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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박: 호프만슈탈의 '예더만'

필자 (匹子) 2022. 5. 26. 10:55

친애하는 K, 오늘은 후고 폰 호프만슈탈 (Hugo von Hofmannstahl, 1874 - 1929)의 「예더만 Jedermann」에 관해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이 작품은 신비극으로서 “어느 부자의 죽음에 관한 유희”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데, 1903년에서 1911년 사이에 완성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1911년 12월 1일 막스 라인하르트의 연출로 베를린에서 처음으로 공연된 이후로 오늘날까지 상연되는 명작입니다.

 

원래 이 작품은 1509년 영국에서 처음으로 출간된 익명의 작품 「만인의 소모니지 The Somonyge of Everyman」을 재구성한 것입니다. 또한 한스 작스 Hans Sachs는 1549년 「헤카스투스라고 불리는 죽어가는 부자의 코메디 Comedi von dem reichen sterbenden Menschen, der Hecastus genannt」라는 극작품을 발표하였는데, 이 작품 역시 집필 당시에 참고문헌으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작품의 소재는 12세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호프만슈탈은 1906년에 산문으로 작품을 완성하려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작가는 과거의 소재를 재구성하려고 시도했을까요? 이를 밝히려면 우리는 호프만슈탈이 1911년에 발표한 두 편의 논문을 읽으면 족합니다. 그 하나는 「예더만의 오래된 유희」이며, 다른 하나는 「대중 앞의 유희」입니다. 논문에서 호프만슈탈은 신의 재판정 앞에서 “예더만”의 이야기를 전하며, 지금까지 기독교의 극으로써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세상의 부귀영화 그리고 죽음에 관한 근본적인 문제를 하나의 동화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들려주려 했습니다. 자신의 재미있는 것은 등장인물의 이름들이 인간의 특성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예더만”은 “만인”이라는 의미를 지니는데, 수많은 인간들 가운데 한 사람을 지칭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방식은 중세에 나타난 소설, 가령 장 드묑 Jean de Meun 그리고 기욤 드 로리스 Guillaume de Lorris의 『장미 이야기 Roman de la Rose』에서 처음으로 사용된 것입니다. 친애하는 K, 인간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추구하지만, 대부분 자신의 삶이 유한하다는 것을 망각하며 살아갑니다. 그렇기에 인간이 추구하는 것은 눈앞에 도사린 이득일 뿐, 인간으로서 가장 가치 있는 무엇이 아닙니다. 대부분의 인간은 경박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참회와 믿음을 통한 구원은 작품에서 진리 찾기에 대한 하나의 예일 수 있습니다.

 

막이 오르면 전령관이 등장합니다. 그는 작품이 종교적 극작품이라는 것을 분명히 규정하면서, 아울러 예더만의 소환을 사람들에게 통고합니다. 전령관의 말은 관객에게 오히려 생소화 효과를 불러일으키게 할 수 있습니다. 재판정에는 위대한 신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내린 계명을 어기고 죄의 나락 속에 빠진 모든 인간들을 징벌하려고 합니다. 신은 예더만을 법정에 데리고 오라고 죽음에게 명령합니다. 그렇게 해야만 예더만의 지상에서의 삶을 평가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예더만은 실제 삶에 있어서 자신의 재산에 만족하면서 살아가는 부자입니다. 그는 자신의 재산으로 향락의 정원을 꾸미려고 합니다. 이로써 그는 자신의 애인 “정사 情事”의 환심을 사려고 합니다. 예더만은 죽음 혹은 내세의 삶에 관해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길을 지나치다가 가난한 이웃이 돈을 달라고 하자, 그는 1실링만을 건네줍니다. 이웃은 과거에는 매우 부자였는데, 그만 가난하게 된 사람입니다. 그가 기독교의 이웃 사랑을 말하면서, 돈을 더 요구했을 때, 주인공은 그를 동구 밖으로 쫓아버립니다.

 

뒤이어 그의 머슴이 등장합니다. 그는 주저앉은 채 당장은 아니더라도 먼 훗날 반드시 빚을 갚을 테니, 제발 어음증서를 찢어달라고 간청합니다. 이때 주인공은 이를 거절하고, 머슴을 옥사에 가두어버립니다. 그의 집에서 오랫동안 일하던 머슴을 구금하게 되자, 머슴의 아내는 큰 소리로 흐느끼며 웁니다. 이때 예더만은 짜증을 내면서 그의 아내와 자식들에게 생계비를 지불합니다. 주위의 가난뱅이들 때문에 기분을 잡치고 말았습니다. 주인공은 자신이 구매하려는 향락의 정원 땅을 구경하러 가고 싶지 않아서, 애인 “정사”에게 가려고 집을 나섭니다.

