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나의 잡글

우리가 선호하는 학문 연구의 나쁜 경향

필자 (匹子) 2020. 11. 9. 11:50

 

S씨, 한국인들이 선호하는 나쁜 (?) 학문적 경향은 대체로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첫째로, 난해한 학문입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것일수록, 세인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킵니다. 사람들은 쉽게 이해되는 것에 대해 코웃음 치며, 이를 경시합니다. 무릇 인간은 이해할 수 없는 무엇을 대하게 되면, 그 속에 어떤 사상적 깊이가 내재해 있다고 지레 짐작하는 성향을 지니고 있습니다. 어떤 알 수 없는 신비로움은 인간으로 하여금 궁금증과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일까요?

 

그렇기에 사람들은 그 무엇에 대한 본질을 파악하려고 열심히 노력합니다. 그러나 나중에 그 무엇에 대한 본질을 파악하게 되면, 사람들은 실망에 가득 찬 채 중얼거리지요. “아, 내가 이따위 것을 알려고 그렇게 노력했다니.”하고 말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난해한 신비로움에 무조건 맹종하기보다는, 쉽사리 이해되는 학문적 대상에 대해 다른 새로운 의미를 밝혀나가는 작업을 선호해야 할지 모릅니다.

 

 하기야 난해성 자체가 문제가 아닙니다. 무릇 인간의 의식에 비해 인간의 어휘는 불충분하니까요. 원래 언어란 인간의 의식을 모조리 포괄할 수 있는 형식이 되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자신의 생각을 보다 정확하게 문자화시키려는 작가의 노력은 어쩔 수 없이 난해한 작품을 출현하게 하지요. 그러나 쉽게 표현할 수 있는데도, 일부러 복잡하고 난해하게 기술하려는 학문적 태도는 잘못된 것입니다.

 

모든 것을 은폐시키려는 학문적 치장주의, 아는 바를 상세히 거론하는 반면, 모르는 바를 슬쩍 회피하려는 학문의 신비주의적 경향을 생각해 보세요. 당신은 우리나라에서 학문적 치장주의 내지 학문적 신비주의가 얼마나 만연하고 있는 것을 아십니까? 그렇기에 한국 사람들은 -일본 사람들과는 달리- 얇은 책보다 두꺼운 책을 선호하는지 모릅니다.

 

둘째로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체로 복잡한 조직 체계를 지닌 학문적 경향을 좋아합니다. 예컨대 칸트, 헤겔은 철학과에서 필수 과목인 반면에, 키르케고르 그리고 블로흐 등은 선택 과목에 수용되지도 않습니다. 루이 알튀세르가 정치 경제학에서 심도 있게 논의되는 반면에, 앙리 르페브르는 그저 들러리로 취급되지요.

 

독문학 계에서 토마스 만에 대한 연구는 활발하나, 브레히트 연구는 그렇지 못합니다. 왜 사람들은 난해하고 복잡한 조직 체계를 갖춘 이론을 중요시할까요? 복잡한 조직 체계 및 정통성에서 벗어난, 명징한 학문적 경향은 어째서 외면당하는 것일까요?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문제를 생각해 보세요. 오늘날 학문적 영역이 인간 삶의 영역의 필수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인간 삶의 영역 가운데 과연 몇 퍼센트가 어떤 학문적 이론에 의해서 규정될 수 있을까요? 오히려 학문적 이론으로 기술될 수 없는 인간 삶의 영역은 엄청나지 않는가요? 이론이란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사다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으십시오. 당신은 그게 제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필수 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그렇기에 지붕 위에 올라간 사람은 “사다리”를 버릴 줄 알아야 합니다. 복잡한 조직 체계를 중시하는 태도는 학문적인 완벽함을 찾아내려는 자세와 직결됩니다.

