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나의 글

서로박: 문학을 공부하는 젊은이에게

필자 (匹子) 2020. 11. 28. 10:14

고등학교 수업이 담수어 양식이라면, 대학 수업은 바다 양식이다. 고등학교에서 물고기는 건네주는 먹이 먹고 강 따라 헤엄치면 그만이지만, 대학에서는 스스로 먹이를 찾아먹어야 하고, 망망대해에서 제 갈 길 찾아야 한다.“ (서로박)

 

1.

친애하는 J, 문학 이론을 가르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문학을 통해서 경험의 폭을 넓히는 것이 교육상 더 효과적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젊은 사람들은 (죄송한 말입니다만) 마치 길들여지지 않은 셰퍼드 개처럼 영특하지만, 그들에게는 아직 삶과 문학에 대한 어떤 안목이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가급적이면 다양한 주제를 담은 작품들을 수업 시간에 곁들여 다루곤 합니다. 작품들 가운데에는 사랑과 섹스에 관한 것들, 계급투쟁과 노동 해방에 관한 것들, 여성 문제, 환경 문제, 사회적 갈등과 한계 상황을 다룬 것들, 심지어는 살인에 관한 것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작품들을 접하면서, 우리는 스스로 등장인물이 되어 문학적 현실 속으로 빠져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문학 작품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처지를 가급적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만약 “나는 이들과는 무관해.”하고 생각하며, 더 이상 타인, 문학적 인물들의 처지나 상황에 관한 생각을 포기한다면, 당신은 수업을 통하여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할 것입니다. 몸 파는 여자, 계급투쟁의 혁명가가 당신과 무관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순간, 당신은 문학 수업 자체를 지루하게 느낄 것입니다. “대충 강의 듣고 학점만 따면 족해.” 하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마음먹는다면, 당신은 소시민의 좁은, 상투적 세계에 안주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비판의식을 잃어서는 안 되겠지만, 모든 선입견을 버리고 어떤 다른 세계 속으로 스스로 뛰어들지 않는다면, 우리에게는 더 이상의 발전이 주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2.

 

친애하는 J, 문학은 지루하거나 권태로운 학문이 아닙니다. 문학은 다른 학문과는 달리 예술적 특성을 지니며, 무엇보다도 사고의 융통성을 활성화시켜주는 학문입니다. 가령 인문학의 문사철 가운데 역사는 사실적 엄밀성을, 철학은 논리적 철저함을 추구하지요. 그렇지만 문학은 있을 수 있는 가상적 현실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으므로, 겉보기에는 학문의 엄밀성과 정반대되는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자고로 문학은 자신의 입장과 반대되는 자의 시각에서 자신과 대상을 바라보게 하는 학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학 행위는 지금까지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놀라운 착상 (Aperçu)을 떠올리게 해주고, 지금까지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을 의심하게 해줍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문학 (文学)”은 “학문 (学文)”을 뒤집어쓴 표현 그대로 모든 학문의 앞에서 학문을 주도합니다. 비록 오늘날 문학이 모든 학문 분야 그리고 삶의 분야에서 마치 천덕꾸러기처럼 하찮은 것으로 취급받고 있다 하더라도, 문학의 중요성은 무엇과 비할 수 없습니다. 가령 물과 공기가 인간에게 그렇게도 중요하지만, 한 푼의 돈으로도 환산되지 않는 것과 같은 논리입니다.

 

3.

 

논의에서 벗어난 이야기이지만, 나는 히포크라테스의 인간의 네 가지 구분을 생각합니다. 다혈질, 담즙질, 점액질 그리고 우울질이 그러한 유형들입니다. 이는 인간을 태양인, 소양인, 태음인 그리고 소음인으로 나눈 이제마의 사상의학과 놀라운 정도로 유사합니다. 히포크라테스와 이제마가 서로 만난 적도 서로 책을 교환한 적이 없는 데도 말입니다. 이를테면 태양인은 다혈질 인간 (sanguinisch)과 거의 같습니다. 소양인은 담즙질 (gallig) 인간과 거의 동일합니다. 태음인은 점액질 (phlegmatisch) 인간과 거의 다를 바 없습니다. 소음인은 비위가 약한 우울질 (melacholisch) 인간과 대동소이합니다.

 

이를테면 다혈질 인간은 빨리 화를 내고 빨리 모든 것을 잊어버립니다. 담즙질 인간은 빨리 화를 내고 모든 것을 늦게 잊어버립니다. 이에 비하면 점액질 인간은 늦게 화를 내고 모든 것을 빨리 망각하는 편입니다. 이에 반해 우울질 인간은 늦게 화를 내지만, 화를 금방 잊어버리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이러한 유형들 가운데 누가 바람직한 인간 유형일까요? 심리적 질병과 스트레스를 고려할 때 당신은 아마도 점액질의 인간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시겠지요? 화도 덜 내고, 설령 노여움을 느끼더라도 금방 떨칠 수 있기 때문에 말입니다.

 

4.

 

그러나 문학을 공부하는 데 있어서 가장 부적절한 인간형은 오히려 점액질 인간입니다. 물론 나는 사상의학 그리고 히포크라테스의 인간 유형을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습니다. 수십억의 인간을 불과 네 개의 카테고리에 편입시킨다는 게 그 자체 작위적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점액질의 인간은 대체로 느리고 무딥니다. 이들은 문학과 예술이 전해주는 수많은 유형의 크고 작은 오르가슴을 제대로 느끼지 못합니다. 물론 점액질의 인간이 다 그런 것이 아니고, 다른 유형의 인간들 가운데 예술에 대한 불감증 환자들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대체로 점액질 유형은 문학과 예술에 대해 커다란 감흥을 느끼지 못합니다. 대신에 다른 방면에서 그들은 강점을 보일 수 있습니다.

 

5.

 

친애하는 J, 브레히트는 자신의 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습니다. “무언가가 예술이 아니거나, 누군가 예술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대한 결코 거짓되지 않은 표시는 지루함이다. 예술은 그렇게 격정적이고, 때로는 향유와 같다. 예술은 교육을 위한 수단이어야 하지만, 그 목적은 향유이다.” 문제는 개별 사람들의 미적 감식 능력입니다.

 

어째서 한 인간이 아름다운 시를 읽을 때 그렇게도 짜릿함을 느끼는 반면에, 다른 인간은 그저 하품만 터뜨릴까요? 어째서 몇몇 사람들은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선율에 무릎을 치며 탄복을 터뜨리는 반면에, 다른 사람들은 어째서 지리멸렬한 음에 꾸벅꾸벅 조는 것일까요? 과연 인간이 어떻게 이렇게 다를 수 있단 말입니까? 이중섭의 그림이 미술관에 걸려 있습니다. 몇 작품 속에는 인류가 갈구하는 영원한 유토피아의 장소가 담겨 있는데, 왜 극소수만이 미술관을 찾을까요? 친애하는 J, 어떻게 하면 예술적 불감증 환자가 치유될 수 있을까요? 풍요로운 정서를 활성화시키는 연습은 어떻게 진척되어야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