 

이때 예더만은 어머니와 마주칩니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영원한 구원에 관해서 깊이 생각하라.”고 충고하지만, 주인공은 어머니의 충고에 대해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 길에서 주인공은 “정사”를 만납니다. 그미는 축제에 참석하려고 주인공을 데리러오는 참이었습니다. “정사”가 주인공 그리고 친구들과 함께 연회에 참석하려고 등장했을 때, 주인공의 기분은 약간 느슨하고 안온해집니다. 오늘도 사람들은 포도주를 거나하게 마시고 노래를 부르며, 서로 끌어안은 채 춤을 추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예더만은 이상하게도 오늘만큼은 이러한 축제를 거나하게 즐기지 못합니다. 조만간 자신에게 드리울 불행한 사건을 예견했기 때문일까요? 예더만의 가슴속에 서서히 어떤 불안감이 엄습합니다. 일순간 종소리가 들립니다. 주인공은 이를 불길한 징조로 받아들이고, 전전긍긍합니다.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부른다고 말했으나, 주위 사람들은 그의 몸에서 열이 난다고 말할 뿐입니다. 바로 이 순간 "죽음"이 예더만 앞에 모습을 드러내며, 왕관을 쓰고 계신 신에게로 가자고 완강하게 요구합니다.

 

이때 예더만은 약 한 시간의 말미를 달라고 "죽음"에게 청원합니다. 이는 자신과 동행할 사람을 찾기 위함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예더만은 친구들에게 동행을 부탁합니다만, 지금까지 그토록 자신을 따르던 친구들은 주인공의 부탁을 거절합니다. 그들은 죽음의 길에 동행하게 되면, 나중에 이 세상으로 돌아올 수 없다고 굳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예더만의 수족처럼 행동하던 두 명의 사촌 역시 동행하기를 거절합니다. “정사” 그리고 그미의 손님들은 이윽고 죽음이 나타나자, 신속하게 그곳을 빠져나가버립니다.

 

죽음은 주인공에게 출발하자고 종용합니다. 친구와 애인들로부터 버림받은 예더만은 황급히 자신의 금고를 찾습니다. 마지막 남은 삶에서 권력과 안전을 도모하려면, 무엇보다도 보물이 필요하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금고에서 솟아오른 자는 "맘몬"이었습니다. "맘몬"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나는 그대의 재화이며, 그대의 모든 것은 지상에 머물러야 한다.” 예더만은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는 신세가 되자, 엄청난 절망과 고독에 휩싸입니다.

 

이때 누군가 주인공의 이름을 부릅니다. 뒤를 돌아보니, 거기에는 어느 힘없는 여인이 서 있었습니다. 그미는 “선행”이라고 일컫는 여인인데, 주인공과 동행하고 싶다고 말하였습니다. “선행”의 몸은 혼자서 걷지 못할 정도로 가냘팠습니다. “선행”이 걷도록 도와준 사람은 그미의 자매 “믿음”이었습니다. “믿음”은 주인공에게 신의 영원한 사랑을 알려주면서, 신에게 은총을 부탁하라고 충고합니다.

 

예더만은 오랜 세월을 방탕하고 이기적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는 “죽음”의 뒤를 따라 걸으면서 드디어 신을 찾게 됩니다. 이로써 구원을 위한 마지막 희망이 주인공의 내면을 가득 채우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악마”가 나타나서 예더만을 찾습니다. 이는 죄로 뒤덮인 주인공의 영혼을 지옥으로 데리고 가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예더만은 바로 이 순간 “선행”과 “믿음”의 도움으로 신의 보호를 받게 됩니다. 얼마 후에 주인공은 깨끗한 모습으로 돌아와서 죽기 직전에 신의 심판석 앞으로 나아갑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예더만의 줄거리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물론 극작가가 신의 구원과 믿음을 강조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 외의 다른 함의는 무엇일까요? 당신이 무신론자라면, 이 작품에서 무엇을 도출해낼 수 있을까요? 어쩌면 극작가는 수많은 인간들이 헛되이 살다가 죽는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한 게 아닐까요? 우리는 삶의 의미를 전혀 인지하지 않은 채, 누군가를 사랑하고, 결혼하며, 아이를 낳고 살다가 그냥 죽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능력과 관심사를 전혀 간파하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우리 모두는 호프만슈탈의 눈에는 마치 보덴 호수 위를 말 타고 급작스럽게 달리는 기사와 다를 바 없이 비칠지 모르겠습니다.

