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음악 이야기

빅토르 하라 Victor Jara, 끝나지 않은 감동 (2)

필자 (匹子) 2023. 1. 24. 07:54

 

 

 

 

 

 롱켄 마을

 

다음은 하라의 자작시이자 노래인 「올가미 (El Lazo)」입니다.

 

 

태양이 내려앉을 때 Cuando el sol se inclinabe

롱켄에 있는 lo encontré

어느 암울한 오두막에서 En un rancho sombrio

나는 그를 발견했지. de Lonquén.

어느 비참한 오두막에서 En un rancho de pobre

나는 그를 발견했지. lo encontré

롱켄에서 Cuando el sol se inclinaba

태양이 내려앉을 때 en Lonquén.

 

그의 오래된 손들은 Sus manos siendo tan vieja

타래 엮을 정도로 강했지 eran fuertes para trenza

거칠고도 부드러웠지, eran rudas y eran tiernas

동물의 피부와 같이. con el cuero del animal.

올가미는 마치 뱀처럼 El lazo como serpiente

호두나무에 감겼고 se en roscaba en el nogal

모든 고리에는 그의 삶 y en cada lazo al huella

그의 빵의 흔적 있었지. de su vida y de su pan.

 

그의 손과 사라진 눈빛에는 Cuando tiempo hay en sus manos

얼마나 많은 시간이 있을까? y en su apagado mirar

“좋아”라고 말한 자는 없어. y nadie ha dicho, esta bueno

넌 더 이상 일할 필요 없어. y a no debes trabajar

그림자들은 하루의 마지막 Las sombras vienen laceando

빛을 얼기설기 엮는다. la última luz del dia.

노파는 기쁨을 억누르려 El viejo trenza unos versos

한 편의 시를 읊는다. pa maniatar la alegria.

 

그의 올가미는 남과 북, Sus lazos han recorrido

산과 바다 스치고, 허나 sur y norte, cerro y mar

노파는 이해하지 못했어, pero el viejo la distancia

소외가 실제로 무엇인가를. nunca la supo explicar.

그는 삶을 맡겼어, 호두 Su vida deja en los lazos

나무에 매듭진 올가미에. aferrados al nogal.

후에는 죽음이 찾아와 Dispues liegerá la muerte

그를 묶어두게 되겠지. y tambien lo laceara

 

단단히 매여 있는가, 영원이 Que importa si el lazo es firme

머무르는가가 중요할까? y dura la eternidad

어느 작은 땅뙈기에서 laceando por algún campo

노파는 마침내 휴식하겠지. el viejo descansara.

 

태양이 내려앉을 때 Cuando el sol se inclinabe

롱켄에 있는 lo encontré

어느 암울한 오두막에서 En un rancho sombrio

나는 그를 발견했지. de Lonquén.

어느 비참한 오두막에서 En un rancho de pobre

나는 그를 발견했지. lo encontré

롱켄에서 Cuando el sol se inclinaba

태양이 내려앉을 때 en Lonquén. (서로박 역)

 

 다음을 클릭하면 음악을 들을 수 있습니다.(3분 43초)

 

https://www.youtube.com/watch?v=5Vixw-_Mlt8

 

작품의 배경은 자전적인 삶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롱켄은 빅토르 하라의 버림받은 고향을 가리킵니다. 그곳에는 60년 말기에 이르러 더 이상 사람들이 많이 거주하지 않습니다. 시인은 황폐하게 변한 고향에 대해 아쉬움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찢어지게 가난한 삶, 더 이상 기대할 게 없는 어느 남자는 자신의 목을 올가미에 걸고, 한 많은 목숨을 끊어버립니다. 그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노동과 굶주림밖에 없습니다. 노파에게는 한 남자 (그미의 아들일까요?) 죽음을 애도할 정도의 혈기마저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일상의 기쁨을 자연스럽게 드러낼 만큼의 여유도 없습니다. 그미에게 남은 것은 고작 고통과 일상의 순간적 즐거움을 떨치기 위해 시구를 읊조리는 일밖에 어무 것도 없지요. 시인은 극도의 노여움을 억누르면서, 자신의 고향이 얼마나 황폐해졌는가를 처절하게 노래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어떻게 하든 대도시로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힘들게 일하더라도 그곳에서 머물면, 최소한 빵값 만큼은 벌 수 있을 테니까요. 과연 누가 여자들과 아이들로 하여금 마을을 떠나게 만들었을까요? 그는 다름 아니라 칠레의 토착 군부세력 그리고 이들을 뒤에서 조종하는 CIA 간부들이었습니다.