 

그러나 완벽한 학문적 내용이 과연 존재하는가요? 만약 그게 존재한다면 학문사 (学文史)는 기술될 수 없을 것입니다. 게다가 완벽한 무엇을 추구하려는 인간의 습성은 때로는 스스로 완벽한 자가 되고 싶은 욕망에서 기인하지요. 자신을 스스로 교육시키지 못한 사람이 교육자가 되고, 심리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이 심리학자가 되는 것을 생각해 보세요. 완벽을 추구하려는 인간의 습성은 예외적, 단편적이고, 특수한 무엇보다는 오히려 원칙적이고, 종합적이며, 보편적인 무엇을 선호하게 합니다. 그러나 학문은 자신이 이룩하지 못한 바를 보상하기 위한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비트겐슈타인의 캐리커쳐 

  

내가 훌륭한 문학 작품에 비해 문학 이론 자체를 그다지 탐탁하지 않게 생각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즉 문학 이론은 문학 작품에 비하면 복잡한 습득 과정을 요구하나, 그 결론은 하나의 특정한 논리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의 특정한 논리를 깨달으면, 그것으로 끝나는 게 바로 문학 이론입니다. 이에 비하면 문학 작품은 비교적 수월하게 이해되나,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지요. 무엇보다도 이 점 때문에 나는 강내희 선생이 이끄는 "문화 과학"의 작업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이러한 작업 방향에 전적으로 동조할 수 없습니다.

 

"문화 과학"은 예술 작품보다도 예술 내지는 문화 이론을 강조하니까요. 나에게 중요한 사항은 개별적 문학 작품들 가운데에서 어떻게 탁월한 가치를 추출해내느냐? 하는 물음입니다. 다양하고 복합적 이론적 논의 자체보다는, 그것이 사회적 현실에 얼마나 커다란 효용가치를 지니고 있는가? 하는 물음이 나에게 중요합니다.

 

셋째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선호하는 학문적 경향은 변혁을 의도하는 것이 아니라, 전통적이며 금욕적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나라의 사회 구조 내지는 세계관이 전통을 중시하고 인간 삶을 억압하는 데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존경하는 한국의 어느 철학자의 책에는 프로이트에 관해 한마디도 언급되어 있지 않더군요. 20세기를 변혁시킨 두 사람의 학자는 바로 마르크스와 프로이트가 아니던가요?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어쩌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만큼 국가, 종교 그리고 부권이라는 권위주의적 체계에 무의식적으로 종속되어 있습니다. 어쩌면 이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개개인의 고유한 입장과 의향보다는 고매한 학자의 지식 자체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전통적 관습, 도덕, 법 등의 구조에 너무 강하게 억눌림을 당하고 살아왔다는 사실도 여기서 무시할 수 없지요. 학문은 인간 삶과 등을 돌린 영역이어서는 안 됩니다.

 

논의에서 벗어난 감이 없지 않지만 -김용옥 교수도 지적한 바 있듯이- 우리나라는 아직도 유교적 사회 구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가령 결혼, 취직, 장례식 등 모든 일들이 대가족의 입장에서 영위될 뿐, 개개인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생각해 보세요. (우리나라에서는 기껏해야 씨족 민주주의를 개발할 수 있으나, 소위 서양의 개인적 이해에서 근거한 민주주의를 창조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풍토 속에서 한국 학자들이 전통적이고 안정된 체제를 중시하는 학문을 선호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 모릅니다.

 

그게 아니라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오랫동안 무의식적으로 반공 이데올로기악영향을 받았는지도 모르지요. 원래 도전적이고 사회 개혁적인 학문은 주어진 이데올로기의 강한 도전을 받지 않습니까? 상류층의 기성세대의 이데올로기를 위배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모든 학문 행위가 허용될 뿐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세요. 도덕, 종교 심지어는 법조차도 상류층 내지는 윗사람을 위한 강령으로 사용되었음을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S 씨, 모든 것을 회색빛으로 파악하는 난해한 학문, 무의식적으로 체제 옹호에 기여하는 체계적 조직적 학문, 인간 삶을 억압하는 데 기여하는 전통적인 학문 등은 한마디로 이데올로기와 같습니다. 이러한 학문에 대한 집착은 권위주의에 예속된 성향이 아닐까요? 따라서 이는 반드시 개선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새롭고 낯선 학문이 다원주의적으로 수용되고, 발전 내지는 진척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한국 사회에서 횡행하는 이러한 세 가지 학문적 풍토가 타파되지 않으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유의 이념과 창조적 정신으로부터 영원히 멀어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