 

예더만은 과연 누구일까요? 그는 자신의 재산을 무척 아낍니다. 그렇다고 해서 구두쇠는 아니며, 처음부터 탐욕스러운 인간도 아닙니다. 주인공은 충만한 에너지를 지닌, 영리한 사내입니다. 모든 일을 능수능란하게 다룹니다. 가령 돈은 예더만에게 특별한 무엇입니다. 어쩌면 돈을 하나의 신적 존재로 숭배하는 것은 당연할지 모릅니다. 머슴이 등장하는 장면에서 주인공은 신의 은총을 받을 기회를 잃어버리고 맙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더만이 피도 눈물도 없는 사악한 인간은 아닙니다. 머슴의 가족들에게 어느 정도의 생계비를 부담하기도 하니까요. 비록 이러한 결정이 동정심이라든가 선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최소한의 인간적인 면을 드러내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어머니와의 만남에서 주인공의 성격이 백일하에 드러납니다. 그는 어머니의 말씀을 하나의 잔소리로 생각하고 이를 무시합니다. 그만큼 그는 진리에 귀 기울일 줄 모르는 피상적인 인간입니다. 성숙되지 못한 소 앞에서 염불을 외워보았자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친애하는 K,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어느 은사를 생각합니다. 자신의 말뜻을 정확하게 알아듣는 학생은 불과 소수라고, 무척 미안한 말씀이지만, 자신이 대부분의 경우 우이독경하고 있다고. 이 얼마나 학생들, 아니 청취자를 모독하는 말입니까? 그렇지만 은사의 말은 부분적으로 사실입니다. 어쩌면 당신 자신이, 아니 나 자신이 “예더만”일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이득에 집착하다가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간과하는 사람을 생각해 보세요. 예더만의 운명은 바로 당신의 것입니다.

 

다시 요약해 보겠습니다. 호프만슈탈은 작품 「예더만」을 통해서 모든 것을 신학적으로 재조명하려 한 게 아니라, 과거의 살육의 노래 속에서 예술적 그리고 시대비판의 요소를 찾으려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작품 내에서 중세의 요소는 온존하고 있지만, 알레고리의 신앙 논문이라든가 종교적 독단론의 허례허식은 삭제되어 있습니다. 신비극의 주제 측면에서 극작가는 새로운 특성을 부여합니다. 예컨대 “맘몬”은 과거의 작품과 마찬가지로 의인화되어 있지만, 주인을 다스리게 되는 하인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물신숭배의 대상인 “돈”은 호프만슈탈의 경우 중세와 20세기를 연결시켜주는 매개체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현대에 이르러 “돈”은 보편적 가치로 간주되지 않는가요?

 

모든 것은 돈의 액수에 의해서 물량적으로 가치 평가됩니다. 돈은 모든 재화 뿐 아니라, 모든 수고 행위에 대한 대가마저 지불하고 있을 정도이니까 말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운명은 돈에 의해서 규정될 정도입니다. 문제는 호프만슈탈이 돈과 반대되는 상관물로서 신앙을 거론한다는 사실입니다. 신은 예더만의 부채장부를 제시하게 하여, 모든 것을 정당하게 청산하고 부를 분배하려 합니다. 그렇지만 신의 척도는 결코 형식적이고 추상적인 게 아니라, 도덕적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희생적 죽음으로써 예더만의 죄는 미리 지불되었던 것입니다.

 

호프만슈탈의 문화 비판 내지 시대 비판은 작품의 민중적 특성 뿐 아니라, 막스 라인하르트의 공연에 의해서 더욱더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베를린 공연을 관람한 사람들은 5000명이 넘었고, 연출자는 커다란 호평을 받았습니다. 물론 알프레트 케어 A. Kerr, 엘제 라스커쉴러Else Lasker-Schüler등은 과거의 경건한 신앙을 모독하는 작품이라고 혹평했지만 말입니다. 1920년부터 잘츠부르크에서 「예더만」은 자주 상연되었는데, 그때마다 격렬한 반응을 얻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예더만」을 무대에 올리기 위해서는 공연 텍스트를 미리 손질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로 작품은 운문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호프만슈탈은 각운을 맞추기 위하여 노력하였습니다. 대본을 번역된 그대로 공연한다는 것은 실패할 소지가 있습니다. 둘째로 작품의 분량이 너무 두툼합니다. 따라서 작품의 많은 부분을 삭제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문제는 어떠한 부분이 삭제되어야 하는가? 하는 물음입니다. 일단 사건의 진행 과정에 도움이 되지 않는 지엽적인 내용을 골라 삭제하십시오. 그렇지 않을 경우 공연은 두 시간 반 정도 걸리게 될 것입니다. 셋째로 대사가 너무 길고 장황합니다.

 

극작가는 여흥을 즐기는 잘츠부르크 사람들을 염두에 두면서 극을 집필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공연 이전에 관객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이 극을 관람하는 사람들은 21세기에 살아가는 한국의 젊은이입니다. 이들에게 연극이라는 장르 자체가 진부합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젊은이들은 수많은 액션 영화 내지 소극에 익숙해 있습니다. 그러니 대사를 줄이고 대신에 제스처 내지 극적 행동을 강조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공연의 성공을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