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문학 이야기

헵벨의 문학과 극예술

필자 (匹子) 2019. 1. 25. 10:11

 

 

 

입지적인 극작가, 프리드리히 헵벨 (1813 - 1863) : 사실주의 시대의 탁월한 극작가였지만, 주위 사람들에게 인간적 훌륭함을 드러내지 못했습니다. 헵벨은 1813년 덴마크 령의 베셀부른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벽돌공이었고, 어머니는 구두수선공의 딸이었습니다. 1819년 아버지는 빚때문에 가출하였고, 이로 인하여 집안의 경제적 형편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1827년 아버지가 사망한 다음에 살아가기가 막막해졌습니다. 헵벨은 다른 사람의 집에서 거주하였고, 학교도 제대로 다닐 수 없었습니다. 유아독존적이고 냉소적이며 격정적인 인물로서 상류층으로 도약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이를 위해서 헵벨은 자신의 아들을 잉태한 나이 많은 여성, 엘리제 렌싱과의 결혼을 끝내 거부하였습니다.

 

 

 

 

1835년에 함부르크로 이주한 헵벨은 이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시기에 엘리제 렌싱을 알게 되었으며 일기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1836년 장학금을 받은 헵벨은 하이델베르크로 가서 그곳에서 법학을 공부하다가, 걸어서 뮌헨으로 갑니다. 뮌헨에서 안톤 슈바르츠라는 목수를 만나는데, 이 인물은 나중에 마리아 막달레나의 등장인물이 됩니다.1838년에 목수의 집에 머물면서 그의 딸 요제파 베피 슈바르츠와 사랑에 빠집니다. 그의 행동은 각즉품에서 레온하르트의 행동을 방불케 합니다. 위의 작품은 니벨룽겐이라는 작품집입니다. 여기서 헵벨은 자신의 범비극론 Pan- Tragismus을 실험하였습니다. 범비극론은 두 개의 명제가 서로 갈등을 일으켜서 충돌하는 비극이론으로서, 그 방식에 있어서 헤겔의 변증법을 수용하고 있습니다.

 

 

 

1939년 헵벨은 뮌헨에서 함부르크까지 걸어서 여행합니다. 수중에는 먹을 것 하나 없었습니다. 기력이 쇠하게 된 헵벨을 보살펴준 사람은 엘리제 렌싱이었습니다. 1840년 엘리제는 아기를 낳습니다. 이 아기는 2년 후에 막스 헵벨이라는 이름을 얻게 됩니다. 1840년 헵벨은 유디트라는 비극 작품을 완성합니다. 이 작품은 1840년 7월 6일 베를린에서 초연되었는데, 헵벨은 이 공연을 관람하고 매우 기뻐했다고 합니다. 이 작품을 계기로 헵벨의 이름은 전 독일에 알려지게 됩니다. 뒤이어 발표한 "게노베바"는 로베르트 슈만에 의해서 오페라로 만들어졌으며, 브람스, 리스트 등의 작곡가들은 헵벨의 작품을 바탕으로 작곡하였습니다. 베셀부른은 헵벨의 고향입니다. 북독은 넓은 초원에 황량하고 광활한 지역입니다. 이곳에서 헵벨은 북구 특유의 광활함과 강건함을 체득하였습니다. 

 

 

위의 사진은 베셀부른의 시 한 복판입니다. 인구 10만명도 채 되지 않는 소도시인데, 깨끗하고 아름답습니다. 헵벨은 1813년에 이곳에서 태어났습니다. 이곳은 당시에는 덴마크 령이었는데, 나중에 독일 지역으로 편입되었습니다, 부모가 빚더미에 몰리게 되자, 그는 친척집에 거주했는데, 그곳에서 눈치밥을 먹고 살아야 했습니다.

 

 

 

1844년 둘째 아들이 태어났을 때 엘리제는 헵벨에게 결혼하자고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헵벨은 으러한 부탁을 거절하였습니다. 사진은 베셀부른에 있는 헵벨 박물관을 보여줍니다. 여기에는 헵벨의 소품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헵벨은 1830년대 중엽부터 죽을 때까지 일기를 썼습니다. 20세기 말에 이르러 그의 일기 전부가 세인에게 공개되었습니다.

