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문학 이야기

에테아 호프만, 혹은 분열된 인간

필자 (匹子) 2019. 1. 25. 10:07

 

 

에테아 호프만 (1776 - 1822)은 독일 문학사에서 결코 망각될 수 없는 작가이다. 그는 작가이자, 음악가이며 화가로 활동했다. 그의 본명은 에른스트 테오도르 빌헬름 호프만이었는데, 평소에 음악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를 흠모하여, 자신의 이름을 에른스트 테오도르 아마데우스 호프만으로 명명하였다. 그는 1776년 쾨니히스 베르크에서 어느 변호사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는데, 에테아 호프만이 두 살 때 아버지는 어머니와 이혼하였다. 그래서 그는 어머니와 함께 친할머니 집에서 자랐다. 그가 약간의 왜곡된 성격을 소유하게 된 근본적 배경에는 눈치를 보아야 하는 주위 환경의 영향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에테아 호프만은 1792년에서 1795년 사이에 동프로이센의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였다. 그는 18세기에 횡행하는 프리메이슨의 단체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장미십자단 Rosenkreuzer" 그리고 "광명 단 Illuminatenorden"에 깊이 개입하였다. 이러한 단체는 비밀결사단원의 모임으로서, 자유 평등 그리고 사해동포주의를 표방하고 있었다. 당시에 호프만은 어느 불행한 유부녀 도라 (코라)를 사랑하였다. 그미는 남편에게 버림 받은 채 다섯 명의 아이와 함께 가난하게 살고 있었다. 도라는 호프만보다도 아홉 살 나이가 많았다. 그미는 호프만과 살을 섞어서 여섯 번째 아이를 낳았다. 자고로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않고, 부모의 지극한 사랑을 받지 않는 아이는 불행하고,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다. 나의 말: "아기는 마음대로 낳을 수 있지만, 낳은 아기를 다시 뱃속으로 집어넣지는 못한다." 부디 이 말을 명심하기 바란다.

 

 

 

사진은 프락투르 (Fragtur) 글자로 1831년에 간행된 호프만의 책이다. 에테아 호프만은 법률 사무소 직원, 작곡가, 음악 비평가, 삽화가 화가 등의 다양한 직업을 지닌 작가였다. 그는 평범함과 기괴함, 현실과 상상의 세계 그리고 시민성과 극단적 예술성 사이에서 나타나는 부조화의 상태를 문학적으로 형상화시켰다. 그의 문학은 낭만주의에 속하는데, 때로는 통속적인 기괴 소설을 집필하곤 하였다. 그의 전집은 엄청난 양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의 관심사는 특히 정신병을 앓는 사람들의 행동양상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의 문학에서 시민 사회에서 적응하지 못하는 분열된 인간형의 모습을 자주 발견하곤 한다.

 

 

 

위의 글은 프락투르 글지로 인쇄된 임마누엘 칸트의 "계몽이란 무엇인가?"의 앞부분이다. 한 번 읽어보기 바란다.

 

 

 

 

사진은 소설가 페터 헤르틀링의 "호프만 혹은 복합적인 사랑"의 표지 장면이다.

 

에테아 호프만은 1798년 6월에 법학 국가 시험을 치른 다음에 공무원으로 일하게 된다. 이때 그는 사촌 여동생 미나 되르퍼와  약혼했는데, 정작 배필감으로 선택한 여성은 바르샤바 출신의 아름다운 여성인 마리아 테클라 미할리나였다. 2년 후에 호프만은 바르샤바 궁정 의회에서 일하게 된다. 1806년 나폴레옹 군대가 바르샤바로 진군해 왔을 때 그는 직장을 잃게 된다. 왜냐하면 호프만은 프랑스 군 앞에서 충성을 맹세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뒤이어 8년의 세월을 바르샤바, 밤베르크, 드레스덴 그리고 라이프치히에서 음악 선생, 궁정악장 그리고 극장 소속의 작곡가로 생계를 이어나간다. 밤베르크에서 34세의 호프만은 자신이 성악을 가르치던 13세의 소녀를 사랑하게 된다. 이에 관한 이야기는 페터 헤르틀링 (Peter Härtling, 1933 - )의 소설 "호프만 혹은 복합적인 사랑 Hoffmann und die vielfältige Liebe"에서 자세하게 묘사된 바 있다. 당시에 호프만에게서 성악을 배우던 율리아 마르크는 2년 후인 1812년 12월에 함부르크의 상인 게오르크 그뢰펠과 결혼하게 된다. 그미가 15세라는 이른 나이에 결혼식을 올린 것은 그미의 뱃속에 있는 호프만의 아기 때문이라는 설이 설득력을 지닌다.

