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문학 이야기

고트프리트 벤과 그의 시대

필자 (匹子) 2019. 3. 22. 21:12

 

 

 

고트프리트 벤 (1886 - 1956): 브레히트의 표현에 의하면 그의 시는 죽음 충동Todestrieb을 부추긴다고 합니다. 브레히트가 참여시를 추종한다면, 벤은 순수시 계열의 시를 집필하였습니다. 그는 정태시 내지는 절대시의 영역을 강조하였습니다. 브레히트가 현실의 개혁과 사회의 변화를 촉구했다면, 벤은 인간과 삶의 본질을 미학적으로 찾으려고 햇습니다. (중요한 단어: 에로스, 타나토스)

 

 

 

 

 

 

독일의 소도시 만스펠트의 위치. 벤은 이곳에서 태어나, 알트마르크 지역으로 이사했습니다. 이곳 사람들은 주로 농사를 지으면서, 가난한 삶을 이어갔습니다. 벤은 서쪽 국경도시인 오더 강의 프랑크푸르트에서 학교를 다녔습니다. 학교 성적인 뛰어났다고 합니다.

 

 

 

 

 소도시 만스펠트의 정경. 이곳의 인구는 5만명도 채 되지 않습니다. 이곳에는 벤의 생가가 복원되어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벤의 어머니는 감정이 풍부하고 아들을 따뜻하게 대했지만, 아버지가 문제였습니다. 벤은 그의 아버지와 전혀 다른 세계관을 지니고 있었지만, 아버지는 이를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마음은 마치 오이디푸스의 그것처럼 권위적인 아버지와 불쌍한 어머니 사이에서 갈팡질팡하였습니다.

 

 

 

 

사진은 제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바이마르 공화국이 건설된 이후의 지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독일은 1871년 프랑스와의 전쟁을 끝으로 프로이센이라는 거대한 국가를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빌헬름 1세는 오토 폰 비스마르크 (1815 - 1898)라는 위대한 재상을 두어 국가를 관리하게 하였습니다. 비스마르크는 주위 열강들 (러시아, 프랑스 등)과 불가침 협정을 맺고, 부국강병의 정책을 수행하였습니다. 그러나 1892년 빌헬름 2세는 외교 정책의 노선을 철회하고, 아프리카 아시아 등지에 식민지정책을 추구하자, 강대국과의 마찰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로 인하여 발생한 것이 제 1차 세계대전이었습니다.

 

 

 

 

베를린의 훔볼트 대학의 전경. 벤은 1906년부터 베를린 대학교에서 신학 철학을 억지로 공부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이를 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은 의학을 공부하고 싶었습니다. 이렇듯 벤은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나중에 의학으로 전과했을 때 그의 대학 수업은 마치 순풍에 돛단배처럼 순탄하게 이어졌습니다. (공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적, 경쟁 등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입니다.)

 

 

 

 

 

1912년 벤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나이는 26세였습니다. 이때 그는 깊은 슬픔에 잠기면서 다음과 같은 시를 집필합니다. "당신을 마치 하나의 상처처럼 마음속에 지닐게요./ 결코 닫혀지지 않을 나의 이마 위의 상처/ 그것은 더 이상 고통을 가하지 않지만, 심장은/ 죽지 않은 채 거기서 피를 흘려요./ 이따금 일순 눈앞이 캄캄해지지만, 입 속에/ 피가 고이는 것을 느껴요. Ich trage dich wie eine Wunde/ auf meiner Stirn, die sich nicht schließt/ Sie schmerzt nicht immer. Und es fließt / das Herz sich nicht draus tot. /Nur manchmal plötzlich bin ich blind und spüre / Blut im Munde."

 

 

 

 

 

 시인 엘제 라스커 쉴러의 초상화. 1914년 "시체 공시소 Morgue"라는 시집이 간행되자, 벤은 표현주의의 대표적인 시인으로 등극하게 됩니다. 이때 40대 초반인 유대인의 여류시인 엘제 라스커-쉴러는 26세의 젊은 벤을 뜨겁게 사랑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이로 인하여 시작품이 마치 이룰 수 없는 사랑의 자식처럼, 하나의 보석처럼 탄생하게 됩니다.

