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음악 이야기

빅토르 하라 Victor Jara, 끝나지 않는 감동 (1)

필자 (匹子) 2023. 1. 24. 07:54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상황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무고한 사람들이 총에 맞아서 죽고, 부녀자들이 성난 군인들에 의해 난자당하는 경우일 것입니다. 상식을 지닌 인간이 이러한 참혹한 광경을 대한다면,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것을 체험할 것입니다. 지옥이 따로 없을 테니까. 1980년 광주에서 그리고 그 이전인 1966년에 콜롬비아의 보고타에서 살육이 자행되었습니다. 1966년 보고타에서 성직자 한 사람이 장총을 겨누고 발포하려 합니다. 카밀로 토레스의 마지막 모습은 언론에 공개되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부모형제가 죄없이 총에 맞아 죽었는데, 이를 복수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성직자라고 해서 어찌 다르게 생각할까요? 국가가 정당하게 보복하지 않을 경우, 우리 스스로 부모형제의 원수를 갚으려고 나설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래, 콜롬비아의 신부인 카밀로 토레스 (Camilo Torres, 1929 - 1966)는 끝내 무기를 거머쥐었습니다. 주위에서 친구와 신도들이 무장한 군인들의 총칼에 죽어가고 있는데, 성직자라고 해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믿었습니다. 콜롬비아가 오랫동안 지속되는 가난을 종식시키려면, 인민은 토착 군부세력과 결탁한 미 제국주의의 횡포를 막아야 한다는 것이었지요. 또한 혁명가로 존재하는 것은 모든 기독교인의 의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성직자의 노여움은 결국 총을 들게 되었고, 그는 1966년에 “총을 든 예수”는 끝내 사살 당함으로써 장렬한 최후를 마감합니다. 칠레의 음유시인, 빅토르 하라 (Victor Jara, 1932 - 1973)는 카밀로 토레스의 죽음을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Bildergebnis für camilo torres  Bildergebnis für camilo torres

 

 

 

카밀로가 쓰러진 그곳에 Donde cayó Camilo

십자가 하나 태어났다 nació una cruz

허나 나무로 된 게 아니라 pero no de madera

빛으로 된 것이다. sino de luz

그가 무기 집으러 갔을 때 Lo mataron cuando iba

그들은 그를 죽였다. por su fusil.

카밀로 토레스는 살기 Camilo Terres muere

위해서 죽는다. para vivir.

 

 

사람들이 말하기를 총성 후 Cuentan que trás la bala

어떤 소리가 들렸다고. se oyó una voz.

“혁명!”하고 외친 자는 Era dios que gritaba

신이었다고. ”Revolutión!“

나의 장군은 성직자의 A revisar las sontanas

옷을 뒤진다. mi general

왜냐면 게릴라에게는 que en la guerilla cabe

성직자가 좋으니 un sacristán.

 

 

그들은 십자가에다 그를 Lo clavaron con balas

총알로 (못) 박는다. en una cruz.

그들은 그를 예수처럼 Lo llamaron bandido

강도라 불렀다. como a Jesús

그들이 그의 총을 집으러 Y cuando ellos bajaron

다시 왔을 때 por su fusil

그들은 발견했다, se encontraron que el pueblo

인민 속에는 십만 tiene cien mil,

 

 

십만의 카밀로가 있는 것을 cien mil Camilos

싸울 자세가 되어 있는 prontos a combatir

카밀로 토레스는 살기 Camilo Torres muere

위해 죽는다. para vivir.

(서로박 역)

 

https://www.youtube.com/watch?v=_rllf7Df10o

 

카밀로가 쓰러진 곳에서 “빛으로 이루어진 십자가 하나”가 탄생하였다는 것은 그야말로 상징적 의미를 지닙니다. 이는 마지막 연에서 기이하지만, 애타는 희망으로 연결됩니다. 시인은 다음과 같이 믿고 있습니다. 적어도 남미에서 가난 그리고 이와 병행해서 출현하는 폭정이 사라지지 않는 한, 또 다른 카밀로가 계속 출현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총을 집어든 예수”의 놀라운 상이 살아남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살아 있는 한, 저항 운동은 결코 종식되지 않으리라고 합니다. 이러한 예수의 상은 급기야는 이른바 해방신학의 방향을 마련해주었습니다.