 

 

아옌데 대통령

 

아니나 다를까요. 칠레의 친미 군부 세력의 선두주자인 피노체트는 1973년에 쿠데타를 일으킵니다. 인민의 직접 선거로 당선된 대통령 살바토르 아옌데 (Salvator Allende, 1908 - 1973)는 권좌에서 물러나게 되고,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과연 미국의 CIA가 칠레 대통령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것일까요? 심증은 있으나 물적 증거는 아직도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모든 게 소문으로 나돌고 있을 뿐이지요. 칠레의 인민들은 대대적으로 데모를 벌입니다. 빅토르 하라는 동료들과 함께 독재자의 잔인한 폭력에 맞섭니다. 그는 군중들 사이에서 저항의 노래를 부릅니다.

 

1973년 9월 12일 칠레의 군부정권은 산티아고에 있는 어느 기술대학 캠퍼스에서 시인을 체포합니다. 빅토르 하라는 혹독하게 고문당합니다. 고문 담당관은 더 이상 빅토르 하라가 기타를 치지 못하도록 시인의 오른손에 개머리판을 내려쳐서, 완전히 뭉개버립니다. 이때 시인의 오른 손은 마치 피범벅이 된 불가사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언젠가 황지우 시인이 들었던 말이 생각납니다. “너 같은 예술가 몸뚱어리 하나쯤이야 얼마든지 오징어포로 만들 수 있어.” 오늘날 김근태 국회의원을 끝까지 고문했던 고문기술자 이근안을 어느 누구도 기억하지 않습니다. ㅠㅠ 한 달 후에 빅토르 하라는 고문실에서 풀려납니다.

 

 

 빅토르 하라가 있던 올림픽 경기장

 

하라는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는 붕대 감긴 오른손에다 플라스틱 피크를 첨부하여, 기타를 연습하였습니다. 비록 손가락이 심하게 다쳐, 트레몰로 기법으로 기타를 연주할 수는 없었지만, 최소한의 음악 반주는 가능했던 것입니다. 어리석은 군인들은 기타 연주에 있어서 왼손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미처 알지 못했습니다. 1973년 말에 그는 산티아고의 공설 운동장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빅토르 하라는 공설 운동장에 운집한 사람들이 자신의 노래를 듣고, “빈세레모스 (Venceremos: 우리는 승리하리라)”고 외칠 것을 희망하였습니다.

 

그러나 독재자 피노체트는 어느새 이를 알아차리고는 “백골을 뒤집어쓴 개들 (전투경찰대원들)”을 풀어서, 운집한 사람들에게 매질을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와중에서 빅토르 하라의 기타는 짓밟히고, 시인의 머리통이 깨어졌습니다. 사람들의 피가 하늘 위로 솟구쳤습니다. 그때 누군가 음유시인에게 총격을 가합니다. 빅토르 하라는 총을 맞고 그 자리에 쓰러집니다. 누군가 그를 병원으로 이송했을 때, 그는 이미 유명을 달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래, 빅토르 하라는 그런 식으로 살해당하고 말았습니다. 2004년 12월 9일에 산티아고의 판사는 음유 시인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발포하여 살해하게 한 혐의로 퇴역 장성, 마리오 만리케스 브라보를 고소하였습니다.

 

 

 

무심한 부산 역 광장

 

1973년에 나는 어디서 무얼 하고 있었을까요? 부산 어느 대학의 신입생은 신문의 사회면에서 빅토르 하라의 체포 소식을 읽고 있었습니다. 당시 박정희 군부는 언론과 방송을 장악하여 국내의 반정부적 소식을 차단시켰지만, 해외의 소식에 대해서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칠레의 음유 시인에 관한 소식을 신문의 사회면에 실릴 수 있었는지 모릅니다. 이는 어쩌면 당시 D일보의 양심 있는 기자의 행위 덕분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바로 그해 겨울에 빅토르 하라는 비참하게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부음 소식은 신문 지상을 통해서 전해지지 않았습니다.

 

박정희 당국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는지는 몰라도, 칠레의 민주화 운동에 관한 보도를 금지했던 것입니다. 하라가 목숨을 잃었을 때, 나는 어디 있었을까요? 음악실에 앉아서 마치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름다운 아가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요? 아니면 부산 역 광장에서 데모하고 있었을까요? 글쎄, 잘 기억나지 않는군요. 12월 초의 어느 날 나는 친구들과 함께 부산 역 앞에서 유신을 반대하는 데모에 참가한 적은 있습니다. 전투경찰은 데모하는 학생들에게 최루탄을 쏘았습니다. 그때 나는 재채기를 연발하면서 전투 경찰에 쫓겨서, 초량동 골목을 정신없이 달리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이었을까요, 빅토르 하라가 살해당한 시각이?

 

 

 

 

 

러시아 거리로 변한 초량의 텍사스 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