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a Lacan

서로박: 라캉의 세미나 I - IV

필자 (匹子) 2016. 8. 2. 11:55

쟈크 라캉 (Jacques Lacan, 1901 - 1981)의 "저작물. 세미나 I/ XI (Écrits. Le séminaire I/ XI)"는 1966년 파리에서 처음 간행되었다. 정신 분석학 연구 모음집에서 라캉은 “인간의 모든 욕망은 다른 사람에게 향한다.”라는 입장에서 출발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본질적으로 어떤 인정받고 싶은 욕망으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갈구하는 자는 자신과 동일한 무엇을 거울을 통해 전달 받음으로써 비로소 인정을 획득한다. 마찬가지로 주체는 내적인 것의 외적인 관계를 통해 하나의 육체로서 인식된다. 자아는 거울의 다른 형태의 상으로부터 이전된다. 다시 말해 라이벌로서의 자아의 상은 주체를 추방시킨다. 따라서 “나를 이해하기 (Me connaître)” 는 항상 “오해하기 (méconnaître)”를 지칭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인간의 “초기 성숙 (Prämaturation)”은 (동물과 구분될 수 없는) 상상적인 것을 분열시키게 한다. 또한 그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상상적인 것과 공생 (共生)하도록 작용한다. 인간은 자아의 상속에서 자신의 소외된 단일성을 발견하지만, 욕망을 통해서 균열된 자신의 모습을 깨닫는다. 이는 “어떤 생물학적 비적응성”의 표현인데, 자신의 존재가 언어를 통해 표출시키는 것이다. 

 

무릇 자신을 순응시키지 않으려는 태도는 고통을 동반하는 법이다. 이는 어린이들의 장난과 유희에서 끝없이 반복되어 나타난다. 가령 주체는 “자신의 고립화”를 모방하며, 어머니 없음에 대해 화답한다. 놀이에 수반되는 소리 속에는 결핍을 명명하는 상징적인 것이 드러난다. 

 

그리하여 인간 존재는 “어머니를 잃었다”는 상징성속에서 기초를 두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라캉은 “쾌락 원칙을 넘어선 저편의 영역은 어떠한가?”라는 프로이트의 질문에 대해 대답한다. 죽음 충동은 라캉에 의하면 실현되지 않은, 다시 말해 인정받지 못한, 무언 (無言)의 상징적 질서로 향한다.

 

따라서 라캉의 정신 분석학은 (이른바 상상적인 것이 상징화되어 있는) 말들을 서로 교환함으로써 수행된다. 그러니까 정신분석학적 대화에 담긴 상상적인 것은 거짓된 상을 해체시킨다고 한다. 라캉은 하나의 증상을 주체속의 어떤 무언의 존재로서 파악하며, 이를 분석의 과제로 삼는다. “우리는 말하면서 주체를 재집결시켜야 한다.” 

 

라캉의 정신 분석학은 한마디로 해석학이 아니다. “해석 속에서 의미를 찾아내려는 효과는 없으며, 오히려 증상속의 의미심장함의 (모든 의미 내용 없는) 표현만이 중요하게 작용할 뿐이다.” 라캉은 주장한다. “말하기는 주체의 잘못 인식된 부분의 자궁이다.” (라캉은 주체가 처음부터 한결같이 자신을 인식하고 있지 않는 것을 전제로 삼고 있다.) 그는 말하기가 타자의 장소로부터 전해지는 것임을 확신하고 있다.

 

라캉의 분석은 주체를 어떤 욕망의 언어 속으로 도입한다. “첫 번째 언어 (langage premier)”는 언어적 측면에서는 우주적이긴 하나, 욕망의 표출 내지 인간화 행위의 측면에서 고찰할 때 주체의 급진적 특수성이기도 하다. 라캉은 무의식의 영역을 (누군가 말을 꺼내려 할 때의) 언어 효과의 영역으로 간주한다. 

 

여기서 언어란 말하기와 동일하지 않고, 의사소통으로 축소화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말하기는 주체와 타자 사이를 중개할 뿐 아니라, (표현 기능을 왜곡함으로써 일탈되는) 무의식적인 것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무의식적으로 구성되는 것은 오로지 (주체에게 자신의 신분을 부여하는) 말하기의 효과에 불과하다. 따라서 무의식은 하나의 언어로 구조화되어 있으며, 이 경우 주체는 타자에 속할 뿐이다.

 

정보의 일원체로 측정될 수 있는 우주적 시스템으로서의 언어는 때로는 언어의 “부분적 파롤 (parole particulière)”을 드러내는데, “정보 전달에 불필요한 언어적 부분 (Redundanz)”이 일탈되어 나옴으로써 나머지 기능을 행한다. 그러니까 언어는 여기서 정보 전달이 아니라, 소환의 기능을 행하고 있다. 

 

완전히 말하기라는 라캉의 개념은 주체의 진리를 실현시키는 매개체이다. 이에 비하면 단순히 말하는 행위는 -언어가 체계로서, 문화가 “선험적 무엇 (a priori)”, 다시 말해 익명성으로서 드러나고 있는 한에서는- 공허할 뿐이다.

 

말하기의 두 가지 양태는 때때로 서로 간섭하고, 의미 고리를 차단시킨다. 이를테면 대화가 중단되는 경우는 바로 그러한 교차점에 해당한다. 라캉은 무의미한 내용 속에서 주체의 진리를 풀어헤치는 작업을 정신 분석학의 과제로 삼고 있다. 대화 내지는 발언 속에 매듭지어진 고리 속에는 어떤 숨겨진 의미가 도사리고 있지 않는가?

 

(진리의 추적은 라깡의 경우 말하기로 귀결된다. 말하는 행위의 고유한 특성은 토론 속에서가 아니라, 토론의 차단 내지는 방해 속에서 드러난다. 라캉에게 중요한 것은 말하기 행위 내에서 토론의 한계를 벗어나는 무엇이다. 왜냐면 말하는 주체는 언제나 토론의 주체로부터 일탈되어 있기 때문이다.) 라캉에 의하면 인간의 영혼은 상징계, 상상계 그리고 실제라는 세 가지 구조의 매듭 속에 자리하고 있다. 라캉은 이 공간을 보로매우스의 매듭이라고 명명한다.

 

문학 이론상으로 고찰할 때 라캉의 이론은 후기 구조주의 및 해체 이론 등의 시각을 수용하였다. 무의식을 말하기 행위로 끌어내어 동일한 차원에서 고찰하는 라캉의 태도는 많은 취약점을 내포하고 있다. 무의식의 공간은 오히려 언어 이전의 여백으로 설명될 수 있으며, 무의식이란 -빌헬름 라이히가 지적했듯이- 오히려 검열의 사회적 심리적 터부 속에서 비언어적 행동 양상 (제스처, 표정 등의 육체 언어)으로 표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라캉의 글은 전통적 해석학이 지향하는 의미 중심적 해석 작업을 거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