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나벨의 생가. 요한 G. 슈나벨은 1692년 11월 7일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2년 후에 조실부모하여, 할레에 있는 친척집에서 자랐습니다. 1706년부터 1709년 이발 기술을 배워서, 군대의 이발사로 일하면서, 생계를 영위하였습니다. 그후 에스파냐의 전쟁에 참가하여,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습니다. 수많은 군인들의 무용담, 세상에 관한 이야기들은 이때 전해 들은 것입니다. 한마디로 그의 파란만장한 삶은 그의 문학 속에 그대로 용해되어 있습니다.
요한 고트프리트 슈나벨의 유일한 초상화.
1731년의 판. 프락투르 글자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목은 다음과 같습니다. "선원들이 체험한 기상천외한 이야기, 선원들 가운데에는 작센에서 태어난 알베르투스 율리우스라는 남자가 있었는데, 그는 18세의 나이에 선원으로 항해하여, 악천후로 배가 난파되었을 때 어느 기괴함 섬의 암벽으로 내던져졌는데, 바로 그곳 위로 등반하여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땅을 발견하게 되었으며, 자신을 따르던 처녀와 결혼하게 되었고, 약 300명 이상의 수많은 영혼이 모여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했는데, 땅을 훌륭하게 개간하고, 우연히도 놀라울 정도로 휘황찬란한 사물들을 얻게 되었고, 이로 인하여 독일에서 찾아온 친구들을 행복하게 해주었으며, 1728년 그의 나이 100세가 되었을 때 여전히 생기가 넘치고 건강을 유지했으며, 그리고 추측컨대 어느 시기까지 살았는데, 그의 체험담은 독자들이 즐거운 흥취를 마음껏 누리기 위해서 자신의 남동생 아들의, 아들의 아들인 기이한 독자인 에버하르트 율리우스에 의해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졌으며, 결국 원고는 출간을 목적으로 기산더라는 이름의 출판업자에게 전해지게 되었다"
슈나벨이 묘사한 펠젠부르크의 큰 섬에 관한 지도입니다. 섬 사람들은 농업 중심의 경제 구도에 근거하여 살아가는데, 만인이 개별적 행복과 품위를 유지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슈나벨은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 그리고 다니엘 데포의 로빈손 크루소의 영향을 받고 작품을 집필하였습니다. 그러나 슈나벨의 작품은 모어의 유토피아의 복제품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데포의 도피적 유토피아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 속에는 자유롭고 자발적인 계몽주의가 추구하는 찬란한 완전성의 이상이 은밀하게 침윤되어 있습니다.
17세기 독일은 가난과 폭정이 횡행하던 시대였습니다. 살인자, 건달 그리고 도둑들이 우후죽순처럼 날뛰고 있었습니다. 누군가 돈주머니를 지녔다는 소문이 퍼지면, 주위 사람들은 그를 살해하여 돈주머니를 차지하려고 눈을 부라리곤 하였습니다. 돈 많은 낯선 사람이 술집에 머물면, 주위 사람들은 그에게 술을 먹이고, 그의 돈을 털어가곤 하였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밤에 성당으로 잠입하여,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에 증장하는 장발장처럼 거기서 은촛대를 훔치기도 하였습니다.
슈나벨의 책 "펠젠부르크 섬"의 모습. 1965년에 간행된 것입니다. 슈나벨의 작품에서는 개인이 등장하며, 개인의 자유와 “시민 Citoyen”으로서의 주체 의식이 분명하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는 새로운 사회의 지배자가 아니라, 공동체 사람들과 함께 고민하고 어울려 살아가는, 동등한 권리를 지닌 시민 주체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섬의 대표자는 왕이 아니라, 주민의 합의 하에 추대된 한 사람의 시민 주체라는 것입니다. 이는 자연법과 이로 인한 시민 주체 내지는 시토이앙의 정신의 영향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노예로 태어나지 않았듯이, 왕 또한 한 사람의 인간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렇기에 군주에게 저항하는 것은 법에 위촉되는 게 아니라, 인간의 고유한 권한에 속한다.”라는 알투시우스Althus의 발언을 생각해 보세요.
슈나벨의 『펠젠부르크 섬』은 모티프와 주제의 측면을 고찰할 때 다니엘 데포 Daniel Defoe의 『로빈슨 크루소』와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첫 번째의 차이는 등장인물이 자연을 대하는 태도에서 나타납니다. 로빈슨 크루소는 그렇게 궁핍하지도 않는데도 여러 마리의 사자를 죽입니다. 나중에 그는 사자의 가죽을 비싼 값으로 팔아서 이득을 챙깁니다. 여기서 주인공의 행동은 살아남기 위한 수단으로 이해될 뿐 아니라, 나아가 이윤 추구라는 자본주의의 행동 양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에 반해서 펠젠부르크 섬의 주인공, 에버하르트 율리우스는 기이한 바다코끼리와 물개 그리고 희귀한 새들에 감탄하면서, 동물들을 그냥 내버려둡니다. 자연과 자연의 동물들은 그에게 인간의 적대적인 대상 내지는 부를 가져다주는 재원이 아니라, 경탄을 터뜨리며 관망할 수 있는 대상으로 이해됩니다. 두 번째 차이는 슈나벨의 작품이 문학 유토피아의 특성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입니다.
