 종교에 귀의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버틀러가 기독교 독단론을 무조건 추종했다는 것은 아닙니다. 새뮤얼 버틀러는 소설 외에도 우스꽝스럽고 의미심장한 경구 모음집을 발표하여 세인으로부터 주목을 받았습니다. 1902년, 그러니까 죽기 직전에 그는 『에레혼 다시 방문하다』라는 소설을 발표하여, 자신의 이름을 떨쳤습니다. 버틀러로부터 영향을 받은 사람은 서머세트 모옴, D. H. 로렌스, 웰스 그리고 제임스 조이스 등 상당히 많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