 

 

 

 

그림은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의 장면이다. 로버트 스티븐슨 (1850 - 1894)은 소설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 Dr. Jekyll and Hyde"를 집필 발표하였다. 주인공 지킬 박사는 사회적으로 명망 높은 사람인데, 리퍼 살인 사건의 장본인으로 밝혀진다. 그는 비밀리에 다섯 명의 여자를 살해한다. 이 작품은 19세기 시민 사회의 겉다르고 속다른 남자의 이중 인격을 예리하게 포착하여 묘사한 작품이다. 에테아 호프만 역시 위선적인 시민 사회에서 어쩔 수 없이 이중적 가면을 쓰고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겉 다르고 속 다른 인간, 즉 표리부동한 인간은 프로이트 이전의 사회에서는 용납될 수 없었다.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은 이런 방식으로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정반대로 출현할 수 있다. 육백만불의 사나이는 다음과 같이 피맺힌 심정으로 절규한다. "Machen Sie mich nicht wütend. Ich kann sehr böse werden, wenn Sie mich wütend machen." 그 다음에 괴물로 변한다.

 

 

 

 

호프만은 1808년부터 1813년까지 밤베르크에서 음악가, 작가, 화가로 살았다. 낮에는 조용하고 이성적인 인간으로 생활했지만, 밤에는 극단적 유미주의를 실천하며 살았다. 그의 생활은 지킬박사와 하이드씨를 연상시키기에 충분하다. 사진은 밤베르크에 있는 에테아 호프만의 극장의 전경을 보여주고 있다. 예술가는 당대에 외면 당하고 가난과 고독 속에서 살다가, 후세에 빛을 발한다. "죽고난 다음의 영화로움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나는 차라리 작품을 남기지 않는 한이 있더라도 당대에 편안하게 살고 싶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식의 표현으로 자신의 나태함을 합리화시킨다. 그러나 호프만은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불멸의 작품은 현재 내가 처한불행을 상쇄할 정도의 효과를 지닐 것이다."

 

 

 

 

에테아 호프만은 특히 구동독에서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그의 분열된 이중적 삶은 어쩔 수 없이 표리부동하게 살아야 하는 구동독의 지식인의 상과 매우 흡사하기 때문인지 모른다. 당국의 감시로 인하여 지식인과 예술가는 겉 다르고 속 다르게 처신해야 하는 것을 생각해 보라. 우베 텔캄프 그리고 잉고 슐체, 토마스 브루시히 등이 에테아 호프만의 문학을 자주 거론한 것은 결코 우연으로 단정할 수 없다.

 

 

 

 

그림은 브레히트의 민중극 "푼틸라 씨와 그의 하인 마티"의 한 장면이다. 분열된 인간형은 자본주의의 사회에서 자주 출현하곤 한다. 부자인 푼틸라는 지극히 이기적이지만, 술이 들어가면 선량한 인간으로 돌변한다. 깨어 있을 때는 하층민을 철저하게 착취하지만, 만취 상태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모든 자비를 베푸는 것이다. 이러한 분열된 행동은 주위 사람들로 하여금 그의 속내를 간파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요약하건대 자본주의의 황금만능주의는 사람들에게서 신뢰감을 앗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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