 

 

 

 

 위의 그림은 독일의 샤갈이라는 평을 듣곤 하는 표현주의 화가, 프란츠 마르크 (Franz Marc, 1880 - 1916)의 "푸른 말"이라는 작품입니다.  (예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의 갈망입니다.) 푸른 말은 현세에는 없습니다. 그것은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지상의 천국에서 살아가는 생명체를 상징합니다. 어쩌면 마르크는 -장자 (莊子)와는 달리- 더러운 현세에서 버러지로 살아가는 것보다, 찬란한 천국에서 말 한마리로 살리라고 애타게 바랐는지 모릅니다. 

 

 

 

 

 

 벤은 주로 환자를 돌보면서 틈틈이 시작품을 집필하였습니다. 그는 피부비뇨기과의 의사로 일했습니다. 당시 그가 진료한 병은 주로 매독과 임질과 같은 성병이었습니다. 지금은 살바르산이라는 약이 발달되어 이러한 병은 순식간에 완치되지만, 당시에는 치료약이 개발되지 않고 있었습니다. 시인은 현미경을 들여다보며, 스피로헤타 균을 관찰했는데, 이러한 균을 시민 사회의 병적 징후 내지 흔적이라고 이해했습니다.  

 

 "나는 모든 별 속에서 당신을 선택했어요. Ich habe dich gewaehlt unter allen Sternen." 부제로서 다음의 문구가 첨부되어 있습니다. 시적 방황의 삶. Das Leben der poetischen Nomaden. 유대인 출신의 여류 시인, 엘제 라스커 실러는 벤을 뜨겁게 사랑했지만, 벤은 그미를 에술의 동료로 생각하며, 더 이상 깊은 관계에 빠지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사진은 벤이 자신의 서재에서 시를 쓰고 있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서재의 모습은 전형적으로 시인과 예술가의 작업실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책과 원고가 가지런하지 않다는 것은 이를 반증합니다. 벤은 자신의 시에서 허무주의 그리고 독일 정신 등을 고취시켰는데, 이는 결국 파시스트에게 정치적인 빌미를 제공하게 됩니다. 처음에 그는 아무 것도 모르고 파시즘에 동조하였는데, 나중에는 자신의 이러한 태도를 뼈저리게 후회하였습니다.


Bildergebnis für herta von wedemeyer

 

 

고트프리트 벤은 1938년에 자신의 여비서 헤르타 폰 베데마이어와 결혼하였습니다. 당시 벤의 나이는 52세였고, 헤르타는 31세였습니다. 21년의 나이 차이를 극복한 결혼은 그다지 평탄하지 않았습니다. 벤은 그미로 하여금 자신의 모든 글들을 속기로 받아쓰게 하였고, 타자를 치게 하였습니다. 프리드리히 키틀러에 의하면 1930년대 미국 여성들의 96%가 속기사 내지 비서의 직업을 차지했다고 합니다. 젠더의 차원에서 이는 여성 착취가 직업 전선에서 얼마나 심각했는가? 하는 문제를 드러냅니다. 헤르타는 나이 많은 연인과 세상 사람들과의 갈등으로 오랫동안 번민하였습니다. 그미는 결국 안타깝게도 1945년 모르핀 주사를 맞고 자살하였습니다.

 

 

 

 

 

벤은 어느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습니다. 15년간 (나는 - 역주) 나치에 의해 돼지로, 공산주의자들에 의해서 얼간이로 취급되었고, 민주주의자들에 의해 정신적 창녀로 간주되었네. 망명객들에게는 변절자로, 종교인들에게는 병적인 니힐리스트로 취급당했네.” 베를린 달렘에 위치한 벤의 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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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렘은 베를린 남서부에 자리잡은 지역으로서, 근처에는 베를린 자유대학교가 있습니다.

 

 

 

베를린에 있는 고트프리트 벤의 도서관입니다. 도서관은 지하철 역 첼렌도르프 Zehlendorf 근처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생전에는 가난과 대중들의 외면 그리고 처절한 고독 속에서 살아가지만, 이렇듯 죽은 뒤에 이름을 남깁니다. 마치 호랑이가 자신의 가죽을 후세에 남기듯이.

 

 

 

 

 

 

고트프리트 벤 도서관에는 어린이 도서실도 있습니다. 고트프리트 벤은 "서정시의 제문제"라는 산문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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