 

  Wandbild zum Gedenken an Víctor Jara im Barrio Brasil  in Santiago de Chile

 

 

 

요즈음에도 나는 빅토르 하라 (Victor Jara)의 「카밀로 토레스」를 자주 듣습니다. 빅토르 하라 - 그의 삶은 짧지만, 파란만장한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의 노래는 무지개처럼 아름답고, 만화경의 찬란한 상을 여지없이 보여줍니다. 그러서인지는 몰라도 그것은 격동하는 시대적 전환기에 하나의 획을 그을 정도로 현대인들에게 깊은 감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칠레의 가난과 폭정은 이제 거의 사라졌지만, 빅토르 하라의 노래만큼은 우리를 여전히 감동시키고 있습니다.

 

음유시인은 산티아고 근처의 롱켄이라는 소도시에서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마누엘은 술꾼이었으며, 언제나 어머니에게 매질을 가했습니다. 아버지가 가출한 뒤에 어머니인 아만다는 혼자서 생계를 꾸려나가야 했습니다. 아만다는 예술을 이해하는 열정적 여인이었습니다. 어린 빅토르에게 문학적으로 음악적으로 영향을 끼친 자는 어머니였지요. 저녁 늦게 일터에서 돌아온 어머니는 자식들을 위하여 저녁 식사를 마련한 뒤에, 언제나 기타 반주에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미가 선택한 곡은 대부분 칠레의 전통 민요였습니다. 그미는 주로 목적 (木笛)과 기타 반주로 이어지는 라틴계의 음악을 애호했습니다. 리듬과 멜로디에 있어서 남아메리카 인디언들의 음악과 가미된 서정적인 음악을 생각해 보세요.

 

 Bildergebnis für carmina burana

 

어머니가 사망한 뒤 빅토르 하라는 스스로 생계를 꾸려나가야 했습니다. 서점의 점원으로 일하기도 하고, 틈틈이 시간을 할애하여 신학을 공부하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연극에 관심을 기울여서, 칠레 대학의 연극 팀의 멤버로 비정기적으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가령 그가 공연한 작품 가운데에는 『카르미나 부라나 (Carmina Burana)』도 있습니다. 참고로 말하자면 이 작품은 12세기에 집필된 중세의 칸타타인데, 1937년 우연히 바이에른 남부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독일의 작곡가이자, 루이제 린저 (Luise Rinser, 1911 - 2002)의 남편인 카를 오르프 (Carl Orff, 1895 - 1982)는 이 곡을 바탕으로 하여, 오페라를 만들었는데, 작곡가에게 세계적 명성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나중에 오르프의 오페라는 세계 여러 나라에서 연극 작품으로 공연되곤 하였습니다.

 

 

루이제 린저의 모습

 

빅토르 하라는 우연한 기회에 가수이자 공예가인 비올레타 파라 (Violeta Parra, 1917 - 1967)를 알게 됩니다. 그미는 남미 전통 음악을 사랑하는 가수로서, 산티아고에 작은 카페를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비올레타는 어린 남자의 재능을 감지하고, 그를 자신의 카페에 초대합니다. 그리하여 빅토르 하라는 시와 음악에 매진하며, 파라의 카페에서 노래를 부르게 됩니다. 만약 비올레타 파라와 조우하지 않았더라면, 하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았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비올레타는 남미 전통 민요에 관한 많은 자료를 제공하는 등 15년 어린 젊은이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습니다. 그미는 예컨대 “10행시 (Décima)”의 작사 그리고 작곡을 도와주었을 뿐 아니라, 연주 당시에 반주를 맡기도 했습니다. 빅토르 하라가 일류 가수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은 누구보다도 비올레타의 도움 때문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