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동독문학

서로박: 80년대 동독 작가와 스타지

필자 (匹子) 2017. 2. 23. 09:52

친애하는 H, 신진 작가들의 문학관 및 구동독에 대한 상을 논할 때 우리가 특정 작가를 예로 들기란 무척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프렌츨라우어 베르크를 중심으로 활동한 작가들은 상당히 많으며, 상당수의 작가들이 베를린 장벽의 붕괴 전에 이미 서독으로 이주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특정 작가를 거론하는 대신에, 일반적 특성만을 조심스럽게 지적할까 합니다.

 

50년대에 출생한 젊은 작가들은 대체로 체코의 침공에 대해 항의하다가 투옥 당했으며, 결국 서독으로 송치되는 비운을 겪었습니다. 구동독에서 이름 있는 작가들은 구서독에서 책을 간행하게 했습니다. (이는 구동독에게는 불리한 것이었지만, 결과론적으로 고찰할 때 동서독 교류를 활성화시키게 하는 방법들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이들에 비하면 대부분의 신진 작가들은 서독의 출판사들과 아무런 출판 계약을 맺을 수 없었습니다. 가령 게어하르트 볼프는 다음과 같이 토로하였습니다. “파펜푸스 (Papenfuß)는 우스꽝스럽게 말했지요. ‘우리는 어떤 높은 문화에 대한 언더그라운드의 대표자들이다’라고요.

  

어쩌면 이러한 불이익 때문에 그들은 쉽사리 안기부 (MfS)”에 가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로써 커다란 죄의식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젊은 작가들은 어떠한 신념의 필요성도 느끼지 않았고, 공산주의에 대해 실망하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친애하는 H, 젊은 작가들에게는 구동독은 “끔찍한 독재 국가”일 뿐 아니라, “바보들이 지배하는 국가”였습니다. 다시 말해 젊은 작가들은 국가에 대해 냉소적 태도를 지니고 있었지요. 그렇기에 스타지에 협력했다는 사실을 그다지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습니다. 스타지는 이들에게 이른바 “일자리”를 제공하고, 어느 정도 생활비까지 보장해 주었던 것입니다. 가령 젊은 시인, 자샤 안더존 (S. Anderson)은 여러 가지의 가짜 이름으로 활동하면서, 1975년부터 동료 작가들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였습니다. 문제는 그가 1986년 서독으로 이주한 뒤에도 “페터스”라는 가명을 사용하면서, 지속적으로 이주 작가들에 관한 정보를 스타지에 넘겼다는 데 있습니다.

 

라이너 셰들린스키 (R. Schedlinski)의 경우를 봅시다. 1991년 12월에 그가 “게어하르트”라는 가명으로 스타지의 “비공식 협조 요원 (IM)”으로 일했다는 사실이 백일하에 드러났습니다. 그제야 셰들린스키는 이듬해 1월에 자신이 스타지와 함께 일했다는 사실을 고백하였습니다. 1974년에 (17세의 나이에) 생계 문제로 인하여 스타지에 가담하여, 84년부터 베를린의 특정 지역에 거주하는 작가들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글을 통해서 셰들린스키는 “내면화된 구조주의적 예술적 공간” (G. 볼프)에 너무 깊이 침잠했다는 점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적 갈등과 고통의 흔적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독자에게 진실성을 보여줍니다.

 

그렇지만 셰들린스키는 몇 달 후에 논문, 「권력의 비 관할성」에서 스타지와 협력한 자신의 행적을 합법화하려고 했습니다. 셰들린스키에 의하면 지난 10년간 스타지는 모든 것을 포착하는 해독 기계의 역할을 담당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검열, 금지 뿐 아니라, 허가, 검열 해제 등 또한 결정한 기관이 스타지라고 합니다. 셰들린스키는 (나쁜?) 체제 내에서 자유 공간을 찾고, 올바르게 행동할 수 있다고 믿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독재자의 측근이 되어 독재를 타도하려는 발상은 얼마나 혼란스러우며, 현실적으로 어려운가?”를 사전에 알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특유의 사보타지를 발휘하여 동료들에 대해 거짓 보고를 제공했다 하더라도, 동료 작가들의 창작 행위에 대한 그의 간섭은 불필요한 것이었습니다.

 

 

안기부 본 건물. 지금은 박물관으로 변신해 있다. 

 

 

 

국가란 대부분의 젊은 작가들에게 진부한 사회주의 정신의 유물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노동 운동의 역사를 “어떤 거짓 섞인 추상적 과거사”에 불과한 것으로 매도하였습니다. 사실 구동독의 젊은 작가들은 주어진 현실에서 어떠한 희망도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신뢰할만한 작가들은 비어만 사건의 여파로 나라를 떠나고 없었으며, 기회주의자들만 문화 관료의 썩은 녹을 먹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가치 전도된 현실 상황에서 젊은 작가들은 어떠한 대안에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고, 예술 지상주의에 침잠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친애하는 H, 스타지는 은밀하게 구동독에 남아 있는 모든 작가들에게 자기비판을 강요했습니다. 이로 인하여 작가들은 진솔한 발언을 작품에 담을 수 없었으며, 가장 중요한 주제들을 의도적으로 회피하였습니다. 그밖에 작가들 사이에는 어떤 불신의 앙금이 온존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스타지의 끈질긴 간섭과 회유 정책으로 비롯된 것이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어진 현실이 비민주적일 때 훌륭한 작품이 탄생하는 법입니다. 가령 자라 키르쉬와 같은 시인을 생각해 보세요. 그미가 구동독에 머물 때 남긴 시작품들과 1979년 이후 서독으로 이주한 뒤에 남긴 시작품들 사이에는 문학적 수준에 있어서 어떤 편차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에 관해서는 다음의 기회에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억압과 비민주적 상황은 때로는 작가에게 문학적 자양으로 작용하기도 합니다.