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근대불문헌

서로박: 생시몽의 중앙집권 체제의 유토피아 (2)

필자 (匹子) 2021. 7. 14. 11:32

친애하는 S, 생시몽의 상기한 요구사항은 19세기 초 복고주의의 정치적 경제적 분위기를 고려하여 출현한 것입니다. 당시에 프랑스 혁명의 결과로 귀족과 수사 계급이 상당 부분 자신의 기득권과 재산을 상실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나폴레옹이 권력을 장악하게 되자, 프랑스 전역에서는 신흥 군부 귀족들이 다시금 많은 재화를 되찾아서 이를 축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정신사적 차원에서 당시에 출현한 낭만주의 운동은 복고주의적인 가톨릭주의에 막강한 가치를 부여했는데, 이로 인하여 사제 계급이 다시금 대접받게 되었습니다. 프랑스는 혁명이 발발한 뒤에도 여전히 농업 중심의 경제구조를 타파할 수 없었으며, 국민의 의식 구조 역시 낙후해 있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까닭에 프랑스 국민들은 봉건 국가의 권력을 당연하게 받아들였으며, 폭정을 휘두르는 왕권을 천부적으로 주어진 무엇으로 수용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입장은 1830년 7월 혁명이 발발할 때까지 지속됩니다. 생시몽은 당시의 정치적인 위기 현상을 하나의 과도기로 파악하였습니다. 말하자면 과거의 사회 시스템이 봉건적이고 신정주의 체제로 이루어져 있었다면, 프랑스 사회의 시스템은 차제에는 과학적 산업적인 체제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게 그의 입장이었지요. 그래서 생시몽은 프랑스가 계속 진부하기 이를 데 없는 봉건적 농업국가로 정체되어 있지 말고, 산업의 새로운 기능을 되찾아야 한다고 역설하였던 것입니다.

 

19세기 초의 프랑스에서 시민주의의 사업이라든가 자본주의의 경영 방식은 영국의 경우에 비해서 활발하게 진척되지 않았으며, 그저 과거의 단체적 질서 속에서 미약할 정도로 추진되기 시작했습니다. 생시몽은 바로 이러한 상황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무엇보다도 새로운 산업 시스템에 활력을 불어넣으려 했습니다. 그는 한편으로는 산업 시스템이 폭넓게 확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봉건적 토지경제, 소작의 특권 그리고 관세의 특권에 대해 신랄한 비난을 가했습니다.

 

생시몽은 다음과 같이 독설을 퍼부었습니다. 즉 지금까지 유효했던 봉건적 소유권은 앞으로는 자유주의의 사유 재산권으로 바뀌어야 하며, 지금까지 사회 구조의 병폐로 자리했던 연금에 대한 잘못된 법령은 반드시 수정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생시몽은 당시 프랑스의 연금제도를 강도 높게 비판하였으며, 하나의 계획을 세웁니다. 이러한 계획은 다름 아니라 연금에 의존하던 귀족계층의 사람들로 하여금 직접 산업전선에 직접 참여하여 노동하게 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귀족들도 더 이상 놀면서 빈둥거릴 게 아니라, 현대의 기술적 지식을 쌓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생시몽은 성장하는 시민 계급이 지니고 있었던 “행정의 능력 capacité administrative”를 찬양하였습니다. 이를테면 은행가는 금융의 활성화를 도모하지만, 나아가 인민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인민이 주도하는 산업 공동체의 관리자가 되어야 하는 사람은 다름 아니라 은행가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생시몽의 제자, 바자르 Bazard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습니다. 즉 마치 기생충처럼 사회적 부를 착복하는 봉건 귀족의 돈을 빼앗을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은행가들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국가 당국이 은행가들을 발탁하여 이들로 하여금, 모든 것을 관리하게 하는 조처는 생시몽에 의하면 바람직하다고 합니다.

 

생시몽은 아무런 조건 없는 인간 평등을 주창하지는 않았습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평등의 원칙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산업을 지속적으로 추구하며 자유 경쟁을 도모하는 경제체제였습니다. 이 점을 고려한다면 생시몽은 사회주의의 이론에 가깝다기보다는 (당시에 사회주의 사상은 아직 태동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프랑스의 고전적 사회이론가, 장 밥티스트 세 Jean Baptiste Say 그리고 아담 스미스 Adam Smith에 근친하는 이론가입니다. 이를테면 장 밥티스트 세는 자유로운 경제 활동을 위해서 어떻게 해서든 국가의 권한 (이를테면 과도한 세금 징수)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생시몽은 이러한 입장을 아무런 조건 없이 채택하고 있습니다. 이 점을 고려한다면 생시몽의 이론은 엄밀히 따지면 마르크스주의가 발전시킨 혁명적 사회철학의 유형이라기보다는, 마르크스 이전에 나타난 개혁적이고 자유주의적인 국가이론이며, 개혁적 자유주의 경제 이론 내지 사회 이론의 유형에 해당합니다.

 

생시몽은 다만 분배에 있어서 어느 정도 사회주의의 입장을 견지했습니다. 이를테면 생시몽의 산업주의는 사회적으로 생산된 재화를 공정하게 분배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생시몽이 처음부터 중앙집권적이고 인위적인 계획 경제를 주창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지 착취 내지는 부당한 방법으로 재화를 착복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사회 정치적인 조처 내지는 인민 모두의 이익을 위한 방안을 진지하게 추적했을 뿐입니다. 생시몽은 인간 개개인의 관심사가 조금씩 다르며, 노동의 대가가 철저할 정도로 정확히 분배될 수 없음을 하나의 문제점으로 간주하였습니다.

 

그는 지식인의 관점에서 막연히 기독교적인 박애주의로 가난한 이웃들에게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의 방책이 아니라, 휴머니즘적 자세만이 19세기 초 프랑스에서 두 손 외에는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는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다고 생시몽은 판단했습니다. 사업가가 행해야 하는 과업은 생시몽의 견해에 의하면 오로지 노동 계급을 해방시키는 일이라고 합니다. 산업 시스템의 형성은 모든 사업가의 조직과 결성을 통해서 무엇보다도 먼저 추진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주도적으로 이끌 수 있는 사람은 생시몽에 의하면 행정 능력을 지닌 은행가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생시몽은 나중에 기독교의 원칙이 산업가들에게 어떠한 역할을 담당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천착하였습니다. 1825년 미완성으로 집필된 『새로운 기독교 Nouveau christianisme』는 이웃 사랑의 의미를 세부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수사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막강한 권한을 포기하고, 신앙을 추구하는 등 초심을 되찾아야 한다고 합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이웃 사랑이며 평화로운 생활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수많은 노동자들을 경제적으로 지지할 수 있는 것은 경제적 풍요로움이라면, 그들을 심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지지할 수 있는 것은 평화주의의 행동 방식이라고 합니다. 생시몽은 이렇듯 사회 구성원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경제적 요인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비록 프랑스 사람들의 궁핍함이 당대의 경제적 문제 뿐 아니라, 17세기로부터 이어져온 사회 계급의 적대적 상황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지만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