슈나벨의 작품은 새로운 섬에 관한 찬란한 이야기를 전해주는데, 이는 유럽 사회를 역으로 투시하기 위한 수단이 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슈나벨의 문학 유토피아는 17세기 산업화에 의한 유럽 사회의 개인주의의 삶을 간접적으로 비판하기 위해서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의 계몽주의의 이상을 끌어들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세 번째 차이는 주인공의 자세에서 분명히 나타납니다. 데포의 로빈손은 자신의 섬을 일시적인 거처로 간주하고 언젠가는 자신의 고향으로 되돌아가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알베르투스는 펠젠부르크 섬을 새롭게 발견한 자신의 제 2의 고향으로 간주합니다. 나아가 그는 유럽 문명의 모든 사악한 특성들을 저버리고 새로이 출발하기로 굳게 결심합니다.
1730년부터 1745년 슈나벨이 행방불명될 때까지 살았던 집입니다. 오늘날 깨끗한 집으로 리모델링 되었습니다. 슈나벨은 경제적으로 몹시 힘들게 살았으며, 군대의 이발사로 일하면서 식솔들을 보살펴야 했습니다. 그가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위대한 작가는 세인들의 외면 속에서 사라졌으나, 작품은 남아서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후쿠오카 대학교의 교수 메구무 이나모토. 그는 요한 슈나벨 문학 연구의 세계적인 권위자이다. 이렇듯 외국인도 열심히 노력하면 얼마든지 한 부분에서 대가가 될 수 있습니다.
알베르투스는 일찍이 독일에서 조실부모하고 살아갈 길이 막막했는데, 수사의 도움으로 늠름한 사내로 성장합니다. 어느 날 알베르투스는 네덜란드로 떠납니다. 반 로이벤이라는 이름을 지닌 귀족이 하인을 구하고 있었습니다. 반 로이벤은 어느 미모의 여성, 콘코르디아를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주위의 시선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는 주인공에게 연애편지를 전하라는 밀명을 내립니다. 알베르투스는 편지를 전하는 도중에 어쩔 수 없이 그미와 독대하게 됩니다. 콘코르디아 역시 수려한 사내, 알베르투스에게 마음을 완전히 빼앗깁니다. 그렇지만 그미는 반 로이벤의 청혼을 거절하고, 주인공과 결혼할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반 로이벤은 포근한 봄날 콘코르디아와 약혼식을 거행합니다. 반 로이벤은 어린 시절부터 꿈꾸어온 갈망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신대륙에서 새롭고도 멋지게 살아가는 꿈이었습니다. 그래서 반 로이벤은 결혼식을 연기합니다.
어느날 드디어 신대륙으로 떠납니다. 범선은 대서양에서 폭풍우를 만나 결국 바다 한 가운데에서 전복됩니다. 이로 인하여 범선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모조리 몰살당하고, 불과 네 명만이 살아남게 됩니다. 반 로이벤, 알베르투스, 콘코르디아 그리고 프랑스 출신의 선장 레멜리가 네 명의 생존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이 깨어난 곳은 다름 아니라 어느 기이한 섬의 해안가였습니다. 멀리서 볼 때 섬은 매우 험상궂지만, 사실 그곳은 낙원을 방불케 할 정도로 좋은 환경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온화한 기후로 인하여 온갖 과일들이 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습니다.
프랑스 출신의 선장, 레멜리는 교활하고 음탕한 사내였습니다. 그는 아름다운 처녀, 콘코르디아에게 흑심을 품고, 반 로이벤을 제거하려고 결심합니다. 선장은 절벽을 지나치다가 반 로이벤을 슬쩍 밀어뜨립니다. 반 로이벤은 바위 아래로 떨어져 즉사하고 맙니다. 앞에서 걸어가던 두 사람은 선장이 로이벤을 살해했다는 것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합니다. 다음 날 선장 레멜리는 자신의 본색을 드러냅니다. 어두운 밤을 이용하여 야자나무 아래에서 취침하던 콘코르디아를 겁탈하려 했던 것입니다. 이때 알베르투스는 이를 알아차리고 선장에게 달려듭니다. 두 남자 사이에 격렬한 격투가 벌어집니다. 주인공은 끝내 자신의 단검으로 선장을 찌릅니다. 레멜리 선장은 피를 흘리면서 그 자리에서 쓰러집니다. 그는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주인공에게 용서를 구하면서 서서히 죽어갑니다.
펠젠부르크는 독일의 아담과 독일의 이브에 의해 자발적으로 건립한 공동체입니다. 그것은 강력한 권력을 휘두르는 유럽의 절대 왕정 체제와는 분명히 다릅니다만, 그럼에도 군주 국가의 면모를 은근히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알베르투스는 가족에게는 아버지이지만, 주민에게는 마치 왕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렇지만 그의 존재는 시민 사회의 권력자인 왕과는 엄연히 다릅니다. 왜냐하면 그는 시민들의 합의 하에서 대표자로 추대되었기 때문입니다. 공동체는 일부일처제를 하나의 이상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사회의 체제의 바탕은 가족 단위에서 출발하고 있는데, 모든 가족들은 가부장주의를 표방하며, 가장을 가족의 우두머리로 숭상하며 살아갑니다. 공동체의 이상은 성스러운 가족구성원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인민회의에서는 9 명의 의원, 3 명의 감찰관 그리고 1 명의 대표를 선출합니다. 이들은 공동체의 모든 문제를 토의하고 결정하며, 정책을 집행하는 일을 담당합니다.
슈나벨의 작품에서는 개인이 등장하며, 개인의 자유와 “시민 Citoyen”으로서의 주체 의식이 분명하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는 새로운 사회의 지배자가 아니라, 공동체 사람들과 함께 고민하고 어울려 살아가는, 동등한 권리를 지닌 시민 주체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섬의 대표자는 왕이 아니라, 주민의 합의 하에 추대된 한 사람의 시민 주체라는 것입니다. 이는 자연법과 이로 인한 시민 주체 내지는 시토이앙의 정신의 영향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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