 

 

 

 

헵벨 박물관의 내부의 모습. 앞에는 헵벨의 일기장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곳에 프리드리히 헵벨의 가계부가 보존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헵벨은 작은 노트에 수입과 지출의 목록을 빽빽히 기술할 정도로 죽을 때까지 돈 관리에 철저한 모습을 보여주였습니다.

 

 

북독의 광활한 초원지역입니다. 바람이 많이 불어서, 요즈음에는 풍력 발전기가 도처에 설치되어 있습니다. 북독에서 부는 바람은 임의 애잔한 노래와 같으며, 북독의 태양은 임의 따뜻한 온기와 같습니다. 헵벨은 1846년에 빈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죽을 때까지 살았습니다. 1846년에 헵벨은 빈의 여배우 크리스티네 엥하우스와 결혼하였습니다.

 

 

크리스티네 엥하우스. 그미는 빈에서 활동하면서, 많은 돈을 번 배우였습니다. 헵벨에게는 1835년에 사귄, 두 명의 아이까지 낳아 기른 내연녀, 엘리제 렌싱이 있었습니다. 그미는 헵벨이 성공하도록 많은 것을 도와주었습니다. 헵벨의 두 자식은 일찍 요절하고 맙니다. 놀라운 것은 헵벨이 자신을 도와준 엘리제 렌싱과 결혼하지 않고, 여배우 크리스티네와 결혼하였다는 사살입니다. 그렇게 해야 극작가로서 성공을 거둘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벨의 이기적인 면모를 읽을 수 있습니다. 크리스티네는 그릇이 큰 여성으로서 엘리제를 음으로 양으로 많이 도와주었습니다. 이를테면 엘리제는 헵벨이 아닌 다른 남자와 동거하면서  카를을 낳았는데, 크리스티네는 카를에게 생활비를 주기도 했습니다.

 

 

 

헵벨은 안정되게 살아가면서 작품 집필에 몰두했습니다. "아그네스 베르나우어", "귀게스와 그의 반지", "니벨룽겐" 등의 작품이 잇달아 발표되고 공연되었습니다. 위의 사진은 뮌헨에 있는 뮌헨 카머슈필레 극장의 내부 모습입니다. 1911년에 건될된 이 건물은 수많은 극작품과 오페라가 공연됩니다. 독일에서 연극 공연은 6개월 지속됩니다. 다시 말해서 약 최소한 30회 같은 작품이 공연된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배우는 등장인물과 흡사하게 행동하고 살 수밖에 없습니다. 좌석 수만해도 600 좌석이 넘으며, 현재도 극작품이 공연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뮌헨 카머슈필레의 좌석을 표시한 표입니다. 노란 색의 좌석이 1등석이고, 붉은 색이 2등석입니다. 푸른 색의 좌석은 3등석입니다. 영화의 경우 뒤에 앉으면 관람하기 편하지만, 연극의 경우 앞의 좌석이 관람하기 편합니다. 왜냐하면 뒷자리에 앉으면 잘 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옆에는 칸막이로 가려진 특별석이 있습니다. 이는 "eine Loge"라고 명명됩니다. 

 

 

 

사진은 헵벨의 일기장 가운데 한 권입니다. 헵벨의 애인, 엘리제 렌싱의 사진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대신에 그미가 헵벨에게 보낸 편지 모음집은 남아 있습니다. 편지에는 그미가 얼마나 헵벨을 이해하고 사랑하는가? 하는 사항이 기술되어 있습니다.

 

 

위의 사진은 함부르크에 있는 프라이에 뷔네 극단의 공연 장면입니다. 극장은 극작가에게서 가장 중요한 공간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자신의 극장을 지닐 수 있다는 것은 하나의 축복과 같습니다. 19세기 말까지 극예술은 문학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중요한 장르였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문학 전체를 장악하는 것은 장편 소설입니다. 

 

 

위의 사진은 마리아 막달레나의 한 장면입니다. 헵벨은 빈에서 자신의 극작품을 공연하려고 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아내인 배우 크리스티네의 도움을 받고 싶었습니다. 가난한 처자와 함부르크에서 비참하게 사느니, 빈에서 편안하게 살면서 극작품을 집필하는 삶을 즐기려고 했던 것입니다. 빈에는 상기한 극장이 수십 개 이상 존재하므로 예술가의 본고장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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